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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오스카 와오를 권한 지인은 이 소설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도저히 결합할 수 없는 두 단어를 결합시키게 한 마르께스의 그 인상적이던 소설과 어디가 같은 것일까.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번역은 ‘끝내줬다’(오스카 와오에는 비속어가 많이 나온다. 그 영향이라고 생각하시기를) 말투는 답싹답싹 와 안겼고 툭 치는 것 같다가 금세 붕 떠서 깔깔거렸다. (번역자에 대한 찬사다. 그녀는 현재 캐나다에 살고 있으며 두 아이를 키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근친간의 결혼, 그리고 살인으로 인한 오 대의 저주를 다룬다면 오스카 와오는 도미니카의 숨은 역사 속에서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저주가 삼대에 걸친 한 집안에 어떤 식으로 내리는지를 다룬다. 어느 나라건 저주는 존재하는 법이다. 모든 나라는 각각 저주라고 생각하는 사건이 있고 그 저주는 민간신앙과 몸을 결합해 나타낸다. 도미니카에서는 그 저주가 '푸쿠'가 된다.
다른 점이라면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는 그들이 만들어낸 토착 신화가 빛을 발한다.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그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오스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스카 자신이 있을 수 없는 일을 말하는 듯한 인물로 그려질 뿐이다. 만화와 SF 주인공이 거리를 뛰놀듯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오스카가 즐겨 읽는. 만화. 그들을 안다면, 그 이름이 갖는 의미를 안다면 좀 더 쉽게 와 닿을 수 있지만 어쩌랴. 짧은 주석에 의지하는 수밖에.
저자는 소설 속에서 오스카 와오는 오스카 와일드의 발음을 잘못 들어서 나온 별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미남이며 그 유명한 유미주의자인 오스카 와일드가 정 반대형인 오스카 와오로 바뀐 것이다. 미를 추구하는 그의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와 오스카 와오는 거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와일드는 잘 생긴 천재 작가로 고전 문학에 통달했던 유미주의자인 반면 와오는 뚱뚱하고 못 생긴 무명의 작가 지망생으로 만화와 <반지의 제왕>이나 다른 소설들을 탐닉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소설을 썼던 것처럼 와오 역시 소설쓰기에 몰입하지만 하나도 발표하지 못한 채 무명으로 죽는다. 미국으로 건너 간 와일드를 만난 미국인들이 그를 조롱하려다가 교양과 비상한 재주에 오히려 존경하게 된 반면 사람들은 끊임없이 와오를 비웃고 조롱한다. 그의 현학적인 말투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너무 어렵다는 이유로 무시당하고 조롱받는다. 어울리지 않는 시대에 태어난 탓일까.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서 어울리지 않는 말투를 사용한 탓일까.
판타지, SF, 디지털 게임까지 모조리 섭렵한 그이지만 그는 너무 진지했다. 너무 순진했다. 도미니카는 여성이건 남성이건 정열적이다. 더구나 젊다. 젊음의 특징은 무모하고 순진하다. 마음에 들면 이내 대시한다. 대학에 다니는 젊은이들의 사랑은 순식간에 불타오르고 이내 꺼진다. 그들은 수없이 상대를 바꾸어가며 '자빠뜨리고' 즐긴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요 추세요 현대인이다. 하지만 오스카는 어떤가. 기껏 용기를 내서 말을 걸면 여자들은 웃어대거나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망가 버린다. 그가 택한 현란한 대사는 도무지 먹혀들지 않으며 그의 순진함은 낯설디 낯설다.
와오의 정체는 무엇일까. 현대인들이 즐기는 가벼운 환락에 탐닉하면서 실제로는 여자의 손 한번 잡지 못하는 이 거구의 청년의 정체는?
그의 내력은 범상치 않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의 가족력이 드러난다. 와오가 오스카의 반대편에 서 있으면서 일견 닮은 것처럼 할아버지 아벨라르는 여 제자 엘로이즈와 연애를 했던 중세시대의 사제, 아벨라르처럼 독재자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사는 한편 최후의 순간에는 독재자에게 반기를 든다. 끝내 이단으로 몰려 죽은 아벨라르처럼 그 역시 딸을 달라는 무서울 것 없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요구를 거절한 덕분에(강력한 빽도 없는 주제에 무소불위의 독재자 요구를 거절하다니! 하긴 이 경우에는 빽도 소용없다.) 그 자신은 감옥에 갇히고 나머지 가족은 모두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는다. 셋째 딸 벨라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먼 친척에게 맡겨져 끔찍한 화상을 입고 고모인 라 잉카에게 구출된다.
벨라의 일생 역시 기구하다. 그녀가 물불 모르고 들이댄 첫사랑은 권력의 하수인의 아들이었고 두 번째 남자는 권력의 주체, 트루히요 바로 그 남자의 사위였다. 당연지사 임신한 그녀는 죽을 정도로 구타당한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떠나와 죽을 정도로 일하면서 두 아이를 키운다. 암에 걸려서까지 일을 쉬지 않는 그녀는 일에 중독된 일벌레처럼 보인다. 두 아이. 정 반대로 자란 두 아이.
그렇게 해서 저주는 삼대에 걸쳐 내린다. 할아버지는 숙청되어 감옥에 갇히고 어머니는 권력자의 사위를 사랑한 죄로(어쩌면 사랑에 눈멀어 진실을 보지 못한 죄로, 그것은 젊음의 죄일까, 그녀가 가꾸어온 환상의 죄일까)추방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오스카 와오는 권력자의 하수인, 경찰의 정부를 사랑한 탓에 옥수수 밭에서 죽임을 당한다. 죄가 있다면 미망의 죄일 것이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 죄, 세상을 믿은 죄, 아니 세상이 만들어낸 환상을 믿은 죄.
와오의 삶은 수많은 죽음의 역사를 머리위에 이고도 그 진지함을 떨쳐버린 우리 자신의 삶이다. 현대인, 젊은이들에게 내려진 저주, 푸쿠. 삶의 열정을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진실에 쏟아버린 젊은이. 그 사랑이 가치 있었던가. 저자만이 알고 있을 일이다. 그 사랑이 우리 모두에 대한 조롱인지 아니면 비난인지. 우리는 창녀를 사랑한다. 우리는 자본이라는 창녀, 돈이라는 창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권력이라는 창녀가 여전히 설치고 있지 않은가. 힘없는 평민에게 남겨진 것은 오직 미망뿐?
읽고나서 문득 드는 생각, 미국이란 이런 나라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힘이다. 풀리처상을 받은 이 작품은 미국내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은 한다리 걸쳐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문학성에 주의해 상을 준다는 것, 미국의 힘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타문화를 용납하는 놀라운 포용력이다. 그들의 문학사를 들춰보면 포용 범위는 항상 넓어져왔다. 백인문학에서 흑인문학으로 그리고 다음에는 아시아인 문학으로(이민자 문학이다) . 라틴, 미국 내가 아닌 도미니카마저 그들 자신의 문학으로 껴안는 포용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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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정가네 작성시간 09.02.20 그렇지요. 삶의 가치가 분명히 권력이나 자본, 그리고 가벼운 환락에 있는 건 아닌데... 하긴 우리가 언제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한번이라도 교육 받은 적이 있던가요?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살고 있어 소비하지 않으니 경제가 엉망이 되고 있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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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장미꽃 작성시간 09.02.25 글 읽고난 후 느낌이 아닙니다. 우리가 교과서나 소설책을 보면 글의 길이가 이보다 짧아서인지, 왼쪽에서 오른쪽 끝까지 눈 돌리가(^^^) 힘겹습니다. 습관이 그렇게 무서운건지 딱 책 길이만큼 가다가 다음 줄로 옮겨가려 하는군요. 시골(?)산다는 핑계로 문화생활과 담 쌓고 살아도 괜찮지 싶더니 요새 바람재는 다채로워져 생소하기는 하나 여러모로 자극제가 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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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2.25 그런 면도 있군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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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더바 작성시간 09.02.26 네, 희야님. 저도 읽기가 좀 불편했는데요..... 잘 나가지지도 않구요. 원고지 쓰시듯이 하지 마시구요. 문장만 끝나면 다음 줄로 옮겨 가서 쓰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읽기가 상당히 힘이 듭니다. 전 희야님 글은 언제 읽든지 꼭 읽거든요. 이 글은 엄두가 안 나서 아직 다 못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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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2.26 흠. 문장 끝나면 다음 줄이라....글쎄요. 시도는 해보겠습니다만...여태 번역도 페이퍼도 이렇게 써와서....이미 습관이 굳어져서....한글에 써서 옮기면 이렇게 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