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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구정(舊正)이 아니라 ‘설’이다

작성자부천이선생|작성시간25.01.25|조회수241 목록 댓글 16

(설을 맞아 오래 전 강의한 내용을 여기 소개한다)

 

 

<길 위의 인문학 19>

구정(舊正)이 아니라 ‘설’이다

 

두 개의 ‘설’

 

우리나라에는 설이 두 개이다. 양력으로 1월 1일과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현재 역법으로 양력을 쓰고 있으나 아직까지 음력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공식적인 문서에는 모두 양력만을 표기하지만, 우리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달력에는 음력이 병기되어 있다. 그만큼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과 수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음력은 아직까지도 절대적이다.

그러니 ‘설’은 2016년 2월 8일 월요일, 음력으로 2016년이 시작되는 날, 십간십이지(干支)로 병신(丙申)년 정월 초하루이다. 따라서 양력 2016년 1월 1일을 새로운 설 - 신정(新正)이라 하는 것도 맞는 말이지만 음력 정월 초하루가 바로 진정한 의미의 ‘설’이다.

그렇다면 음력과 양력은 어떻게 다를까.

 

음력과 양력

 

역(曆)을 엮는 기본 단위로는 주야인 1태양일(太陽日), 달의 위상(位相) 변화인 1삭망월(朔望月), 계절의 변화인 1회귀년(回歸年)이 있다. 이 중에서 1일과 1삭망월을 취하는 역을 태음력 또는 순태음력(純太陰曆)이라 하고, 삭망월과 회귀년을 다 취하여 적당히 조정해서 엮는 역을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라 한다. 우리나라는 1895년까지 줄곧 이 태음력을 사용해 왔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음력이다.

인류가 사용한 가장 오래된 역법인 순태음력은 계절 변화와는 관계없이 달의 위상 변화에만 의존해서 엮은 역법이다. 달의 삭망주기(朔望週期)는 29.53059일이고, 12평균 삭망월은 354.367058일이다. 큰달을 30일, 작은달을 29일로 하고, 이것들을 각각 6회 반복해서 12개월을 1년으로 하면 모두 354일이 된다. 그런데 365일을 기준으로 하는 태양력과는 11일의 차이가 난다.

그래서 태음력상 역일(曆日)과 계절이 서로 어긋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윤달을 끼워 넣는다.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太陰曆)으로는 태양력과 날짜를 맞추기도 어렵거니와 계절의 추이를 정확하게 알 수도 없다. 따라서 윤달은 이러한 날짜와 계절의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만든 치윤법(置閏法)에서 나온 개념이다. 통상 19태양년에 7번의 윤달을 두는 19년 7윤법이 가장 많이 쓰이는데, 이 계산법에 의하면 19태양년은 태음력 235개월이 된다. 태양력 만 3년이 채 못되어 윤달이 한 번씩 돌아오는 형태다.

이 태음력은 고대에 많은 지역에서 종교적 용도로 널리 사용되었으나 계절 변화에 따른 연간 기온과 일조량의 변화, 그리고 식물의 성장과 동물의 이동, 짝짓기 등은 고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농업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를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계절의 변화를 넣은 것이 바로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24절기가 표기된 음력이다. 이는 농업은 물론 바닷물의 변화가 중요한 수산업에 매우 긴요한 정보가 된다.

 

이와는 달리, 지구가 해의 둘레를 1회전 하는 동안을 1년으로 하는 역법을 태양력(太陽曆, solar calendar)이라 하는데 이를 줄여 양력이라 부른다. 즉 달과는 관계없이 태양 운행에만 의존하는 역법(曆法)이다. 1태양년(太陽年:回歸年)의 길이는 365.2422일이므로 1년을 365일 또는 366일로 한다. 그리고 365일의 해를 평년, 366일의 해를 윤년(4년에 한 번은 2월이 29일까지 있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1896년 1월 1일 고종의 명에 의하여 태양력을 쓰기 시작했다. 현행의 태양력은 로마력에 기원을 둔 것으로, 고대 로마에서는 1년의 길이가 알려지지 않았으므로 기원전 750년경, 롬루즈왕시대에는 1년을 304일로 하고 이를 Martius(March), Aprilis(April), Maius(May), Junius(June), Quintilis(July), Sextilis(August), September(September), October(October), November(November), December(December) 10개월로 구분하여 썼고 세수(歲首)는 춘분경으로 하였다. 그 10개월을 기원전 710년경 누마왕 시대에 1년을 355일로 하고 Janualis(January), Februalis(February)란 이름의 2개월을 추가로 덧붙인 것이다.

 

1896년 1월 1일

 

설이란 잘 알고 있듯이 추석과 함께 한민족이 쇠고 있는 커다란 고유 명절의 하나이다. 물론 음력이다. 양력을 쓰게 된 이후에도 설과 추석은 음력으로 환산하여 쇠고 있다. 설과 추석뿐만이 아니라 한민족의 전통적인 시간관념은 음력에 근거한다. 그런데 음력에 기반한 우리의 전통적 시간체계는 1896년 1월 1일을 기하여 공식적으로는 양력을 따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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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1월 1일, 조선의 사람들은 얼떨떨한 새 아침을 맞았다. 어제는 동짓달 열엿새, 즉 음력 11월 16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늘 그랬듯이 열이레인 11월 17일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1월 1일이라고 했다.

양력이라 했다. 국제 기준에 맞추어 양력 사용이 불가피하게 되었단다. 미국을 시작으로 서방 6개국과 수교가 완료된 지 10여 년, 이제 낯선 시간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갑오와 을미년의 정신없는 난리를 거치고 예측불허의 병신년을 앞둔 이 땅의 사람들은 졸지에 서양 시간에 편입됨으로써 또 하나의 혼돈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부터 정확하게 120년 전의 일이었다.

일본도 그리된 지 20년이 넘는다 하고 중국도 언제 어찌될지 모른단다. 이래저래 조선은 중국에서 멀어져 일본과 서양으로 다가가는 시절이었다. 중국에서 도입하여 기나긴 세월 써온 음력의 역법(曆法)은 청일전쟁의 포화가 멎고 국모가 시해된 을미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식 폐기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양력설 - 신정이 한민족의 일상생활에 좀 더 체계적으로 도입된 것은 일제에 의해서였다. 일제는 그들의 시간체계에 맞는 양력설을 새롭고 진취적이라는 의미에서 ‘신정(新正)’으로 부르고, 피식민지인인 조선인들이 쇠는 음력설은 오래되어 폐지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구정(舊正)’으로 불렀다. 즉, 새로운 설(신정)이 아닌 ‘오래된 설(구정)’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를 따르는 사람들은 친일파이거나 일부 공무원 - 공식관료들뿐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설을 쇠는 풍습은 일제의 강압과 모진 탄압에도 해방이 되기까지 계속되었다.

일제가 우리 고유의 설을 지칭한 '구정'이라는 명칭은 일제의 양력설 정책을 답습한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서도 사용되었고, 그 사용이 장려되기까지 했다. 설은 공식 공휴일이 아니었음에도, 해방 후 공무원이나 일부 국민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새해를 맞고 차례를 모시는 날이었다.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을 되찾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인 1985년에 이르서서야 가능했다. 다만 ‘민속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음력설’을 하루만 공휴일로 지정하였다. 마치 커다란 선심을 쓰는 듯한 오만이었다.

결국 1987년 6월 항쟁이후 새롭게 들어선 정부에서 1989년에야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음력설’ 혹은 ‘민속의 날’이라 불리던 것을 ‘설날’로 개칭하고 전후 하루씩을 포함하여 총 3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게 된다. 이로써 설은 구정이라는 낙후된 이미지를 벗을 수 있었고 구정이라는 단어는 이제 일상적으로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설’에 담긴 민족 고유의 정서

 

아직 ‘구정’이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알게 모르게 오랜 동안 썼던 말이 입에 익숙한 것일 뿐이다. 문제는 ‘구정’이란 말 속에는 ‘새롭게 써야 할 것(신정)을 구테어 옛것(구정)을 그대로 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 구정이란 말을 쓰게 되면 시나브로 그런 의미를 가슴속에 담게 된다.

설은 ‘구정’, ‘민속의 날’, ‘음력설’이 아니다. ‘설날’이라고 '날'을 붙일 필요도 없다. 추석을 추석날이라 하지 않듯이 설은 그 안에 ‘날’의 의미까지 담고 있기에, 설은 그냥 설이다.

또한 설을 지내는 것이 아니라 ‘쇠’는 것이다. ‘쇠다’는 ‘(명절, 생일, 기념일 같은 날을) 맞이하여 지내다’는 뜻의 동사이다. 명절을 쇠다, 추석을 쇠다, 설을 쇠다……와 같이 쓰인다.

2016년 1월 1일은 우리가 양력을 쓰게 된 지 120년이 되는 날이요, 2016년의 설은 2월 8일 즉 병신년 첫날이다.

 

※ 여러 책과 글을 인용하였으나 글의 목적상 일일이 표기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 원문보기 → https://blog.naver.com/lby56/220617930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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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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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부천이선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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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굴뚝청소부 | 작성시간 25.01.26 공감합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네요.
  • 답댓글 작성자부천이선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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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제된 댓글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부천이선생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01.30 저런~~~!
    ㅎㅎ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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