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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오늘, 수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작성자탁구시인|작성시간26.01.07|조회수152 목록 댓글 14

 오늘, 수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아침 거울 앞에서 수염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머리는 말이 없는데, 수염은 늘 부지런하다.  
아침에 깎아도 저녁이면 다시 고개를 내민다.  
마치 “나는 아직 경기 중이다”라고 말하듯이.

처음엔 농담처럼 생각했다.  
머리가 수염으로 이사 간 건 아닐까.  
위에서 살던 애들이 아래로 내려와  
턱 밑에 탁구장 하나 차린 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이삿짐이 아니라 분업이었다.

젊을 땐 머리가 나를 대신해 앞에 섰다.  
머리 모양 하나로 첫인상을 만들고,  
가르마 하나로 나이와 기분을 가렸다.  
그 시절엔 머리가 에이스였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머리는 슬그머니 물러나기 시작했다.  
항의도 없고, 작전 타임도 없다.  
몸은 이미 결론을 내린 듯했다.

“머리 장식은 이제 됐고,  
생존 신호(체모)는 유지하자.”

그 자리를 수염이 채웠다.  
수염은 꾸밈이 아니다.  
드라이도 필요 없고, 스프레이도 없다.  
그냥 자란다. 공처럼 튀지 않고,  
묵묵히 네트를 넘긴다.

탁구를 치다 보면 이런 공이 있다.  
화려하진 않은데  
자꾸 넘어오고,  
자꾸 살아남는 공.  
요란한 스매시는 사라지고  
이상하게 이런 공이 마지막에 남는다.

수염이 딱 그렇다.  
누가 보든 말든,  
오늘 하루를 살았다는 표시처럼  
턱 아래에서 조용히 자란다.

요즘은 수염 깎는 것도 엄청 귀찮다.  
수염은 하루도 안 거르고 출근한다.  
그래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건 살아 있다는 증표니까.  
몸이 나에게 붙여준  
가장 성실한 근무 기록 같다.  
인생이든 경기든  
굳이 전부 이길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 수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듣고,  
수염을 정리한 뒤  
거울을 한 번 더 들여다본다.

수염 덕분에 

오늘도 얼굴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 탁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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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7 읽으면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습니다.
    탈모도, 수염도
    결국은 몸이 각자 맡은 일을 하는 거겠지요.
    염색을 멈추고 펌을 줄였더니
    숱이 늘었다는 말씀에서
    조급함을 내려놓을 때
    몸이 먼저 답해 준다는 걸 다시 배웁니다.
    기쁜 소식까지 나눠주셔서 고맙습니다.^^
  • 작성자운선 | 작성시간 26.01.07 여자가 수염이 안나는 이유는? 남정네들 말하길 속아지가 좁아서랍니다
    그럴까요? 융통성이 없고 속창시도 없고 비구발발 호둘갑 떨어대다
    일생을 마치는 여자의 속창시 그래서 수염도 못자라는 여자 앉아서
    오줌누는 여자 ㅠㅠ 저는 시인님이 부럽습니다 제게 없는 수염과의
    진지한 대화가 말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7 수염이 없어서 못 나누는 대화도 있고,
    수염이 있어서 괜히 늘어나는 생각도 있더군요.^^

    속이 넓다, 좁다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마다 몸이 맡은 역할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웃음 섞인 말씀으로 읽어주시니
    수염 이야기도 덕분에 사람 이야기가 됩니다.
  • 작성자만장봉 | 작성시간 26.01.08 탁구시인님은 오늘은 수염을 가지고 기기묘묘하게
    적용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훌륭한 글을 선사합니다
    거기에는 상상력과 가치있는 내용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08 좋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염 하나 붙잡고 시작했는데
    말씀처럼 결국은 사람 이야기로 흘러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받아주셔서 글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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