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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수제비

작성자운선|작성시간23.08.20|조회수465 목록 댓글 67

오랜만에 낮잠을 청하는 날

살짝 깊은 잠이 들었으려나

 

베란다 하수구 쪽에서 물소리 들려

일어나 보니 빗소리 거세다

 

아침까지 말짱하던 하늘이라

웬 비가

 

곧이어 하늘이 갈라지는 듯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

 

잠깐의 낮잠으로 맑아진 눈을 들어

비 내리는 밖을 응시한다.

 

늦여름 비 내리는 저녁이라

 

그땐 가끔

비 오는 저녁이면 마당 귀퉁이 밭에 자라는

정구지 뜯어 밀가루에 치대어 수제비 끓여서

양념간장 훌훌 끼얹어 먹곤 했지

 

빗줄기에 섞여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말이지

 

 

울 아부지

잔소리 발동걸리게 하는 수제비에 관한,

 

그 귀한 밀가루 조선 땅덩어리 반만큼 늘리고 늘려

손국수나 밀어 먹어야지 수제비가 당키나 하냐고

 

감자 호박 한 바가지 썰어 넣고

물 반, 국수 반 해서 배터지게 먹는게 낫지 암,

 

잔소리 말미쯤 가면

수제비는 별미 중에도 별미라

혹 귀한 손님 오실 때 외는 하는 거 아이라고

(하얀 밀가루가 귀한 시절이라 )

 

나는 아직 소녀티도 안 나는 열서너 살

홍두깨 방망이가 딱 내 키만 한데

그걸 작은 손 두 손으로 양쪽을 꽉 잡고

무릎을 꿇고 앉아

원수같이 흐르는 땀으로 목욕한 채

국수 반죽을 밀고 있을라치면

 

 

 

집 앞을 지나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아이고 자야 니는 우예 국수를 다 밀고 있노

”얼라같은기 국수 밀어 놓은 거 봐라,

 

“우예 이리 얇고 넓게 잘 밀어 놓고 ”야

니 겉은 아가 어디 있겠노

 

여름 저녁 국수 밀기 싫어 요리조리 피해 봐도

밥을 하면 치도곤을 맞으니까 이틀에 한 번은

마당 가마니 위에서 국수를 밀던 그 여름

 

이렇게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

마당에 가마니도 못 깔고 됫박 같은 방에서

흘리는 땀과 밀가루와 범벅이 되어서 힘들다고

시키지 않으니 좋았지

 

대신 집 앞 미나리꽝 부근에 나가

지멋대로 자란 정구지 베어다 반죽에 치대어

수제비 끓이는 건 너무도 편하고 쉽고 좋아서

 

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수제비 국물에

팔과 손이 데어도 멈추거나 놀라 뒷걸음

치는 일 없이 찰떡같은 반죽을 늘여 수제비를

뜨곤했지.

 

비 내리는 저녁에 먹는 수제비

향긋해서 맛있고 쫄깃거려 맛있고

 

조선간장 위에 동동 뜬 참기름

쫑쫑 썰어 넣은 파, 고추 건덕지,

 

한 술 건져 휘~ 섞으면 알콤 매콤

꼬솝하고 쫄깃한 수제비의 맛

시원한 여름 소나기의 맛

 

며칠째

질금거리며 내리는 비에 넌더리가 나는

늦여름 저녁 무렵이면

 

여름내 식구들의 등짝에 밴 땀으로 절은

댓 자리도 축축하고 선 듯하여 불결하여

싫고

 

저녁을 하러 정짓간 아궁이 앞에 서서

위를 쳐다보면

 

그을음에 잘 훈제된 정짓간 선반이나

시렁 위로

 

신발 몇십 켤레는 족히 신을 것 같은

지네와 노린내 나는 돈벌레가

 

느릿느릿 마른 곳을 찾아

기어 다니는 보기 싫은 광경도 아, 싫었다

 

비가 오래 머물면 축축하고 불결한 것이

와르르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지  늘,.. 언제나

 

 

그리고...

 

해는 지고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라던가

 

날 저무는 하늘에 별이 삼 형제~~

반짝반짝 정답게 지내이더니

 

웬일인지 별 하나 보이지 않고

남은 별만 둘이서 눈물 흘린다~~

 

이렇게 청승스레

노래 부르던 그런 날도 있었던 시절

 

 

저녁 무렵 쏟아지는 비를 보며

 

사라진,

잊혀진다 해도 좋을 뻔한

내 소녀 시절 풍경 한 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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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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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운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20 예 저희들도 정지라고 부르지요 가끔 정짓간이라는 억센 악센트를 쓰곤했지만요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음식이지만 그 담백한 맛의 서민들 음식이라 이렇게
    기억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반지름님 ~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운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21 밀가루 자체 식감이라곤 끈기 뿐이니 반죽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고 그리곤 육수와 양념 등속에서 맛이 어우러지죠

    요즘은 반죽 뭉쳐 하루쯤 냉장고 넣었다 하니 찰기가 좋더군요 어쩌다 먹어야 ㅎㅎ별미지 자주 먹으면 악식 소리나 듣는 밀가루 먹거리 얘기 깨비님 감사합니당~
  • 작성자검바우 | 작성시간 23.08.25 저는 어릴때 하도 먹어서 지금도 않먹어요 매운탕집에가면 수제비 넣지 말라고해요
  • 답댓글 작성자운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25 저도 국수는 먹어도 수제비는 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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