‘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후렴구를 가진 찬송이 있습니다(새 찬송가 606장). 이 찬송은 ‘요단강 건너’로 암시된 “저 가나안 땅 귀한 성”(246장)을 “세상 작별한 성도들”이 “하늘에 올라가 만나는” 곳으로 묘사합니다(3절). 그렇기에 이 찬송은 기독교인 장례식 때 자주 불려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경에 기록된 ‘가나안 땅’은 위 가사처럼 믿고 죽으면 누구나 다 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곳에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그 외에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심지어 대제사장 아론과 핵심 인도자인 모세조차도 가나안 땅에는 못 들어갔습니다(민 14:22-23, 20: 12, 24).
위 찬송 가사와 성경 기록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우리가 왜 구약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적용해야 하는 지를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그들(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난 이러한 일들은 본보기”가 되었고, “우리에게 경고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전 10:11).
사실 근 지난 한 달여 동안 구약을 읽어오면서 그 안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기록을 신약의 믿는 이들인 우리가 어떻게 삶에 바르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계속 묵상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 얼마 전 아침에 교회의 추구 진도를 따라 다음 말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네게브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이 아다림 길(정탐꾼들의 길)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과 싸워
그들 가운데 얼마를 포로로 잡아갔다(민 21:1).
이 지점에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역과 불순종과 탐욕과 불평 등 그들 내부의 적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위 구절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직면했던 싸움을 묘사합니다.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아모리 왕(민 21:21)과 바산 왕(33절)과 함께 요단 강 동쪽에 위치했던 대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강 이 편의 전쟁 외에 강 저편에서도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즉 위 찬송가가 말한 “요단강 건너”간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 아이 성 등에 있는 대적들을 물리쳐야 하는 소위 ‘정복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에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은 물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출 3:8). 그러나 눈 앞에 있는 대적을 진멸한 만큼 차지하고 누릴 수 있는 땅이었습니다. 위 가사처럼 “인간의 괴롬이 끝나고, 이별의 눈물이 없는 곳”(3절)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나안 땅은 구체적으로 어떤 곳인가?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마고 약속하신 땅(창 50:24),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사람들의 손에서 건져 내어 데리고 올라가시겠다고 하신 그 땅(출 3:8), “산에 시내가 흐르고 … 밀과 보리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와 석류가 있는 땅…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을 … 여호와께서 좋은 땅을 주셨기에 그분을 찬송할” 그 땅(신 8:7-10).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서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한 자에게 전쟁을 가르쳐 알게 하도록 여호와께서 의도적으로 열국을 남겨두신 그 가나안 땅(삿 3:4)은 과연 어떤 곳인가?
이러한 가나안 땅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이 주제를 심도 있게 추구하는 가운데 알게 된 아래 관련 각주들이 이해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구약의 예표에서 가나안은 두 방면을 나타낸다. 긍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풍성한 땅으로서(신 8:7-10와 7절의 각주 1) 측량할 수 없는 풍성(골 1:12, 엡 3:8)을 가지신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부정적인 방면에서 가나안은 사탄에 속한 어둠의 왕국인 공중 곧 하늘의 부분을 상징한다. 이 세상의 왕이며(요 12:31)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인(엡 2:2) 사탄은 권세(행 26:18)를 가지고 있으며 천사들(마 25:41)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들은 사탄의 부하들로서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엠 6:12)이다. 따라서 사탄은 그의 왕국(마 12:26)과 어둠의 권세(골 1:13)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이 좋은 땅을 차지하고 누리기 위하여 가나안 족속과 맞서 싸운 것은 성도들이 모든 것을 포함하신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도록 모든 지체들을 포함한 교회 전체가 ‘하늘들의 영역에 있는 악한 영적인 세력들’(엡 6:12)과 맞서 영적 전쟁을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예표이다(후략)”(민 21:1 각주 1).
“좋은 땅인 가나안 땅은 모든 것을 포함하신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온전하고 완전하며 완결된 예표이다. 그리스도는 삼일 하나님의 체현으로서(골 2:9) 모든 것을 포함하신 생명 주는 영으로 실재화되셨는데(고전 15:45, 고후 3:17), 이 영은 하나님의 백성의 누림을 위해 그들에게 할당된 유업이시다(후략)”(신 8:7 각주 1).
가나안 땅을 바로 이해하려고 위 민수기뿐 아니라 창세기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관련 구절들을 읽고 묵상한 결과, 제 안에 다음 세 가지가 정리되었습니다.
1.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은 ‘나중에’ ‘저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체험하고 누리는 영적인 영역이다.
2. 이스라엘 각 지파들이 가나안 땅의 분깃을 할당받았듯이(수 14:1), 신약 성도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영접할 때 “빛 가운데에서 성도들에게 할당된 몫”(골 1:12)을 받았다.
3. 그러나 그 땅의 모든 풍성을 실제로 누리려면, 1) “그분 (좋은 땅) 안에서 행하고”(골 2:7), 2) “모든 성도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닫고” 체험하는 몸의 생활(엡 3:18, 고전 12:14-27)을 하며, 3) 누림을 방해하는 모든 영적인 대적들(일곱 족속들)을 대항해 승리를 유지해야 한다(마 16:18, 엡 6:12).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하니발 작성시간 19.05.25 천국과 지옥은 하나라는 것을 생각해 보시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제가 오래 전에 올렸던 "성경 속의 광고버젼"을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갈렙 작성시간 19.05.25 성도의 죽음을 요단강으로 묘사한 것은 아마도 죤 번연의 천로역정의 영향이 아니겠나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기독도가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강을 건너게 되죠.
그래서 성도의 죽음을 요단 강으로 묘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요단강이 옛사람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있다고 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바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5.25 요단강.....옛사람의 죽음...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