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을 많이 잔다고 뭔가 해소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낮잠도 자고, 아들이 독서실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잠자리에 들었건만 오늘은 6시 10분에 일어났다.
하필 시험 보는 날인데 아침을 굶겨보내야하다니 당황스러웠는데 엊저녁에 사다놓은
과일과 빵이 눈에 띄었다. 두유 한 팩, 바나나 한 개와 초코 소라빵 한 개를 지퍼백에 담으며 아들 눈치를 보느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머리 감고 옷갈아 입느라 왔다갔다 하던 녀석이 불쑥 묻는다.
"내신을 망하면 도대체 어떻게 돼?"
어젯밤, 자다가 깨서 보니 방문 밖에 불빛이 훤했다. 새벽 3시 반.
큰 애가 아직 컴퓨터에 붙어있나보다 하고 나가봤더니 아들 녀석이 옷입은채 방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양치하고 자야지!" 목소리도 크지 않았는데 애는 반짝 고개를 들며 대꾸를 했다.
"했어. 나, 안자고 공부할 수 있는데 언어는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자다 깬 녀석이 불쑥 내뱉는 말이라니.... 아연했지만 불을 끄고 그냥 자라고 말해주었을 뿐이다.
자고 일어나서도 고민은 진행중인가보다. 새벽에 하던 질문을 고대로 이어간다.
"언어야 뭐, 공부 안한다고 못보겠니? 어쨌든 우리 말이잖아. 고전이나 문법 같은 거나 좀 보지?
외워야하는 거 빼고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내신은 달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50분 동안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건지. 300자 요약도 해야하고...."
아들은 뭔가 화가 난 분위기로 집을 나서며 "오늘은 학교에서 공부하다가 올래. 며칠 쉬니까 긴장이 안돼."했다.
중간고사 중이다. 고3 중간고사는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이틀 째 시험을 망쳤다면서 영 기분이 안좋은 아들. 나는 내심, 진짜로 중간고사를 망치고 나면
아예 내신을 포기하자, 한 가지 더 포기하면 좀 낫지 않겠나, 싶다. 그러나 아들은 영 불안한 모양이다.
이런 게 외고의 무한경쟁이란 건지 모르겠다. 주말에 경복고 친구랑 정독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는
전화 목소리가 활기 차서 내가 다 기운이 날 지경이었다. 친구가 인생에서 너무도 중요한 이 녀석,
처음 전학을 와서는 친구들이 좋아서 날마다 인생이 즐거워 보였다. 심지어 첫 시험을 시작할 때는
공부 열심히 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런데 고3이 되고 모든 게 달라졌다.
친구들 얘기도 얻어들을 수 없어졌고, 성적 스트레스에 얼굴이 어두워졌고, 심지어 전학을 오지 않았더라면
대학진학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거라는 소리까지 하는 거 보면 내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다.
어제는 뜬금없이 이랬다.
"엄마 때랑 지금이랑 고3이 언제가 더 공부를 많이 하는 거 같아?"
"글쎄... 요새가 훨씬 복잡하기는 해. 우리 땐 단순...."
내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 녀석의 짜증스런 대꾸가 날아온다.
"아니! 언제가 더 많이 하는 거 같냐고!"
살짝 말문이 막히면서 두 가지 생각이 난다.
하나는 공부를 많이 해야하는 게 화가 나는 구나, 또 하나는 지난 금요일에 본 교정지.
아이들에게 논리를 가르치는 거라서 이런 식의 오류에 대해서 따지는 귀여운 그림책이다.
앞의 생각때문에 마음이 짠 하고 뒤의 생각때문에 웃음이 나지만 나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위기를 모면한 거 같다.
"요새는 내신이랑 수능이랑 공부가 다르고 수시랑 정시도 준비가 다르잖아. 우리 땐 그냥 학교 성적 순으로 대학을 갔거든.
그리고 학원이나 과외 같은 거 하는 애들 많지 않았어. 그러니까 너네가 복잡해서 공부할 게 훨씬 많은 거 같다고."
화가 날수록 논리적이 되고 어른스러워 보이는 이 녀석은 요즈음 무기력하다.
대학에 갈 수 없을 거같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제 누나는 "대학엘 왜 못가냐! 어떤 대학에 가느냐가 문제지."라고 받아치지만
한숨처럼 중얼거리며 소파에 벌렁 누워 일어나지 않으려던 아들의 말이 머리속을 맴돈다.
이 세상에 우리나라 고3처럼 공부 많이 해야되는 나라가 있을까?.....도대체 공부를 왜 이렇게 많이 해야되는 거지?......이렇게 공부하고도 성대도 못간다고? 그럼 뭐 하러 공부하는 거야!
나는 요새 일류대학을 가는 게 중요하지 않은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엄마가 그러면 안된다고 한다. 이해해주는 것도 좋지만 용기를 주고 자극을 주고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밀어주고 이끌어주는 게 <엄마>가 할 일이라고 한다.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언제나 아이들 <마음>을 먼저 읽는 나는 그렇게 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얘기해줄 수 있을 것같은 자신이 있다. 그런데 그러면 안된단다. 나중에 애들이, 엄마가 그 때 나를 좀더 밀었어야지, 라고 책망한다나.... 하긴 우리 애들도 그런다. 큰 애도 고3 되더니 왜 공부 안하고 노는데 내버려뒀냐면서 엄마 탓을 하고 이 녀석도 외고 애들은 하나같이 중학교 때부터 공부를 한 거 같다면서 엄마가 나를 야단쳐서라도 공부를 시켰어야했다고 말한다. 바로 작년까지도 엄마가 나를 내버려둔 건 참 잘한 일이었다고 말하던 녀석이었다.
입시가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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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동그리 작성시간 10.04.28 어디선가 본 글인데요, 부모의 역할이 두 가지라네요.
가만히 지켜보는 것과, 도와달라고 할 때 도와주는 것.
아이의 기질이 가장 중요하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요.
지금 아드님은 공부좀 잘 하게 도와달라고 하네요... 어쩐대요... 잠 좀 줄이셔야 ^^;;
여하간, 자식 없어 뭘 모르는 1인은 고 3 수험생 어머니들에게 외칩니다.
화이팅이라고... -_- -
작성자바람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04.28 대략, 자식이 없어서 확실하시네요. 보고 듣는 것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고 이론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1인이 여기 있다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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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프루멘시아 작성시간 10.04.29 아, 정말 맘이 짠해지네요ㅠ 사실 저는 고3때는 별로 스트레스 없이 편히 생활하던 편이라 괜찮은데, 저보다 3살 어린 쌍둥이 친척동생들이 이번해에 재수를 한다는 이야기 듣고 이모가 맘 고생 심하신게 보여서 저도 맘이 불편했었습니다, 쌍둥이 동생들도 항상 밝은 아이들이었는데 그렇게 시무룩한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어요.. 한해한해가 갈수록 아이들이 더 수험에 고생하는것 같애요. 부모님들도 같이요 ㅠ 바람결 님 힘내세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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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바람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04.30 프루멘시아님, 감사해요. 그러게요, 애가 시무룩해지는 게 제일 안타깝네요. 차라리 짜증내는 게 나은 듯--;; 어쨌거나 자기 앞에 놓인 생이니 알아서 헤쳐가야할텐데 의욕을 잃게 만드는 분위기가 문제는 문제더라고요. 이 문제 속을 무사히 통과하고 살아남은 우리 모두를 위해서 건배라도 해야할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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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동그리 작성시간 10.05.01 이번에도 그 대사를 날려보심이..
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면,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줄게> 내지는 <너 먹고 싶은 거 다 해줄게> 혹은 <이모나 아줌마들이 다 사준다더라 야>
대학생이 되면 어차피 나이 든 ^^ 사람들하고 놀고 싶지 않을테니, 아줌마에 저도 끼워주셔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