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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명란젓 한 통과 왕대추 열 알

작성자달항아리|작성시간25.10.02|조회수484 목록 댓글 60

내일부터 기나긴 추석 연휴가 시작이 된다.

사실 긴 연휴라고 해도, 우리 가족에겐 다섯 명 중 한 명에게만 그 의미가 있다.

엄마와 아빠는 백수라서 날마다 휴일이고, 미국에 있는 둘째 딸에겐 추석 연휴가 해당이 없다.

공무원 시험에 붙어서 발령 대기 중인 막내 딸도 현재는 날이면 날마다가 휴일이고 공일이다.

오직, 지난 3월 신학기부터 초등학교 사서교사로 근무를 시작한 맏딸에게만 의미있는 연휴이다.

 

오늘 우리 장녀께서는 긴 연휴를 앞두고 지친 몸과 행복한 마음으로 양손 무겁게 귀가를 하였다.

한 손에는 교장선생님께서 전 직원에게 선물하신 한과가 한 보따리,

다른 한 손에는 학교 청소 용역 여사님께서 선물하신 커다란 명란젓 한 통과 왕 대추 열 알.

교장선생님의 선물도 감사했으나, 청소 용역 여사님의 선물은 정말 감동이었다.

사연인즉슨 이렇다.

 

우리 딸이 아침마다 일과 시작 전에 도서관에서 차를 끓여 마실 때 이 여사님께도 한 잔 씩을 드리며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이 한 줄이 팩트인데, 그 이면에는

작년까지는 우리 애 전임자가 이 여사님께 매우 박절했다, 그래서 서러움도 좀 느끼셨다,

그런데 올해 새로 온 사서교사는 이 여사님께 매우 친절하다, 그래서 더욱 고맙다.

 

뭐, 이런 사연이다.

 

그래서 그동안 우리 애는 여사님으로부터 칭찬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학교 구성원들에게 여사님이 소문을 내셔서 우리 애가 민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사님의 호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수시로 이것 저것 간식을 선물하셔서 애가 집에까지 가지고 오더니.

명절을 앞두고는 명란젓 한 통에다가 직접 따셨다는 왕 대추 열 알도 주신 것이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꽉꽉 눌러 담아서 뚜껑이 열리려 하는 맛난 명란젓.

당장 내일 점심 식탁에부터 올릴 것이고 최후의 한 개까지 알뜰하게 잘 먹을 것이다.

여사님 감사합니다. 내 딸아 고맙다.

나는 여사님께 무엇으로 보답을 할까, 연휴 끝나고 출근할 딸에게 들려보낼 선물도 지금 궁리 중이다.

 

내 맏딸, 86년 생.

시집을 가려면 벌써 가서 학부모가 되고도 남았을 나이에, 여태도 내가 해 준 밥을 먹으며 부모의 집에서 살고 있다.

문헌정보학과(도서관학과)를 나왔고 사서교사 자격증도 있다.

하지만 도서관 근무가 자기는 싫다며 출판사에서 근무한지 10년 여, 

박봉에다가 원거리 통근에다가 격무에 시달리다 퇴직 후엔 프리랜서 생활 시작.

어마무시한 컴퓨터 들여놓고 낮엔 주무시고 밤에는 깨어 북 디자이너로 일을 한지 오래인데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버는지, 아니 벌기는 하는 건지, 

정말 답답하고 속 터지는 세월을 보내다가, 금년 봄엔 드디어 마음을 잡고 사서교사로 취업을 했다.

기간제 교사이지만, 학교 사서교사는 원래 정교사는 드물고 기간제 교사가 대부분인데다가

매년 또박 또박 호봉이 승급되고, 큰 잘못이 없는 한 매년 재계약도 잘 되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할 수 있다.

나랑 친한 사서 선생님 한 사람도 50대 초반인데 30대 때부터 기간제 사서교사로 여태 안정적으로 근무를 잘하고 있다.

이 아이가 규칙적인 직장 생활을 시작하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게다가 아주 열심히 근무한다는 소식이 이 경로 저 경로로 들려오니,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더구나 아이가 학교에 나가기 시작한 뒤로 얼굴에 화색이 돌고 말수가 늘고 잘 웃으니,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나는 딸에게 큰 거 안 바란다.

결혼? 해주면 좋겠지만 안 하겠다는데 등밀어 보낼 순 없다.

아이가 30 중반일 때까지는 수시로 속이 상했지만 40이 내년인 지금은 마음 비웠다.

시집 안 가면 어때, 그저 너만 행복하면 된다.

내가 밥 열심히 해줄게, 너는 근무만 잘해라.

네가 웃는 하루 하루가 이어진다면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

 

딸 셋 중 내겐 이 아이가 아픈 손가락이다.

내가 뭘 너무 모를 때 준비 없이 엄마가 되었었고,

맏이로 태어난 이 딸은 엄마의 자질이 심히 부족한 내게서 사랑을 정말 받지 못하고 자랐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매사에 탁월했던 바로 밑 동생에게 수시로 열등감을 느끼며 컸다.

키조차 두 동생보다 한결 작아서 그 또한 안쓰럽기 짝이 없다.

나는 다시 젊어져서 이 삶을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지만

혹시나 다시 내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이 맏딸에게 넘치도록 사랑을 주면서 키워 내 잘못을 만회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도서관 관리도 아주 잘하고, 각종 독서 행사 기획과 진행도 열심히 하고

학교 선생님들이나 행정실 직원들, 청소 용역 여사님과도 아주 잘 지내고,

내 딸아, 너의 성실함과 분투가 나는 너무 고맙고 자랑스럽구나.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다르다.

네 삶의 꽃은 이제 개화를 시작했구나.

이른 시기, 늦은 시기라는 구분은 의미가 없다. 딱 너의 시기, 그 시기가 온 것이 중요하다.

너의 충실한 하루 하루가 쌓여 네 삶의 그림이 점차 더 고운 색깔로 물들어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너를 위해 기도한다.

어린 시절의 너에게 나는 별로 좋은 엄마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그 잘못을 결코 만회할 수 없지만,

후회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너를 위한 기도를 하고 또 하는 것으로 너를 도울 것이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날마다 간절히 너를 위해....

사랑하는 내 맏딸,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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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0.03 인애6 인애님 이 사진도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
  • 작성자가리나무 | 작성시간 25.10.03 시집 안 가면 어때요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건강하게 곁에 있어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대추 열 알
    기본 서른 알 정도는 ㅎㅎ
    엄마 닮아서 심성이 착하고 똑똑해서 주위에 사랑을 듬뿍 받지 않나 싶습니다
    명란젓은 조금씩 드셔요잉
    맛있다고 마구마구 드시면
    염분 과다 섭취가 될 수 있으니요
  • 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0.03 맞아요, 맞아요.
    내 새끼 건강하게 밥 잘 먹고 직장 생활 잘하니 그보다 더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 ^^
    명란젓 짜니까 조금 씩만 먹으라시는 분부를 잘 기억하겠습니다.
    건강 상식 풍부하시고 늘 제게 좋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는 가리나무님,
    많이 많이 감사해요, 그리고 늘 보고 싶어요.
    우리 가리나무님 만날 날이 언제 오려나요.
    언젠가는 꼭! 그때까지 건강하십시다요. ^^
  • 작성자운선 | 작성시간 25.10.04 너가 내 글을 읽고 눈물이 났다는 댓글을 봤는데 오늘 이 글을 읽으니
    나 또한 눈물이 ㅠㅠ 나도 그래 맏이 아들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지금도 그 애는 상처 받은 짐승의 슬픈 눈을 하고 있을 때가 있지

    친 엄마의 매질 계모와 아비의 학대 생각도 하기 싫어
    그 죄로 내 평생 그 애의 일거지 일투에 매달렸으니
    나도 상처 받고 저도 상처의 휴유증을 어미에게 대드는 데 다 풀고
    다 풀었겠냐만 그래도 오십이 되니 순한 양처럼 되네
    나의 기도는 오직 참회의 기도 뿐이야 나는 어디를 가도 겸손해야 하며
    교만하지 못하며 죄인임을 상기시켜 나를 낮추며 살 결심을 한단다

    이 아침 내 감정에 격해지면서 눈물이 나네
    정은이 딸도 이제 딛고 일어 섰다고 여겨지네
    내 아들처럼 말야 그들 마음 속엔 지워지지 않겠지만
    교육과 사회의 일원이 되면 상처는 이해와 용서 자신이
    만든 긍정으로 치유 되지 않을 까 싶은 내 합리화 일테지만
    어쨌든 그러길 바란다 기도 밖에 보태 줄 게 없어서
    정은이 세 딸 모두 화이팅! 올 한가위는 더 없이 화목한 명절 되시게나 ~~
  • 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5.10.04 댓글로 또 저를 울리시네요.. ㅠㅠ
    이 맏딸로 인한 제 아픔과 자책을 깊이 공감해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운선 언니가 계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점심 밥상에 명란젓 양념 닦아내고 먹기 좋게 잘라서 참기름과 통깨 뿌려서 온 가족이 아주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 애 어릴 적 제가 저지른 그 잘못들을, 언젠가 정식으로 사과하고 엄마를 용서해달라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다 잊었다고, 기억도 안 나니까 그러지 말라고.. ㅠㅠ
    어찌 잊었을까요. 잊었다고 하는 것일 뿐.
    내 새끼, 내 안쓰러운 새끼..
    언니의 이 댓글이 크나큰 위로가 됩니다.
    늘 제 마음을 쓰다듬어주셔서 너무도 감사해요!
    고마우신 우리 운선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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