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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능소화 지는 계절에

작성자유현덕|작성시간24.09.24|조회수443 목록 댓글 51

 

 

오래전 내 푸른빛의 봄날 서식지는 종로였다. 대부분의 약속을 종로서적에서 했는데 뒷편 골목에 음악다방도 있고 기원도 있었기 때문이다.

광화문에 새로 생긴 교보문고가 훨씬 크고 세련된 서점이었지만 웬만해선 서식처를 잘 옮기지 않는 나는 여전히 종로서적을 애용했다.

 

주머니 가볍던 시절이라 열 권을 구경하면 겨우 한 권을 살 정도였다. 친구를 종로서적에서 만나면 다방이나 술집에 가기 전 기원에서 바둑 한 판을 때릴 때가 많았다.

둘 다 어깨 너머로 배운 얼치기 바둑이라 서로 지기도 했고 이기기도 했지만 실력은 제자리 걸음이었다.

 

어느 날 술집을 나와 건너편에 있는 탑골 공원에서 점을 친 적이 있다. 당시는 파고다 공원이라 불렀는데 담벼락을 빙 둘러서 사주관상을 보는 포장마차 점집이 많았다.

 

친구가 한참 연애를 하고 있을 때였는데 그는 안 풀리는 연애 고민을 점으로 해결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친구가 점을 보고 나서는 내게도 보란다. 나는 무슨 점이냐며 손사래를 쳤다가 사주를 말해줬는데 점 치는 양반이 대뜸 하는 말이 장가 두 번 갈 팔자란다.

 

친구와 나는 동시에 크게 웃었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한테 어떻게 이런 점괘가 나왔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나는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점쟁이가 용하다는 것을 50살 넘어서야 알았다. 아내는 쉰 둘에 병이 들어 투병을 하다 내 곁을 영원히 떠났다.

 

처갓집 반대를 뚫고 결혼을 했던 아내는 52년 삶이 일생이 되어 버렸다. 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지만 떠날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유언이랄 것도 없이 투병 중에도 자기 죽거든 다른 여자 만나 남은 생 살라고 했다.

 

어느 날 아내가 그랬다.

"나 죽거든 가능한 빨리 잊고 재혼해. 당신은 혼자 살 수 없는 사람이잖아."

 

훗날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어 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속극에서나 보던 일이 내게 벌어졌을 때는 막막했으나 못 견딜 것만 같던 시절도 살다 보니 다 지나갔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 올해가 아내의 10주기다. 작년 이맘 때쯤 북한산 중흥사에 들러 법당에서 수없이 절을 하며 아내의 명복을 빌었다.

나는 52년을 살다 간 아내가 누려야 할 행복을 가로챈 도둑놈이다.

 

불교 신자가 아니면서도 그날 왜 그렇게 참회의 절을 했는지 모른다.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행여 민폐가 될까 소리 나지 않게 애를 썼다.

나만 이렇게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이래서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말이 있나 보다.

 

아내는 모든 꽃을 좋아했지만 유독 능소화를 사랑했다. 꽃 이름을 잘 모르는 내게 처음 능소화를 알려준 것도 아내다.

능소화를 볼 때면 이 꽃이 뭐였더라? 묻곤 했다.

 

"응, 능소화야."

"맞다, 능소화. 나는 장미꽃도 알고 국화도, 봉숭아도 아는데 이 꽃 이름을 왜 자꾸 잊어 먹나 몰라."

 

엊그제 우리집 주변을 걷다가 지는 능소화를 보자 아내 생각이 났다. 지난 6월부터 이 꽃은 피고 지기를 반복하건만 떠난 아내는 돌아올 수 없다.

생각이 날 듯 말 듯 꽃 이름이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잠시 멈춰 꽃을 바라보고 있다가 중년 여성이 지나가기에 물었다.

"이 꽃 이름이 뭐죠?"

"능소화요."

 

맞다. 능소화,, 나는 언제나 능소화 앞에서는 죄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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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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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5 살다 보니 어느덧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잊고 살다가도 능소화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입니다.
    뭐든 꼭 겪어 봐야 아는 것은 아닐 테지만 거역할 수 없는 운명도 있음을 받아들이는 인생 공부도 되었답니다.

    그 수업료는 제가 열심히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곡즉전님의 따뜻한 고견 가슴에 담습니다.
    건강하세요.
  • 작성자삼족오 | 작성시간 24.09.25 그렇군요.
    그 애틋한 연연(戀戀)함 이란...

    저역시 비슷한 어려운 경험을 최근 해 본지라...
    안사람을 잃을까 참으로 겁이 나서리...
    참, 힘들었지만 다행히 회복을 한 경험이 있는데
    유현덕님 마음이야 오죽 애잔하랴 싶습니다.

    그저, 힘내시라고 응원(應援)하는 의미에서
    힘차게 1번째 추천(推薦)드립니다., ^&^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5 멀리 계시는 삼족오님까지 다녀가셨군요. 삼족오님 그 마음 이해합니다. 저는 지금도 누가 아프다고 하면 가슴부터 철렁한답니다.
    삼족오님도 아내 분으로 인해 마음 고생을 하셨다는데 그래도 회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인생은 고비의 연속이란 말이 있더군요.

    제가 지금 생각한 고비인데 쓴고비, 단고비, 꼬부랑고비, 절벽고비,, 이런 고비 다 겪고 나면 꽃길처럼 꽃고비가 찾아온다고 봅니다.
    인생을 고해라고도 하던데 고비 헤쳐나가는 맛에 사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저도 삼족오님께 힘내시라고 응원 보냅니다.ㅎ
  • 작성자가리나무 | 작성시간 24.09.25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살면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지만
    지금 이것이 고비인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고
    4년이 지났습니다

    먼저 가신 아내도
    지금 잘 살고 계신 유현덕님을 좋아하실 겁니다
    나중에 능소화를 보시거든 활짝 웃으세요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9.25 가리나무님한테도 아픈 기억이 있나 봅니다. 저 또한 그때 겪은 일을 생각하면 비몽사몽이란 말이 맞습니다.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며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떠남을 막지 못했습니다. 속절없다는 단어가 이럴 때 쓸려고 생긴 말이었구나 싶었네요.

    만나면 언젠가는 헤어지기 마련인 것이 인간사이긴 해도 80인생, 90인생이라는데 너무 일찍 떠난 아내를 생각하면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저는 철이 없어선지 웃음이 많은 편이고 잘 웃습니다. 가리나무님도 화이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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