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곡교를 지나니 국도 외에는 길이 안 보인다. 논두렁으로는 섣불리 못 내려가겠다. 두찬리 근처에 오니 갑자기 눈이 내린다. 거의 함박눈 수준. 5분여 만에 온 천지가 진회색의 고독으로 빠진다. 쉰들러 리스트에나 나올듯한 배경. 문득 gloomy Sunday의 음률이 흐르는 듯하다. 우박과 함께 쏟아지는데도 다행히 습도를 품지 않은 건설(乾雪)이다. 희뿌옇한 눈안개 속에 모든 차들이 엉금엉금 긴다. 그래도 자신있게 나아가는 차는 트럭.

오늘은 지도를 안 보고 진행하려고 했으나, 도저히 불가능하다. 눈발이 말갈기처럼 휘날리는 도로에서 지도를 꺼내 독도를 하려니 영 죽을 맛이다.
능교란 외자 이름의 다리를 건너 원삼 4거리에 오니 레커가 사고차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남의 불행이 자신의 의식주를 보장해 주는 직업. 표현이 조금 거칠지만, 이 세상의 모든 일엔 남의 불행이 곧 나의 행운인 경우가 대부분이 아닐까? 윈-윈 전략이니 상생이니 어쩌구 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는 거대한 제로섬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윈-윈이니, 상생이니 하는 것은 나와 너에 대한 상호 이해(understanding)에 불과하며, 나와 너의 이해(利害)의 차는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함으로서 남이 소외되는 구조. 그 소외의 충격과 정도가 적은 사회. 그게 곧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아닐까.

원삼4거리를 지나며 보니 농로가 도로 우측으로 새댁 고운 댕기처럼 펼쳐진다. 눈 내리는 벌판엔 아무도 없고 남측 먼 하늘은 온통 검회색 구름뿐이다. 흰 눈발에 존재하는 유일한 형상은 내 발자국 뿐. 이 절대의 순백에 나는 고개를 떨군다.
신?구국도 사이에 좌전마을이 고랑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지형적으로 봐서 이럴 경우 마을을 따라 죽 올라가면 반드시 길이 나온다. 더구나 이 구간은 넘기 힘들다는 좌찬고개가 아닌가. 마을을 따라 오르니 저수지가 나온다. 마을의 마지막 집 개. 덩치는 플랜더스의 개처럼 아주 큰데 짖는 태는 꼭 발발이 수준이다. 덩치 값해라, 이놈아. 내가 도보여행을 하며 생긴 확실한 편견 하나, ‘개보다 닭이 훨씬 시적이며, 진화의 속도가 빠르다 ’는 점이다. 예상대로 좌찬고개 정점에서 길이 마주친다.
지하 암거를 통해 남서울파크를 지난다. 어제 조금 서둘렀다면 여기서 1박을 했을 게다.
<푸르메전원마을>을 지나자, 영동고속도로 양지CA 근처. 차들 왕래가 끊임없고 눈이 녹아 질퍽한 도로 걷기가 참으로 괴롭다. 아침에 눈이 올 땐 오늘의 도보에 많은 기대를 했었는데, 제설도 재빠르게 한다.
<양지리조트> 입구. 이 도로 양편은 온통 스키점으로 가득 차 있다.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오길레 스키점이 이렇게도 많을까.

몽골에 수중폭파부대 타이티에 장갑차 부대와 비슷
신촌댁설렁탕 집에서 설렁탕 한 그릇 먹고 출발.

오늘 가는 길의 최대 난코스. 양지에서 용인까지.
양지교를 지나자 차들이 엄청나게 질주한다. 왜 이런 길을 걷고 있는지 회의가 든다. 송문1교. 지나가는 차의 소음과 후폭풍과 시꺼먼 눈 녹은 물로 거의 심장마비 수준. 몸 피할 곳이 없다. 가드레일 뒤로 길이 있다면 그리로 갈텐데... 이건 아니다. 부산 용당의 컨테이너 전용 도로 보다 더 겁난다.
이런 길을 빠르게 통과하는 수 밖에 없다. 500여m 정도 전진했을까, 좌측을 보니 아주 호젓한 시골길이 갑자기 나타난다. 운명의 여신은 항상 인간의 예측을 불허하게 한다. 지도를 수십번이나 보고 독도를 한다고 했는데도, 왜 이길을 못봤던가?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들이 나타난다. 송동, 신평(11;40통과), 범말 등의 마을이 끝나고, 양지천이 나타난다. 제방을 산책하는 어느 아주머니를 만나 진행로를 확인한다. 양지에서 용인까지를 무척이나 걱정했는데, 양지교에서 송문교까지의 500여m를 제외하고는 너무나 한적하고 평화로운 도보길이다.
청연교 지나 양지천 뚝 위에서 용인시의 모습을 훑어본다.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 몰라도 조그마한 돌멩이가 신발 안에 들어와 발바닥을 괴롭힌다. 벌써 1시간여를 그대로 걷고 있다. 이 돌멩이가 발바닥에 주는 고통으로 다리에 대한 고통은 잊혀지는 듯하다. 이통치통(以痛治痛)이다. 맞나?
양지천을 쭉 내려가니 바로 용마초등학교. 학교 담벼락에 길거리 미술관이 설치되어 있다. 동양화인데 참 멋지다. 이런 아이디어를 내신 용마초등학교의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경안천의 술막다리를 지나니 김령장이다.


김량장
시장 안으로 들어 가보나 여느 시장과 다른 것은 느끼지 못한다. 시장 안 중국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시킨다.
용인도 예스런 멋은 전혀 찾을 길 없고, 뭔가 산만하고 뒤죽박죽인 장난감 통 속 같다. 시청으로 가는 길에 몸집 좋은 플라타너스가 용인대 입구까지 죽 도열해 있다. 그런데 나무 덩치에 비해 그 간격이 너무 소밀하게 붙어서 있는 느낌이다.
용인 시청 앞.

세계 제일의 문화 복합 행정 도시를 지향하는 도시에 걸맞은 음식점이 시청 앞 도로 맞은편 둔덕에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이름하여 <청학골> 음식점이 무지하게 크다. 건물이 무지하게 길게 보인다.

오늘 최대의 과제 멱조현 고개를 넘는 것.
금학천교를 지나 멱조현 아파트 앞을 지나다, 바로 산으로 접근한다. 지도에는 메주고개라고 되어 있는데 멱조현 고개가 메주고개인지 알 수 가 없다.


멱조현아파트 앞에서 그냥 국도로 쭉 따라 가면 될 길을 그놈의 차들이 싫어 괜히 산으로 붙는 바람에 엄청 고생을 한다. 눈에 명태껍데기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다. 20여분을 오르니 갈림길. 우측은 용인시청쪽. 좌측은 석성산 가는 길. 아마 이곳이 메주고개인 모양이다. 갈림길의 안내판에는 <대동여지도>,<산경도>,<자산홍-용인의 상징목>,<꿩-용인의 상징 새>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정작 고개 이름은 없다.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바람은 매섭다. 조금 가다 어떤 청년이 오기에 멱조현 고개를 물으니 이곳이 아니란다. 제길. 석성산 정상까지는 20여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다며 주변을 상세히 설명하나 초행길이라 말귀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 청년을 보내고 5분여를 가니 어떤 초로의 신사분을 만나서 또 묻는다. 역시 이곳은 멱조현과는 관계없는 곳. 말을 하는데 입에서 단내가 솔솔 풍긴다. 아마 산에서 소주 한 컵 한 모양. 나는 급한데 정작 이분은 한남정맥(?)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신다. 나는 정작 멱조현을 통과만 하면 그만인데, 이분은 내가 멱조현을 통과하여 한남정맥을 종주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내가 청년에게 물었던 것을 똑같이 신사에게 물었는데, 이곳이 멱조현이 아니라는 것만 빼고 전부 다른 대답이다.
한남정맥에 대한 장황한 설명이 끝난 후, 자기를 따라 오란다. 할 수 없다. 후퇴를 하는 수 밖에. 올라갔던 등선과는 다른 능선으로 하산. 옛국도와 만나는데 이런 멱조현 아파트가 바로 왼쪽 옆에 나타난다. 불과 50여m를 거의 한시간만에 걸은 셈이다. 옛국도에서 5분여 걸으니 여기가 멱조현 고개라고 가르킨다. 그냥 도로를 따라 걸으면 그만인 것을, 무슨 멋 부린다고 사서 고생하나.
고개를 내려오는데 국도 확장공사로 마치 생지옥 같다.
동백지구. 아파트 아파트 아파트......길가에 청년들 팜플릿 들고 이 추위에 분주하다. 부동산회사 부동산회사 부동산회사.....
산에서 만난 신사에게 구성읍으로 가는 길을 자세하게 들었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동백지구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성읍 가는 길을 물으니 대답이 한결 같다. <몰라요>. 아니 길가 팜플릿 청년도 모른다. 아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나? 도대체 뭐가 잘못됐지. 사실은 내가 잘못 물은 죄가 더 큰 부분도 있다. 구성읍으로 가기위한 가장 빠른 방법은 아차치고개를 넘는 것인데, 많은 사람에게 구성읍 가는 길을 물은 것이 아니라, 아차치고개 가는 길을 물은 것이다. 지도에는 있어도 실제 그 지명을 모르는 현지인이 수두룩한게 현실이다.
동백지구단지 내에 있는 호수(?)를 찾아야 되는데 이 호수를 아는 사람이 없다. 동백지구가 넓다해도 그래도 불과 반경 몇 Km내. 불과 반경 몇 Km 안에도 모른단 말인가? 진짜 이해가 안 된다.
어떤 아주머니 혹은 노처녀가 길가에 있기에 다가가서 동백지구 안에 있는 호수를 물어보니 역시나 모른단다. 내가 지도를 꺼내어 보이자, 자기가 이 동내 이사온 지 한달도 안 되어 잘 모른단다. 무작정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자연이 아주머니 혹은 노처녀와 같은 보조로 걷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걷다보니 아파트 이름이 <호수마을>이다. 그러면 호수는 이 근처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아주머니 혹은 노처녀는 신호등을 건너며, 쭉 바로 올라가서 좌측으로 틀면 안 나올까요? 하며 손을 흔들며 신호등을 건너가는 데, 말꼬리의 여운으로 봐서 그녀는 이미 호수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내 예감이 틀림없으리....왜, 처음엔 호수가는 길을 모른다고 했을까? 서울 사람과 지방 사람의 차이? 하여튼 많은 의미가 함축된 사건이다.
호수마을을 지나 좌측으로 방향을 튼다. 전진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내가 예측한 방향과는 일치하지만, 거리 표지판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다.
사실은 <죽전>을 어제 지나온 <일죽>,<죽산>과 크게 혼동을 한 것이다. 지도를 한번만이라도 유심히 봤더라면 오늘의 여정이 훨씬 쉬웠을 것이다. 지명도 정확하게 만 기억했더라면......<죽전>표시도 많고 죽전가는 버스도 엄청나게 많이 다니고 있었는데도, <죽전>에 대한 위치를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에 결국은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괜히 JY출판의 지도제작자를 욕하고, 잘못은 내 안에 있었는데도......
또 하나의 큰 잘못. 길 찾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어볼 것이 아니라, 그 많은 부동산회사에 가서 물어보면 명확할 것을. 이런 벅수.
결국 부동산회사에 들어가 <아차치 고개>를 물으니 원래 <여차지고개>라며, 연유를 물으니 가르쳐주지 않는다. 몰라서 안 가르쳐주는지 모르쇠 작전을 쓰는지 모르겠다. 혹 <달래나고개>와 연관이 없는지?
경주 <여근곡>이 지금은 많이 공개된 형편이지만, 10여년전만 해도 이 동내가서 <여근곡>을 물으면 외부인에게는 절대 안 가르쳐주던 것이다
부동산회사의 여사장님 매우 친절하시다. 밖에 나와 <아차치고개>를 가는 지름길을 가르켜 주신다. “저 앞에 보이는 야산 뒤의 아파트가 보이죠. 바로 그 아파트 옆이 바로 여차지고갭니다. 호수를 둘러가면 먼 거리니 이 길로 나가셔서 횡단보도 건너 우회전하여 산길을 질러가세요.” 해는 뉘엿뉘엿하는데 산길이라? 반신반의하며 전진하다보니 낡은 구도로가 영동고속도로 밑으로 나타난다. 현지인이 아니면 결코 모를 길이다. 이어 나타나는 용인?구성 지구 도개공의 대규모 주택사업단지. 길은 참으로 오래된 듯하다. 이곳도 몇 년후면 엄청나게 변해 있겠지. 가슴에 찬바람이 분다. 구성읍으로 들어가는 도로 입구에서 돌아보니 《안녕히 가십시오 88CC》란 안내 표지판이 인사를 한다. 나도『다음에 또 봅시다』하며 속으로 뇌까린다.
법무부연수원 입구를 거쳐 경찰대학 직원 아파트. 곧 구성읍이다. 도로가의 농협마트에 들어가 맥주 한잔 쭉 들이킨다.
오늘 무지하게 고생한 날이다. 내 성급한 성격이 만든 죄이다. 도대체 이 도보여행이 무슨 의미를 지닌단 말인가? 문득 여태 바둥바둥 걸어온 길이 후회스럽다.
구성읍을 벗어나는 도로가에 공덕비와 당산나무가 도로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수령이 무려 450년. 내가 보기에는 영남대로 최고의 나무다.


이제 길은 판교까지 거의 일직선. 도로가에 엄청나게 큰 불고기집. <금강산 화로구이> 그 크기, 화려한 조명, 종업원의 활기에 발길이 절로 식당안으로 이끌려가는 듯하다. 언젠가는 다시 올날이 있겠지.
용인시청 앞의 식당 <지리산> 보다 더 클 것 같다.

동아솔레시티 아파트 앞을 지나니 또 눈이 내린다. 용인 죽전, X-PARK. 탄천교를 지나며 잠잘곳을 수색해보나 그게 또 쉽지만은 않다. 제길. 오늘은 왜 이러노. 오리역 근처에 찜질방이 있으나 무시. 근처 노점상에게 물어보니 정자역까지 가야 모텔이 있단다. 다리는 천근 같으나 할 수 없다. 탄천 따라 걷다보니 분당 E-MART가 나타난다. 안에 들어가서 눈요기를 하다, 우연히 상점 거울에 나타난 나의 행색을 보고 내 스스로 놀란다. 다 쭈그러진 얼굴에 방한모를 쓰서 감춰진 줄 알았던 흰머리가 양귀 옆으로
삐딱하게 늘어져 있고, 눈동자는 휑하니 초점이 없고, 손에는 지하철에서 파는 1,000짜리 장갑이 왼쪽 손에만 껴져있다. 다시 보니 조금 깨끗한 노숙자 수준이다. 얼른 나와 버린다.
정자역. 모텔은 안 보이고 호텔 밖에 없다. 호텔과 모텔의 차이는 무얼까? 가격이 만만치 않다. 오늘 하루만 잠자리를 구하면 이번 도보 여행도 끝인데 내가 책정한 가격대의 잠자리가 없다는 게다. 눈 질끈 감고 하룻밤 호사스럽게 지내려고 마음을 굳히니 길에서 만난 촌로의 얼굴들이 자꾸 떠오른다. 그 많던 모텔과 00장 하는 여관은 어디에 다 숨어버렸나. 지하철 2구간표 끊어 모텔이 많다는 동내를 찾아나선다.
여기서 빠른 걸음으로 가면 숭례문까지는 불과 반나절 거리인데. 제길,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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