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 프랑크푸르트에 발을 내디뎠다. 생애 첫 외국 여행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웠고 몹시도 깨끗한 거리는 무척 한산했으며 녹음으로 짙푸르렀다. 방학이라 대학 기숙사는 비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당분간 대학 기숙사에 머무를 수 있었다.
그 날 우리는 다퉜고 나는 처음으로 혼자 거리에 나왔다. 대학 기숙사에서 nacht! 어쩌고 저쩌고 하는 글귀가 써진 전철을 탔고 시내에서 내렸는데.
예나제나 변함없이 형편없는 겁쟁이인 나는 당시에도 잔뜩 긴장하고 있어 누가 건드리기리도 하면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상태였다. 말 한 마디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온 데다가 길도 몰랐고 사전 지식이란 조금도 없는 상태였던 것이고 게다가 싸워서 감정이 치달을 대로 치달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 깨끗한 거리, 포장 잘 되어있는 길과 멋지고 근사한 건물들. 상점들은 저마다 특색을 자랑하고 있었고 그안에 진열된 물건들은 몹시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군데군데 가로수들은 어찌 그리 푸른지. 당시 어리버리하기만 했던 내 눈에 그곳은 도심이 아니라 휴양지처럼 보였던 것인데.
문득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즐거워보이고 행복해보이는 사람들 중에 종이봉지를 들고 길 거리에 앉아 있는 여인이 눈에 띄었던 것이다. 갈색 머리 그 여인은 뚱뚱하지는 않았어도 퉁퉁했고 헐렁한 티셔츠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긴 했으나 한눈에 겹겹이 접힌 뱃살이 느껴졌다. 여인은 길거리 의자에 앉아 갈색 종이봉지를 들이키고 있었다. 음료수라도 마시나.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그렇게 보기에는 여인의 행색이 추레했다. 추레라....그건 느낌이다. 자신을 가꾸어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과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의 차이는 금세 드러난다.
바빠서 가꿀 여유가 없는 사람과 아예 가꾸지 않는, 즉 일상에서 벗어나버린 사람과의 차이도 금세 드러난다. 추레란....사느라 바빠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미처 신경 쓸 수 없는 옷차림이 아니다. 적어도 빨아입기는 하니까. 그 추레함이란....모든 시선에서 나를 놓아버린 사람의 추레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입은 옷이 얼마나 좋던지간에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다스림이 문제가 되는, 그런 것이 바로 추레함인 것이다.
그녀, 그녀가 그랬다. 갈색 계통의 옷을 입고 그 포장 잘 되어 있는 거리, 먼지 한 점 없을 듯한 깨끗한 거리의 근사한 벤치에 앉은 그녀가 그랬다.
그리고는 깨달았다. 아 저 여자가 마시는 것은 음료수가 아니겠구나.
몇 걸음 더 걷다보니 그런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물론 많지는 않았고 두 어명이나 더 보았을까.
그처럼 깨끗하고 그처럼 잘 가꾸어진. 꽃들이 바구니에서 흘러내리고 녹음 짙은 나무가 있는 도심. 모든 것이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듯한 나라, 그런 나라에서 왜 저들은 대낮에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일까. 이런 나라라면 사람들은 행복해야 하는 것 아닐까.
술은 한 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던 때였다. 대학 다닐 때 치기로 술을 마셔보기는 했지만 괴롭기만 했던 물건은 나와는 영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낮에 거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그들은 자신을 팽개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엊그제 버스를 타고 서울역을 지나는 길이었다.
요즘 서울 시내는 눈부시게 깔끔하다. 버스 중앙차선제로 바뀐 뒤 도로는 깨끗해졌고 버스 정류장마다 줄화분에 심긴 선홍색 혹은 보랏빛 제라늄들이 선명하게 빛나 검은 도로와 대조되면서 도로도 꽃도 사람도 한결 아름다워 보인다. 게다가 녹색으로 뒤덮인 로터리들 혹은 작은 공간들은 어떻고.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갈 때마다 외국에 온 듯한 착각이 드는 것은 바로 꽃들과 녹색들 때문이다.
차가 한동안 밀렸다.
수선거림이 느껴졌고 짜증도 전달되어 왔다. 차가 많아서 밀리려니 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차들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길 한 가운데, 웃통을 훌렁 벗어젖힌 남자가 승용차를 붙들고 있었다. 긴 머리칼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고 그의 웃몸에서는 근육이 흔들거렸다. 배에도 팔에도 등에도 근육들이 늘어져 출렁거렸다. 게접스럽다고 한다. 아마 그럴 것이다.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그 창피한 근육들을 표현하는 말이.
길 한 가운데서 버스들이, 차들이 지나는 가운데 그 남자는 승용차 운전자를 붙들고 시비를 걸고 있었던 것이다.
시비가 끝났는지 남자는 팔을 내두르면서 인도로 갔다. 그가 비틀대면서 떠나자 승용차는 재빨리 출발했다. 눈으로 그의 뒤를 좇았다. 그가 지나는 지하철 환기구 위에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수십년 동안 단 한 번도 빨지 않았을 듯한 옷을 입고 반쯤 누워 있던 그가 뭐라고 소리 질렀고 승용차를 붙들고 있던 그 남자는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리고 나는 단숨에 세월을 건너 뛰었다. 푸랑크푸르트의 그 거리로......
서울은 이제 눈부신 제라늄과 번쩍이는 대리석 광장, 유리로 지어진 근사한 건물과 계단이 아닌 에스컬레이터들이 있는 도시가 되었다. 그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거리인데, 도시인데...이 모든 일들은 도시 거주민들을 위한 것이고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인데.
왜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갈수록 더 불행해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내 뱃살, 출렁이는 뱃살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도요새 작성시간 09.08.02 게으름은 아닐테고, 도망친 흔적이겠죠. 현대인이라면.... 가슴이 쩌릿!
-
작성자창넘어하늘 작성시간 09.08.01 '희야'님 글은 한 번 읽어서는 어려운 글이 많이 있어요. 이 글도 더 많이 읽어야 될 것 같아요. 이렇게 말씀드려서 많이 미안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추레하다'의 뜻도 다시 새겨봐야 될 것 같고 '게접스럽다'라는 말도 처음 접합니다.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과 함께 그 동안 얼마나 무지하게 게으르게 살았나에 대한 반성도 큽니다.
-
답댓글 작성자어진내 작성시간 09.08.02 저두 반성합니다^^* 그 마음을 어찌 표현할까 싶었는데 제마음을 언제나처럼 창넘어하늘님이 대신 표현해주셨네요...내속에 들어와사는듯하다니까요 ㅎㅎ추레하다...게접스럽다...공부좀 해야겠어요..추접스럽다는 자주 사용하는데 ㅋ
-
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8.02 아이구. 죄송해요. 아마 제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잡아보려고 노력하니 그런 것 같아요. 추레하다, 게접스럽다....글쎄요. 다소 작위적인 어감을 추가하기는 했을 거예요.
-
답댓글 작성자어진내 작성시간 09.08.02 우리말 배움터에 하나 올려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