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녹)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합 왕 내외는 말썽만 일으킵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작성자stellakang작성시간26.06.15조회수107 목록 댓글 4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제1독서
<너는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 열왕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1,17-29
18 “일어나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만나러 내려가거라.
그는 지금 나봇의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곳에 내려가 있다.
19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
20 아합 임금이 엘리야에게 말하였다. “이 내 원수! 또 나를 찾아왔소?”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또 찾아왔습니다.
임금님이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21 ‘나 이제 너에게 재앙을 내리겠다. 나는 네 후손들을 쓸어버리고,
아합에게 딸린 사내는 자유인이든 종이든 이스라엘에서 잘라 버리겠다.
22 나는 너의 집안을 느밧의 아들 예로보암의 집안처럼,
그리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안처럼 만들겠다.
너는 나의 분노를 돋우고 이스라엘을 죄짓게 하였다.’
23 주님께서는 이제벨을 두고도,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아합에게 딸린 사람으로서 성안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어 치우고,
들에서 죽은 자는 하늘의 새가 쪼아 먹을 것이다.’”
25 아합처럼 아내 이제벨의 충동질에 넘어가 자신을 팔면서까지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지른 자는 일찍이 없었다.
26 아합은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인들이 한 그대로
우상들을 따르며 참으로 역겨운 짓을 저질렀다.
27 아합은 이 말을 듣자,
제 옷을 찢고 맨몸에 자루옷을 걸치고 단식에 들어갔다.
그는 자루옷을 입은 채 자리에 누웠고, 풀이 죽은 채 돌아다녔다.
28 그때에 티스베 사람 엘리야에게 주님의 말씀이 내렸다.
29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
그러나 그의 아들 대에 가서 그 집안에 재앙을 내리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43-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46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47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의 강론말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아합 왕 내외는 말썽만 일으킵니다.”
아합도 그렇지만 이제벨은 더 못된 짓을 합니다.
하느님을 대항해서 그녀는 바알 예언자를 곁에 두지를 않나, 하느님의 예언자를 박해하고,
나봇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거짓 증인까지 세워
사람을 죽이지를 않나 하여튼 갈수록 못되게 굽니다.
하느님께서는 아합에게 예언자를 보내시어 징벌의 말씀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살인을 하고 땅마저 차지하려느냐?’
그에게 또 이렇게 전하여라.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1열왕 21,19)
이제벨을 향해서도 주님의 예언자는
‘개들이 이즈르엘 들판에서 이제벨을 뜯어 먹을 것이다.’(21,23)라고 지독한 징벌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합은 이런 주님의 징벌이 예언을 듣자 자루옷을 걸치고 회개의 뜻으로 단식에 들어갑니다.
마음 약하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아합을 보시고 부모의 마음을 가지시고 엘리야에게 말씀 하십니다.
“너는 아합이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것을 보았느냐? 그가 내 앞에서 자신을 낮추었으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29절)
얼핏 보면 주님께서는 줏대가 없으신 분 같으십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자식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을 지니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편적인 사랑이 가능할까요?
우리가 흔히 체험할 수 있는 것 중에 힘든 것 하나가 ‘편애(偏愛)’라 할 수 있지요.
사람의 감정이야 숨길 수 없기 때문에 드러날 때가 있지만
특히 지도자는 이러한 면에서 공 평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실 힘듭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오늘 주님의 복음이 길잡이가 됩니다.
여기에 교훈이 될 황희 정승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벗어나 한가로이 여행을 할 때 이야기라고 합니다.
모네기가 한창인데 농부가 누렁소와 검정소를 부리며 논을 갈고 있었습니다.
황희 정승이 한참 구경하다가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누렁 소와 검정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다 잘합니까?”
그러자 늙은 농부는 일손을 놓고 일부러 황희 정승이 있는 곳까지 와서는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누렁 소가 더 잘 합니다.”
황희 정승은 그 농부의 태도가 의아해서 되물었습니다.
“그만한 일을 가지고 일부러 논 밖으로 나와서 말합니까?”
그 늙은 농부는 그의 말에 “아무리 짐승이라지만 말은 함부로 하면 검정소가 좋아하겠어요?”
황희 정승은 이 노인의 말에 깊이 깨우친 바가 있어
평생 사람을 공개적으로 평하지 않는 가치를 삼았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어려운 것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공정하시고 또한 공의로우시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침의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 5,45-46)
마태오가 인용한 성경의 말씀 ‘네 이웃을 사랑하라.’(레위 19,18)는 있지만,
‘네 원수를 미워 해야 한다.’라는 사실 없습니다.
마태오가 말씀을 전할 때 첨부해서 전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마태오의 이런 표현이 어디에서 받았을까?
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꿈란 공동체의 사람들이 지켰던 규범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하라.’(1QS 1,9-10)라는
사랑과 미움이 엇갈린 비슷한 표현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가 말하는 원수는 유대인들에게 해당되기도 하겠지만
또 다르게는 스승을 박해를 했고
또 초대 그리스도교 믿음의 공동체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일컬을 수 있습니다.
원수라는 표현은 또 다르게 개개인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원수가 이방인을 수 있고 또 박해자일 수도 있겠고 개인적으로 힘들게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의
주님의 말씀을 새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의 국수주의, 타 민족에 대한 배타주의를 넘어서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45절)라는 보편적 구원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기 식구만을 챙기는 편 가르는 사랑이 아니라
비록 박해를 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시며 또 다르게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46-47절)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무한하신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지요.
많은 경우 자기 중심의 사랑인데 비해 주님께서는 상대가 중심인 사랑인 것입니다.
구약의 사랑이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무한한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
새 가슴처럼 좁고 변하기 쉬운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 거기다가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5,48)
하나의 예로, 길을 내는 공사를 생각해봅시다.
어느 구간은 부드러운 흙도 있겠지만 어느 구간은 돌맹이와 바위들이 많을 수 있습니다.
기계가 좋아서 어느 정도는 편편하게 할 수는 있지만
자동차가 달리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울퉁불퉁하고 튀어 나온 부분을 도로공사 기계가 깎고 부수고 메웁니다.
어느정도 기간을 두어 공사중인 길에 비와 눈이 내리게 합니다.
잘 다져진 도로 위에 다시 진동롤러가 계속 평탄작업을 합니다.
면 분쇄기가 지나가고 어느 정도 평탄하다싶으면 포장기가 뜨거운 아스팔트를 노면에 덮지요.
그때에는 약간의 울퉁불퉁하고 분쇄기로 깎았던 고루지 못한 노면도
아스팔트가 골고루 덮으며 아주 평탄하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과정의 공사를 마친 도로는 완전하고 안전하게 됩니다.
자동자가 부드럽게 달릴 수 있는 완벽하고 반듯한 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처럼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분쇄기로 깎여진 울퉁불퉁한 바닥이 뜨거운 아스팔트로 덮으면
거의 완벽한 노면이 되는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부족한 점을 매꿔 주시어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 도우심 없이는 아무도 의인이 될 수 없으며
완전한 사람으로 나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부족함을 채우시고 교만을 깎아내시고
겸손의 자리를 당신의 사랑으로 채워주셔서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출처: 구름 흘러가는 원문보기 글쓴이: 말씀사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