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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술사

6. 중세미술 - 신의지배 / 아이콘(Icon) 6-13세기

작성자요한 보스코|작성시간08.08.22|조회수997 목록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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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세미술 -신의지배 / 아이콘(Icon) 6-13세기

 

 

 

약 800년의 시기를 유럽은 중세시대라는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기간동안 유럽은 온전히 카톨릭문화권에 속하여 살아왔고 정치, 사회, 음악, 미술등 모든것은 카톨릭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교회와 부속된 벽화, 조각상, 스테인드 글라스등이 만들어졌지만 그것은 예술품으로서가 아니라

성서의 가르침을 즉 교리를 전파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당시 일부 귀족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문맹이었기 때문에 성경은 사실

일반인에게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또한 성경도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한장 한장 손으로 쓰느 필사본 이었기 때문에 왕이나

교황, 귀족등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소장하지 못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지음으로서 왕은 권위를 세우고 교회를 통해 정치력을 과시하고 교황은 교회를 세우고 지키는 왕들에게 황제의 자리를 공인해주며 오랜시간을 이끌어 갈수 있었습니다.

 

 

작가의 사인이 없는 장인의 예술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제조품입니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이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습니다.

 

추상과 상징의 중세미술,,그래서 더욱 현대미술과 일맥상통하는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미술의 형성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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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
또는 <데오도시우루스 황제 취임 20주년 기념 쟁반>
388년, 은, 지름 74cm 무게 15kg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미술의 양식은 더욱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제의 부자도 오늘은 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란하였으니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을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으며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녔습니다.

크리스트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었던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같은 크리스트교도 중세와 현대의 양상이 다르듯이 초기의 크리스트교도 달랐으며 313년에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의 박해시대와 이후의 양상 또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해시대(구원과 부활의 표현)

 

박해시대의 사람들은 신, 구약의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특히 <요나>와 <나자로의 부활>을 주제로 삼아 구원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3세기말에 제작된 <요나이야기 석관>에서 이야기는 아래 왼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 재앙을 알리라고 명하였으나 요나는 도망치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자기 거센 풍

랑이 있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요나를 물 속에 던져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가 살려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를 살려주며 니느웨로 가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따르자 하느님은 언덕에서

쉬고 있는 그의 자리를 아주까리 잎으로 시원하게 까지 해주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믿음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주제는 몇몇 일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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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공인이후 시대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의 표현)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의 종교로 자리바꿈하면서 예수의 모습도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또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어서 공인 이전과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쥬니우스 바수스(Junius Bassus) 석관은 여러 면에서 이 시대 미술을 대변합니다.

가운데 부분인 <우주의 지배자 예수>는 특히 흥미롭습니다

헬레니즘적인 우아함을 지닌 청년모습의 예수는 하늘나라를 뜻하는 첼루스(Coelus)의 의인화, 즉 우주를 발아래

두고 있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양쪽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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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359년
대리석, 118×213.8cm,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소

 

5세기경부터 황제의 후원아래 지어지기 시작한 대규모의 교회에 그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치거나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고 천상의 세계에 군림하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절대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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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익, 390년경, 로마, 산타푸르덴지아나

 

지상에서의 황제의 개념을 천상의 예수에게 대치시키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인 로마의 교외엔 큰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바오로 교회 후진부분은 <존엄한 예수>뿐만 아니라 승리의 아취가 덧붙여지고 그 한가운데 원형 속엔 예수의 흉상이

무섭게 그려져 있습니다. 위 양쪽에 네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그려진 것으로 모아 이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는 심판자, 승리자, 지배자의 역할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데 승리의 아취는 바로 로마황제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개선을 기념한 소위 개선문(Arco Trionfale)의 개념이 교회건축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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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로마
385년 시작하여 완공되었으나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된 후 보수되었음

 

아이콘(Icon) , 초기 성상

그럼 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성상, 아이콘(Icon)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형상이라는 뜻의 단어로, 비잔틴에서 예수와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종교성이 짙은

특별한 형태로 발달시키면서 '성상'이라는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성상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초상화의 역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기독교시대에 본 바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600년이 된 예수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700년경에 제작된 초기의 예수상은 한 손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구원자, 절대권한을 가진 존엄한 자의 모습입니다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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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성상
700년경, 86×45cm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성상파괴운동

성상은 성인의 시신이나 성골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상이 되면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절을 하는 과정에서 그림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폐해에 717년 레오3세는 성상파괴(iconoclasm, image-breaking)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ConstantineⅤ: 재임 741-75)기간 중 성상 파괴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실로 많은 조각과

모자익, 성상들이 소실되었습니다(도20,2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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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상을 없애는 성상파괴론자>
살테리오 클루도브 비잔틴 필사본 부분
9세기 후반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성상의 복구-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

 

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겪은 후 성상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해져야 했습니다.

 

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의 그림들은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엔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1-8)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의 설명은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서 낳고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임을 설명해 줍니다

 

1-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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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지배자 예수>, 1080-1100년경,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 교회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습니다(1-9).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는 것이 보이죠?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비잔틴 성상을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마돈나>를 봅시다.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 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보이죠?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이며,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입니다.

 

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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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마돈나>
12세기, 나무에 채색, 77.5×53.3cm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중세 초기의 유럽 미술

 

중세 초기의 유럽미술을 한마디로 정의하거나 대표적인 작가나 작품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눈에 확 띄는 작품들이 드물기 때문입니다. 작품들은 대부분 미사도구나 성경책의 삽화들이기 때문에 크기도 매우 작으며,

특정한 문화의 성격이 형성된 시대가 아니어서 독자적인 특성을 부각시키기도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특성입니다. 이 시대의 미술이 어떤 면에선 미흡하지만

 만약 이 시기가 없었다면 이후의 서양미술은 현재의 우리가 보는 것과 매우 다른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붕괴를 야기한 게르만 민족의 대 이동으로 인하여 유럽은 프랑스지역의 프랑크족,,,독일지역의 게르만족,,영국의

앵글로 색슨족,,이탈리아의 고트족등이 정착하며,,현재의 유럽지도의 기초를 만들어가며,,각민족의 지역별로 개성있는 문화를 만들어 갑니다.

 

1.프랑크 왕조(카롤링거 왕조)의 미술(현 프랑스 지역)

 

일찍부터 문명과 문화가 발달했던 로마중심의 남유럽과는 달리 북유럽지역은 당시 야만인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현재의 독일 서북쪽 아헨(Aachen)을 수도로 하고 있던 카롤링거왕조의 샤를르마뉴는 800년 12월 25일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왕관을 받았습니다.

전 유럽의 지도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고자 한 것이지요.

이 사건은 샤를르마뉴 개인의 욕망의 소산일 수 있지만, 북 유럽 지배자가 이탈리아에서 교황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는 매우 시사적인 사건입니다.(교권과 권력의 야합이라고도 볼수 있겠죠-힘있는자는 교권을 지켜주고,,교권을 잡은자는 권위를 부여해주며::교권과 속권의 야합?ㅋ

샤를르마뉴는 또한 고대문화를 적극 받아들임으로써 당시까지만 해도 야만족 취급을 받던 북방의 문화를 발달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자제들을 가르치고, 공식서류는 라틴어로 작성하게 하였습니다.


 1-11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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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복음사가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                               <아다 복음서 삽화>

754년    32*24.5cm                                                     800년경        36.6*24.5cm

 

 샤를르마뉴가 고대미술을 수용하기 전과 후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실로 큰 차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군도히노 복음서에 그려진 <네 복음사가에게 둘러싸인 그리스도>(1-11)를 보면 필선이 매우 거칠고,

 예수의 어깨나 무릎에서 보듯이 비례나 묘사력이 매우 조야합니다.
이에 비해서 샤를르마뉴 이후 800년경에 제작된 아다 복음서의 인물묘사(1-12)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세련되었습니다.

 

 

2. 게르만 왕조(오토왕조)의 미술(현 독일 지역)

 

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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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아담과 이브 세 형상은 손짓으로 성경이야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가 따먹지 말라고 일러 둔 나무 열매를 네가 따먹었구나."라고 꾸짖으시니" 아담은 핑계를 대었다.

'당신께서 저에게 짝지어주신 여자가 그 나무에서 열매를 따주기에 먹었을 따름입니다.' 그러자 "여자도 핑계를 대었다.

 '뱀에게 속아서 따먹었습니다.'라고 그림에서 손짓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아주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손짓만으로도 내용을 알 수 있으니까요.

놀랍습니다. 그러나 설명이외의 묘사는 매우 빈약하여 낙원은 고사리 같은 나무 두어 그루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를 선망하여 기둥에 나선구조를 적용하였으나  상승의 느낌이 나지 않으며 인물과 건물, 풍경의 묘사는

풍부함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로마네스크(Romanesque)양식

 

미술사에서는 11세기부터 12세기 중엽의 유럽 미술을 로마네스크(Romanesque)양식이라고 부릅니다.

'로마식'이라는 의미인데 19세기에 붙여진 이 이름은 아치 위주의 넓은 폭을 지닌 이 시대 건축을 위로 높이 솟은

고딕양식과 구분하기 위한 건축용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건축 뿐만 아니라 조각, 회화 등 미술 전반에 사용하고 있지요.

피레네 산맥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 남부와 스페인 북구, 이탈리아 북부, 영국 등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육중하고 거대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어서 유럽 전 지역이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는 첫번째 미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대부분 교회의 문에 조각된 이 주제는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러 나타나는 요한계시록의 장면입니다.

"하늘에는 한 옥좌가 있고 그 옥좌에는 어떤 한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그 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 같았으며

그 옥좌 둘레에는 비취와 같은 무지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옥좌 둘레에는 또 높은 좌석이 스물 네 개 있었으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관을 쓴 원로 스물 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옥좌에는 번개가 번쩍였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옥좌 앞에는 일곱 횃불이 훨훨 타고 있었습니다. 그 일곱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신입니다.

옥좌 앞은 유리 바다 같았고, 수정처럼 맑았습니다.

그리고 옥좌 한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박힌 생물이 네 마리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와 같았고 둘째 생물을 송아지와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의 얼굴과 같았고 넷째 생물은 독수리와 같았습니다.

이들은 각각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고, 그 몸에는 앞뒤에 눈이 가득 박혀있었습니다."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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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셍 피에르 남쪽문>, 1115-30년경, 무와삭 (부분 모습)

 

유럽 전역에서는 수도원이 대규모로 개축되고 앞다투어 더 좋은 조각을 놓으려고 교회의 공사가 많아졌습니다.

이는 아마 무서운 시기가 지나가고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도래하는 기운의 작용이라고도 생각됩니다.

신의 용서를 보장받는 것은 얼마나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신실한 사람이 되느냐에 달려있으므로

이를 환기시키는 주제들이 조각으로 주문된 것입니다.

자고있는 동방박사들을 깨워 아기예수를 경배하라고 이르는 천사의 모습을 조각한 아래의 작품을 보시죠,,(1-15)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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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스레베르투스 <잠든 동방박사와 천사>
1120-32년경, 어텅 대성당의 주두, 어텅, 라피다르 박물관

 

 

고딕 미술

조야한 미술을 생동감 넘치는 웅장함으로 발전시킨 로마네스크 미술도 새로움의 창출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신비한 종교심과 현실의 인간세계를 융화시킨 고딕 미술 이야말로 새로움의 시작입니다.

고딕(Gothic)이라는 단어는 '고트족의'라는 뜻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14세기 이전의 건축물을

'괴물 같고 야만적'이며 '고트족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폄하한데서 유래한 이름입니다.

즉 그리스, 로마적인 조화가 없다는 뜻으로 야만적이라 비하한 것이지요.

 

고딕 교회건축-하느님을 위한 종합예술

파리 북쪽에 위치한 생 드니(ST. Denis)의 쉬제 주교(Abbot Suger)는 교회를 개축하면서 규모만 키울 뿐 아니라

정면에 두 개의 높은 탑을 쌓고 빛인 하느님을 교회에 모시기 위하여 창문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함으로써 새로운

교회양식을 시작하였습니다. 아치들은 아직 로마네스크식의 둥근 형태이지만 수직선을 강조한 정면의 구성은

하늘 높이 솟아있습니다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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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엥 대성당>, 1220년 시작

13세기 전반기에 지어진 아미엥 대성당의 정면은 고딕 건축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수직과 수평이 함께 강조되었던 파리의 노트르담 보다 수평선은 약화되고 수직선은 강조되었습니다.

첨두 아치로 이루어진 정면의 세 문은 입구가 깊어서 입체감이 있으며 기둥 끝마다 세워진 뾰족한 핀나클과

작은 장식들은 이 거대한 건축물을 섬세하게 느끼도록 해 줍니다.

만약 정면 양쪽에 있었을 뾰족탑이 지금도 남아있었다면 하늘을 찌르듯 솟은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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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엥 대성당>

내부는 더욱 신비감을 줍니다(도6). 기둥아래부터 천장까지 이어진 수직선들의 숲은 내부에서도 위를 우러르게

하며 천장의 늑골 궁륭들이 이루는 조직적인 구조는 고딕 건축이 얼마나 과학적인지 알 수 있게 합니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건물외벽에서 보면 창문장식에 불과하지만 내부에서 이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느껴보면

마치 성령의 빛이 가득한 듯 합니다.

컴퓨터의 평면을 통해서는 건축공간과 빛의 효과를 실감할 수 없어서 안타깝지만 오묘한 빛이 가득한 내부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합창의 성가가 울려 퍼진다면 그것이 바로 천상의 세계일 것입니다.

고딕교회는 건축과 빛, 조각과 공예 그리고 음악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인 것입니다.

 

1-18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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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창, 아미엥 대성당 내부 스테인드 글라스              아미엥 대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우리나라의 고딕 건축
 

개항과 서양 열강들과의 통상조약으로 여러 항구와 서울에 서양 각 국의 상인들이 몰려들면서 서양식 건축이 함께

 

유입되었습니다. 약현성당(1892년)과 명동성당(1898년)은 그 당시를 대표했던 서양식 건물로 서양의 중세 고딕양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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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이시대 예술의 특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예술가는 아직 대접받지 못하는 단순 주문 제작에 익숙한 장인의 대접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2. 모든 예술은 카톨릭의 교리를 전파하고 교황과 왕의 권의를 과시하고 유지하는 수단에 머물렀습니다.

 

3. 로마 시대의 사실적, 인간중심적 묘사는 쇠퇴하고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추상화와 상징성이 주를 이룹니다.

   (이러한 추상화와 상징주의는 예술성의 후퇴라고도 하는 학자가 있으나 - 그래서 예술의 암흑기라는 말도

    나오지만 - 예술에서 우열의 순위를 가린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줄은 그사모님들도 잘 아실겁니다)

    오히려 근대이후 이러한 추상화나 상징성은 추상표현주의 또는 상징주의등으로 재발생 되기도 합니다.

 

4. 회화 보다는 건축과 조각부문에서 많은 작품이 제작되고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무려 800여년을 한장으로 마무리 짓는 다는것이 무리인지 알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해 보았습니다.

이해를 위하여 중세미술 작품만 따로 모아 "외국의 화가"편에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편은 르네상스 미술 입니다.

드디어 여려분이 잘 아시는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실수 있게 되었네요,,

I will ba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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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ciel | 작성시간 08.08.22 예술적으론 암흑기라고 부른다지만 신이 지배했던 시대는 평화의 시기라고 볼수있네요. 개성은 없지만 통일성은 있고 신에게 다가가기위한 인간의 노력이 건축, 조각,그림을 통해서나 너무 잘 나타나있는것 같아요. 웅장하면서도 세밀하게 표현한 부분이 예수님께서도 마음에 드셨을것 같아요. 저런 시기가 다시 올까요?
  • 답댓글 작성자요한 보스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8.23 저런시기가 다신 오기힘들겠죠,,하느님의 세상은 아마 중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신앙인의 눈으로 볼때는 평화의 시기이겠지만 사실 그시기는 이슬람과의 종교전쟁(예로 십자군 원정),,성직자들의 과도한 정치참여등으로 인한 종교재판등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아래에서 죽음을 당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조지오웰의 소설에서 나오는것처럼,,절대권력과 세상의 모든것을 하느님의 이름을 빌린 교황과 왕들이 독점하던 시기익디도 했죠,,미술뿐 아니라 음악,,인문학,,등도 종교의 제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제한적이었고 종교외의 다른 분야와 관련된 부분은 성장을 멈추었던시기엿습니다,,그래서 암흑기라했죠
  • 작성자오스틴 | 작성시간 08.08.27 요한 보스코씨 수고하셨습니다. 기독교 미술의 형성 ( 기독교 공인이후시대 )에서 옥의 티!!가 발견됐습니다. 제가 몇마디 적어도 될련지... 그림 1-3 설명중 콜루스(coelus)의 발음은 Latin어 coelus(첼루스) 로 발음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다음 내용도 기대합니다. ^&^
  • 답댓글 작성자오월의향기 | 작성시간 08.08.28 아오스딩 형제님이시죠? 수시로 들어오셔서 감사와 고문해 주세요~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요한 보스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8.08.28 네,,수정했습니다..자주오셔서 감수해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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