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뜬다. 창은 아직 캄캄하다. 언제나 빛의 기운으로 시간을 가늠한다. 그러나 내가 잠든 아들 아이 방은 길가가 아니라 빛기운만으로 시간을 가늠할 길이 없다.
왜 눈이 떠졌지?
일어난다. 거실로 나와 시계를 바라본다. 발광 시계는 3시 33분을 가리킨다.
아. 오늘 아들아이 면회가기로 했었지.
지금 준비할까?
아니다. 너무 이르다. 조금 더 자도 괜찮을 게다. 지난 번 면회때도 세시에 일어났는데.
그게 벌써 네달 전이니 시간이 빨라도 정말 빠르다.
책상에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책을 바라본다. 기운이 빠진다. 지난 몇 주간 논문은 도무지 진전이 없다. 해이해 진 것일까?
논문을 단숨에 써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애가 있다. 그 장애는 마음에서 정신에서 오는 것. 지금 나는 슬럼프를 겪고 있는 중일까.
복잡해진다. 고개를 흔든다. 생각하지 말아야지. 멀리 돌아갔다 오는 거야. 그래 그래야 머리가 정리가 될 거야.
책상에서 물러난다. 도로 아들아이 방으로 돌아온다.
그래, 모든 걸 잊고 자는 거야. 안방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다섯살짜리 어린 아이 시어머니도, 그 옆에서 엎치락뒤치락 대고 있을 남편도.
모두 잊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퍼뜩 눈을 뜬다. 옆에 갖다 놓은 전화기를 들여다본다. 여덟시 반이다. 이런 이런................너무 늦었다.
아들이 기다릴텐데..기다릴텐데.
부엌으로 뛰어간다. 냉동고를 열고 준비물을 꺼낸다. 간밤에 준비해놓은 물건들을 챙기면서 딸아이를 부른다.
"유니야~~일어나. 어서 가야지."
딸아이와 나만 가기로 했던 것이다. 남편은 남아서 시어머니를 간호하기로 했다. 추석이었으니 명절이었으니
오죽 기다릴까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아들에게서는 지난 일주일간 거의 매일 전화가 왔던 것이고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와 계신 바람에 가지 않으려 했으나 남편이 간병을 맡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아홉시 정각에 전화가 왔다.
"엄마, 나 나왔어. 사람들하고 함께 나와 있어. 엄마 아직 출발 안했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지난 번에는 여덟 시에 출발했었는데.
"그래, 아직 서울이야. 너 어디 있는데?"
"나, 버스 터미널 옆에 있어. 여기 있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다. 그래도 할 일은 해야지. 준비를 마치고 나선 시각이 열 시다.
마음은 급한데 길은 멀기 짝이 없고 올림픽 대로는 벌써 만원이다.
"이렇게 가다가는 세시에나 도착할까 모르겠네."
아닌게 아니라 얄미운 내비게이션은 3시 반을 가리키고 있다. 강건너를 바라본다. 강변북로는 한산하다. 아니 한산한 게
아니라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다. 그래 강변북로를 타야지.
비거 토마스(Bigger Thomas) 이야기를 꺼낸다. 요즘 아니 어젯밤에 읽느라 잠을 설친 리처드 라이트(Richard Wright)의
소설 주인공이다. 라이트의 소설을 펼치자마자 대번에 빨려들었고 그래서 단숨에 읽어치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그래왔다. 이창래가 그랬고 토니 모리슨이 그랬다. 토니 모리슨에 필이 꽂힌 것은 그녀의 이야기가 몹시도 복잡하면서
환상적이고 그리고 너무도 실제적인 덕분이다. 공연히 캐논이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게 만들었던 그녀, 토니 모리슨.
비거 토마스는 소설<토박이>의 주인공이다. 어쩌고 저쩌고를 한창 엮어가는데 딸아이가 불쑥 말한다.
"귀가 울려서 잘 안들려."
나도 그렇다. 왜 그렇지?
이야기를 중단한다. 비거 토마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46번 도로를 탄다. 이런 실수다. 네비게이션을 믿지 말아야 하는데.
기계를 믿은 것이 실수다. 내 기억대로 가야 하는데 구리에서부터 네비게이션이 지시하는대로 길을 잡았고 그리고는 영락없이
돌아가는 길을 탄 것이다.
입술을 깨문다. 다시는 네비게이션을 믿지 않으리라. 늘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부족이다.
고개를 넘는다. 밀리는 길을 간신히 지나 넘고 또 넘는다. 길은 S자, 아니 뱀 모양. 아니 아니 이런 길은 구절양장이라고 말하던가?
아니 구곡양장이던가? 어찌 되었거나 양구는 파로호 주변이다. 추곡터널 웅진 터널이 생겼으니 망정이지 예전에는 다섯시간도 더
걸렸단다. 한없이 구불거리는 듯한 산을 넘고 넘고 또 넘는다.
마침내 한 시, 아들에게서 전화가 온다.
"어디야?"
"여기 터널만 지나면 돼. 십분 정도 걸릴 거야."
딸아이가 나 대신 대답한다.
한 시 반경에 양구에서 아들아이를 만난다. 피씨방에서 죽치던 아이는 냉큼 올라타지만 숙소를 인제로 잡았다는 말에 얼굴이 근심으로
일그러진다. 행동반경은 양구라야 한단다. 펜션이 동이 나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해. 그럼 모텔에서 잘까?"
에멜무지로 물어보자 아들아이는 소리를 꽥 지른다.
"아아아니!!!!!!!!!!!!"
인제로 넘어 왔다.
펜션에 짐을 풀고 서둘러 주변 탐색에 나선다. 내린천은 기억에도 유명한 곳.
요즘이야 래프팅으로 유명하지만 우리가 내린천을 배울 당시야 어디 그랬던가.
삼팔선으로, 지금의 휴전선이 생기기 이전 삼팔선이 지나던 곳으로, 육이오 전쟁 당시 뺏고 빼앗는 치열한 전투지로 유명했던 곳이다.
세시 반경밖에 안되었는데 산속 마을엔 벌써 저녁이 내렸다.
펜션 주인에게 내린천은 역사깊은 곳으로 유명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기억이 안난다는 표정이다.
피아간 전투가 치열해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그 흘러내린 피로 하천이 모두 핏물이었더라는 서글프고 가슴 아픈 역사가 서린 곳.
항상 느끼지만 내 역사기억은 너무도 짧다.
매번 가는 곳마다 아이들에게 역사와 유래와 얽힌 이야기를 해주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처럼 양구와 인제, 그리고 펀치볼 이야기도 역시 부족한 채로 아이에게 전달되었다. 그림처럼 펼쳐 놓아도 전달은 흐릿한데 이처럼
흐리멍덩한 전달은 어쩌자는 것인지. 매번 내 혀의 둔함을 절감한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다. 래프팅과 맑은 물과 번지점프만 기억할 뿐.
아이들은 웅크린 채로 물을 들여다본다. 돌멩이 하나하나 다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 가끔 튀어오르는 물방울은 물 속 피라미의 짓,
바람이 사뭇 차 모두 웅크린 채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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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10.16 레바논 지원한다고 졸라대네요. ㅠ.ㅠ 가도 걱정 안 가도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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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낭개 작성시간 09.10.14 한창 열열히 연애시절....양구로 몇번 면회를 갔었지요......그래서 양구하면 반가운 마음이네요......울아들은 우리집 부근에서 근무하는 바람에 한번도 면회를 안가고 제대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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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10.16 그때 양구는 배를 타고 가야 했지요? 지금은 터널이 생겨서 서울에서 세시간이면 간답니다. 춘천-서울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더 빨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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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창넘어하늘 작성시간 09.10.15 한참 속이 허할 때네요. 아들 면회는 한번도 안했지만 형님댁 조카 면회는 한번 갔었지요. 우리 조카도 그렇게 많이 먹었어요. 면회가는 길이 힘들긴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가시니 즐겁기도 하시겠어요. '희야'님의 걱정을 조금은 덜어 드릴 수 있을까 싶어 이번 겨울은 좀 덜 춥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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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희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10.16 오잉? 아들 면회는 왜 아니 가셨어요? 요번에 가서 펀치볼지역도 구경했어요. 아들 덕분에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