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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1977년 6월의 대박 사건!

작성자달항아리|작성시간24.06.03|조회수589 목록 댓글 91

저는 여중 여고 모두 뺑뺑이, 추첨으로 들어간 세대입니다.
제가 졸업한 여고는 서울 남가좌동에 위치한 명지여고.
(지금은 명지고와 합쳐져서 공학이 되었습니다.)
명지대학과 같은 법인이고, 정의당 심상정 전 의원이 저희 여고 2년 선배이십니다.
물론 심의원도 추첨 세대지요.
솔직히 제 모교는, 무시험 추첨으로 바뀌기 전에는 3류 학교였어요.
그런 학교에 배정이 되어서, 처음엔 막 울고 그랬는데
막상 들어가보니 좋은 학교더라고요.
추첨 식으로 바뀐 뒤엔 학교 측에서 심기 일전하여 열심히 가르쳐서
제가 다닐 당시엔 서대문구와 은평구 근동에서는 꽤 잘 나가는 학교가 되었더랍니다.
동복은 진회색인데 영 안 이뻤고, 하복은 짙은 청색인데 아주 이뻤습니다.
그 이쁜 하복을 입던 첫해, 1977년 6월 초순,
학교에서는 호국보훈의 달 맞이 전교생 백일장을 실시했는데,
세상에나! 제가 1학년 전체 운문부(시) 장원을 한 거예요! 대박 사건! ㅎㅎ
초여름의 청량한 어느 오전,
명지대학과 담장 없이 붙어 있어서 넓디 넓던 캠퍼스 구석 구석에 전교생이 흩어져 자리잡고
주어진 시제 셋 중 하나를 택해 차분히 글을 썼던 그날의 기억이
50여 년이 가깝게 흐른 먼 과거의 일인데도, 마치 어제 일인 듯 선명합니다.
그날 제가 택한 시제는 '현충일'
마침 이달이 현충일도 들어있는 호국 보훈의 달이라서, 그때 장원을 해서 6월의 학교 신문에 실렸던 제 시를 올려봅니다.
그 신문을 찍은 사진을 첨부하는데, 박스 안의 시가 제 작품입니다.
아래 사진 속 원문은 글씨가 깨알 같아서 읽기 힘드실 터이니, 원문은 여기다 따로 씁니다.

현충일

그날의 깃발은 핏빛이었다.

탁류에 휩싸인 처참한 대지 위로
푸른 생명들이 뛰어들었다.

진리를 향하던 눈동자에
분노의 퍼런 광채를 띠고
겨레의 땀이 어린 강토를 위해
오로지 뜨거운 열정만을 품고서
사나운 광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허리 잘린 배달민족의 비명 소리.

결코 남일 수 없는 피를 찾는 무리들.
그들의 잔인한 총검은
어머니, 아버지, 형제의 심장에
없어지지 않을 구멍을 뚫고

수천 년 삶의 터전 위엔
녹슨 발자욱이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 놓았다.

하늘 향해 피어나던
초록빛 생명들은
그토록 사랑하던 이 강토 위에
정열의 꽃피를 흩뿌리면서
소리 없이 스러져 가버렸다.

이제 펄럭이는 태극 깃발 아래
멀리 용사의 어머니는
유월 하늘로 향을 피운다.

아! 젊은 넋이여!
산하와 함께 영원하리
넋이여!
푸른 넋이여!

ㅎㅎ 지금 읽어보니, 시어들이 전혀 정제되어 있지 않고요,
1977년의 유신 체제에 걸맞게 얼어붙은 냉전 논리에 사로잡힌 소녀? ㅋㅋ
그러나, 내 나라 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그때나 지금이나 같겠지요.

호국보훈의 달이 열렸습니다. 
요 며칠 북쪽에서는 오물풍선을 날려보내서 또 시끄럽네요.
어서 어서 이 불안한 대결이 끝나고 평화가 이 땅에 찾아오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긴 글 읽어주신 우리 님들 감사드려요. ^^

시가 실린 신문입니다.
끝부분에 오자가 있어요.
멀리, 인데 머리, 로 인쇄소에서 잘못 썼어요. 그때 신문 받고 엄청 속상했었죠.

그 때 받은 상장이 아직도 있어요!
완전 고문서? ㅎㅎ

사진 오른쪽이 이 시를 썼던 여고 1년생 달항아리입니다. ^^
이쁜 하복 아니고 안 이쁜 동복 입었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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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자연이다2 | 작성시간 24.06.04 멋져요. 보람차고 ~~ㅎ행복하세요
  • 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6.04 자연이다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성실하게 하루를 잘 사셨지요?
    자연이다님의 건강한 일상을 응원합니다.
  • 작성자요석 | 작성시간 24.06.04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반듯한 글솜씨가
    반듯한 선생님으로
    진행되었었군요..

    저는 얼마나 망나니였는지
    글 한편 제출했더니

    누구의 글을 벳겼냐고 선생님이 조용히
    물으셨어요..ㅎㅎ

    알지도 못하는
    신지식 선생님의
    하얀길로 의심받았지요..ㅎ

    상처받았던
    그 시절이 이젠
    웃음이 나네요..ㅎ
  • 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6.04 에구, 그런 오해를 받으시다니요, 다혈질인 저였다면 미치고 폴짝 뛰었을 일이네요.
    신지식 선생님 기억납니다.
    그런 분의 글이라고 의심을 받으셨다니 요석 공주님 글재주도 뛰어나셨네요.
    망나니라니 당치 않으세요.
    요석님, 페이지님, 중앙여고 선후배 두 분, 안팎으로 곱고 훌륭하신 분들이세요.
    감사합니다. 평안한 저녁 되시어요. ^^
  • 작성자청솔. | 작성시간 24.06.27 77년이면 제가 제대후에 복학했던 해입니다
    마지막 4학년으로 복학하였습니다

    제가 군대생활하던 시절
    명지여중인가 명지여고와 자매부대였지요
    위문편지가 오고 위문품도 받았습니다
    답장을 보냈더니 또 편지가 왔지요
    몇 번 서신을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대표 여학생 들이 저희 부대를 방문하여
    장갑차에 태우고 운행했던 생각도 나네요

    전에 썼던 것처럼
    저는 포천 하심곡에 있던 맹호부대
    기갑여단의 101기보대에서 근무했습니다
    장갑차를 타고 싸우는 부대였습니다

    그 부대 정비과에서 차량계를 봤습니다
    행정병이었지요
    장갑차 수리부속품을 조달하는 임무

    시 내용이 아주 맹랑하네요
    여고생이 쓴 글 같지 않습니다
    글 재주가 있으셨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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