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서로 다른 방언이었을까요?
작성자애통하는자|작성시간14.06.11|조회수139목록댓글 30글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과연 서로 다른 방언이었을까요?
행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5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
행2: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행2: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행2: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이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 됨이냐
행2: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행2: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행2: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행2:12 다 놀라며 당황하여 서로 이르되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고전14:18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위의 두 말씀에서는 동일하게 방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2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방언과 고전14장의 방언을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있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이 견해를 가진 이들은 사도행전 2장의 방언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언어였지만 고전14장의 방언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영의 언어라고 주장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고전14장14절 말씀을 그 근거로 제시를 합니다.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방언으로 기도를 하면 영이 기도를 하지만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한 다는 이 말씀이 바로 근거라는 것입니다.
영의 언어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과 하나님이 교통을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으로 기도하면 깊은 내용을 기도를 할 수 있고 많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들의 주장일 뿐입니다.
마음이 무엇을 기도했는지 모르는데 깊이 기도를 했는지 많이 기도를 했는지 알게 무엇입니까?
그리고 방언은 기도를 위해서만 주어진 은사가 아니었습니다.
이 방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고전14:19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이 두 말씀은 방언을 통해서 가르침과 교훈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방언이 영의 언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은 방언을 오직 기도할 때에만 합니다.
그렇다면 고전14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방언에 대한 바른 분별은 무엇일까요?
14장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방언 역시 사도바울은 그 언어를 아는 이들이 이해가 가능한 외국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그와 같은 말씀이 있나요?
바로 위에 기록한 18절 말씀에 있습니다.
18절에서는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의 성도들보다 방언이 아니라 방언들(외국어들)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한국 성경에는 방언(tongue)이라고 번역이 되었습니다만 영어 성경에는 방언들(tongues)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학습을 통해서 구사하게 된 외국어들을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다른 성도들보다 더 방언들을 하므로 하나님께 감사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그가 받은 방언의 은사가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영의 언어들이라면 어떻게 여러 개의 방언들이라고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받은 방언의 은사들은 사도행전2장의 방언들과 같이 구분이 가능한 언어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방언이라 표현하지 않고 방언들이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2장의 방언이 이해가 가능한 외국어이었던 것처럼 고전14장의 방언 역시 이해가 가능한 외국어였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방언의 은사가 하나는 외국어이고 다른 것은 이해가 불가한 영의 언어라는 것이 설득력도 떨어집니다.
또한 동일한 성령님으로 주어진 은사가 서로 다르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14절은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할까요?
이것도 이 방언이 은사로 얻은 외국어라고 인정을 하면 쉽게 설명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외국어를 학습하지 않고 말을 하면 자신이 하는 방언을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으로는 기도를 하고 마음으로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번 양보를 해서 오늘 날 일반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인정을 한다할지라도 (저는 절대로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만) 그 사용하는 방법도 성경과 맞지가 않습니다.
방언으로 무엇인가를 말할 때는 두 세 사람이 차서 곧 순서를 따라서 하라고 했습니다.
고전14: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한 번에 통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날 이 방언이라고 하는 것이 일반교회에서는 어떻게 사용이 되고 있습니까?
두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서 그 방언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까?
20년이 넘게 보아 왔지만 그렇게 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또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고전14: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그런데 통역도 없이 왜 그렇게들 하는지요?
만약 제가 교회에서 대표로 기도를 한다든지 말씀을 나눌 때에 네팔말로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제가 남들이 못하는 외국어를 한다는 자랑을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방언의 은사는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교회에서 사용이 될 수 없는 제한적인 은사입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은사자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생각할 때에 이 방언의 은사는 또한 하등적(?) 은사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갖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신과 하나님께 말하라고 하신 말씀이 그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날 일반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언의 은사라고 하는 것이 성경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은사라고 인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임 안에서도 몇 몇 이들이 방언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방언이 과연 성령님으로 인해서 주어진 은사인지 다시 한 번 이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을 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모임이 방언을 인정치 않는다고 억지를 부립니다.
그러나 모임이 성령님의 은사인 방언을 인정치 않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방언이 아닌 다른 방언을 하는 일반 교회의 방언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소위 방언이라는 것은 이해가 가능한 외국어가 아닙니다.
그냥 뜻 없는 소리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이 방언의 은사는 다른 은사와 같이 주님을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함을 가지고 간구함으로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방언을 받기 위한 기도회를 하기도 하고 안수를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할렐루야’를 반복해서 말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터져 나오는 뜻 없는 소리의 반복을 방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방언을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은사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이들 중에도 방언을 하는 이들이 있다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묻겠습니다.
그 방언이라는 것을 구원을 받을 때에 받았습니까?
아니면 구원을 받기 전에 위의 방법으로 받아서 하게 된 것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며 구원을 받을 때에 방언도 함께 받는 성도들 보지 못하였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이에게도 성령님의 은사가 주어지나요?
자신이 하고 있는 주장이 얼마나 성경과 거리가 먼 것인가를 잘 생각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오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고전14장의 방언의 은사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교제를 하였습니다.
이 은사가 과연 오늘 날에도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습니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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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관찰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6.28 속죄제단 방언할 줄도 모르면서 랄랄라가 하늘이 준것일 것이다라고 상상하고 성경을 거기에 뜯어 맞추는 위인이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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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crystal sea 작성시간 20.06.28 관찰자
성경의 말씀이 랄랄라가 하늘이 준 방언이라는데 그러면 어쩌란 말이요? 바보요? -
답댓글 작성자관찰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6.28 crystal sea 데이빗 오워가 부러운 모양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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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crystal sea 작성시간 20.06.28 관찰자 갑자기 데이빗 오워를 호출하는 것은
궁색해 졌다 이 뜻이죠?
그러니까 진리로 돌아 오세요!
무슨 데이빗 오워니 누구니....
마방셔틀하면서 헛수고를 합니까?
진짜 방언을 가져다 주면 묵묵부답이면서,
가짜 마귀 방언은 잘도 퍼와~! ㅍㅎㅎ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crystal sea 작성시간 20.06.28 관찰자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19:3~4)."
이 것이 진짜 방언입니다.
영으로 방언을 할 때,
입술의 발성은?
"정말 저자는 ' 차우 라차우 차우 라차우 카우 라카우 카우 라카우 즈에르 삼 즈에르 삼'이라고 말해 댄다(사28:10 공동번역)."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행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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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사람은 방언의 내용을 듣고,
성령 밖에 있는 사람은 랄라라롤롤로또또또따따따... 발성만 듣습니다.
<헤테로스 글롯사>는 사람의 언어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이라는 뜻입니다.
외국어끼리는 질적으로 사람의 언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질적으로 다른 언어가 아닙니다.
<육의 언어>와 질적으로 다른 <영의 언어>라는 뜻입니다.이미지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