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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코 큰 여자와 까무잡잡한 여자

작성자유현덕|작성시간26.03.30|조회수596 목록 댓글 30

 

역사에는 미시사(微視史)란 분야가 있다.

사전적 풀이는 거시적인 역사적 구조보다는 인간 개인이나 소집단의 삶을 탐색하는 역사 연구의 방법론, 또는 그렇게 탐색되어 기술된 역사를 말한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게 들려서 무척 어렵게 느껴질 테니 내 방식으로 풀이를 한다.

미시사란 이순신, 세종대왕, 안중근 같은 큰 사람들이 남긴 발자취가 아니라 나같은 잔챙이들이 살았던 기록을 말한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장삼이사(張三李四)라 하고 이런 사람들의 흔적이 바로 미시사다.

 

장삼이사는 장씨의 셋째 아들과 이씨의 넷째 아들이란 뜻으로 실제 중국에는 우리의 김이박처럼 장씨와 이씨가 가장 많다고 한다.

장삼이사와 비슷한 뜻으로 초동급부(樵童汲婦)란 말도 있는데 나무하는 아이와 물 긷는 여인네를 말한다.

 

초동급부는 요즘은 거의 안 쓰는 말이지만 내 어릴 적에 나는 틈틈히 땔나무를 하러 산엘 갔었고 엄니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동네 우물에서 물을 길러 오셨다.

머리에 인 물동이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손으로 닦으며 마당으로 들어서던 엄니의 모습이 밥 짓는 냄새와 함께 아직도 선명하다.

 

결국 미시사는 무명으로 살다 간 내 어머니처럼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한 시대를 호령했던 영웅호걸들의 삶만이 역사인 것은 아니다.

오늘은 내 친구의 미시사를 말하려고 한다.

고향에서 국민학교 6년을 같이 다녔지만 한 반인 적이 두어 번 있었나? 더구나 학교는 같아도 옆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딱히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내 엄니와 친구 엄마의 친정이 같은 마을이여서 외갓집이 한동네라는 공통점은 있었다.

엄니들끼리야 오일장에서 종종 봤겠으나 나는 친구집을 방문한 적도 몇 번 없었다. 게다가 내가 국민학교 졸업 후에 바로 고향을 떠났기에 오랜 기간 소식이 끊겼다.

 

서른을 막 넘긴 후였을까. 한 친구 결혼식장에서 이 친구를 만났다. 거의 20년 가까이 지난 후였다. 그는 신랑과 큰집, 작은집으로 사촌지간이었다.

그때 친구 엄마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반갑게 나를 붙들더니 당신 아들 얘기를 했다.

 

"우리 영철이 장개 좀 가게 여자 있으면 소개 좀 해라."

내 친구 영철이는 가명임을 밝히면서 이제부터 영철이라 하겠다. 영철이는 장남인데 여동생만 넷이기에 유일한 아들이다.

그러니 엄마는 아들 결혼을 조금 서둘렀을 것이다. 나는 친구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모, 저도 아직 결혼 전이라요. 영철이도 언젠가는 인연이 되는 짝이 생길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때서야 친구가 중학교 때 부모님을 따라 보령으로 이사갔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 정착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때부터 조금씩 친해졌다. 서른 살 이후에 영철이의 결혼 수난사가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 미시사는 이 친구와의 우정이 아니라 영철이의 결혼 이야기다.

 

영철이는 여러 번 선을 봤지만 결국 짝을 만나지 못하고 40살을 넘겼다. 부모님 속은 더욱 타들어 갔다.

아래 여동생들은 막내까지 전부 결혼을 했으나 장남인 아들만 마흔 살이 넘도록 짝을 찾지 못하니 오죽했겠는가.

 

내가 40대에 접어들면서 외국 생활을 시작했기에 이후의 이야기는 몇 년 전에 들은 것들의 기록이다.

영철이는 여자 앞에만 앉으면 말을 더듬는 습관이 있다. 감정이 격해지거나 당황스러울 때도 그런다고 했다.

이것이 결국엔 열등감으로 작용했는지 부모님이 나서지 않으면 영철이는 결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아들 결혼 시키기는 더욱 치열해졌다.

국내 여자와 연결이 안 되니 결국 외국으로 눈을 돌렸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처음 연변 아가씨와 접촉했으나 잘 안되었던가 보다.

영철이는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러시아로 떠났다. 러시아 여자를 만나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러시아로 함께 갔던 다른 남자들은 전부 짝을 데리고 왔는데 영철이만 혼자서 돌아왔다.

동네에서는 아무래도 남자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수근댔다고 한다. 고자라고 수근대는 소리에 열불이 난 엄마가 영철이를 앉혀 놓고 그랬다고 한다.

 

"니 정말, 고추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영철이라고 왜 동네의 그런 분위기를 몰랐겠는가. 엄마의 이 말에 영철이도 화가 나서 소리쳤다.

"엄니, 나라고 왜 결혼하고 싶지가 않겠어유. 그런데 코 큰 여자한테는 자X가 안 서는 걸 어떡해유."

 

부모님은 베트남 쪽을 알아 봤고 결국 영철이는 피부가 까무잡잡한 베트남 여자와 결혼을 했다. 당시 친구 나이 마흔 둘이었다.

이듬해 베트남 아내는 딸을 낳았고 영철이는 고자가 아님을 증명했다. 그런데 베트남 아내가 딸이 첫돌 무렵에 집을 나갔다고 한다.

 

영철이는 미친듯이 아내를 찾아 다녔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뒤늦게 위장 결혼이었음을 안 친구는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부모님이 딸을 맡아서 키우던 중에 딸이 사고로 죽었다. 사고사였음에도 경찰과 동네 사람들은 영철네 가족을 의심했다.

 

용의자로 경찰 수사를 집중적으로 받았고 죽은 딸은 부검을 했다고 한다. 딸이자 손녀를 잃은 영철과 부모님은 마음 고생이 오죽했을까.

어쨌든 무혐의로 결론이 났고 영철도 피폐해진 마음을 다시 추스렸다. 이후에도 영철 부모님의 장남 결혼 시키기는 멈추지 않았다.

 

결혼 중개업소의 주선으로 영철은 우즈베키스탄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때 내 친구 나이 마흔 다섯 살이었다.

그쪽 사람답지 않게 코가 높지 않은데다 까무잡잡한 동양적인 외모의 여성이었다. 두 사람은 23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이 둘을 낳고 산다.

 

큰아들과 딸이 모두 혼혈 다문화 가족임에도 아빠 쪽을 많이 닮은 한국인이다. 2019년에 나는 이 친구 집에서 1박 2일을 머물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말수가 없는 편인 영철이한테 들은 것보다 적극적인 어머니가 대부분 들려줬다. 내 엄니와 친정이 한동네라 나는 어릴 때부터 이모라고 불렀다.

"그동안 내 사연을 말하자면 한 트럭으로는 모자란다."

 

한국 말을 통 배우려 하지 않았던 베트남 며느리에 비해 우즈베키스탄 며느리는 부지런히 한국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성격도 밝고 싹싹해서 시부모의 귀여움을 많이 받는다고 했다. 내가 그집에 머물며 느낀 바도 그래 보였다.

 

부모님이 연세가 들어서 친구 농장에는 외국인 노동자 손을 빌려야 했고 지금 우즈베키스탄 사람을 고용하고 있다.

영철 아내와 언어가 같으니 갈등도 별로 생기지 않고 여러모로 편하다고 했다.

내가 방문했을 때 일하는 사람이 우즈베키스탄 부부였는데 친구의 농장에서 일한 지가 10년 가까이 된다고 했다.

 

처음엔 남편만 일했으나 영철의 주선으로 나중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아내까지 데려와 부부가 함께 지내고 있단다. 아주 든든한 직원이다.

영철은 한 번 결혼에 실패했으나 지금은 아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이래서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나 보다. 그것이 비록 외국 짚신일지라도 말이다.

 

영철이 또한 처갓집에 아주 잘한다. 우즈베키스탄 장인 장모를 두 번이나 한국에 초청해서 한국으로 시집온 딸이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사돈끼리도 사이가 아주 좋단다. 비록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함께 관광도 다니며 돈독하게 지내니 영철과 아내는 얼마나 흐뭇할까.

 

일요일인 어제 아침에 영철이한테 전화가 왔다. 친척 혼사가 있어 서울 가는 길인데 잠시 볼 수 있겠냐고 했다.

내가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만남은 다음으로 미뤘지만 미안한 마음에 모처럼 길게 통화를 했다.

 

아내가 요즘 아들 뒷바라지를 위해 대전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고 했다. 환갑이 훨씬 지난 영철의 큰아들은 올해 고2다.

그동안 중학생 딸까지 할머니가 함께 살며 뒷바라지를 했으나 엄니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아내와 교대를 했다고 한다.

 

고3 수험생도 아닌데 뭐 벌써부터 이리 유난이냐고 할지 모르나 영철이한테는 금쪽 같은 자식이다.

서울대는 아닐지라도 서울에 있는 대학은 꼭 보내고 싶다는 부부의 소박한 뒷바라지가 눈물겹다.

아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집에 오지만 당분간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을 거라고 했다.

 

아들도 예전에는 아빠한테 전화 한 통 없던 녀석인데 할머니가 아프다니 전화를 자주 하면서 안부를 묻는다고 한다.

통화 내용이 아빠 안부가 아닌 전부 할머니 걱정뿐이어서 서운할 법도 한데 아주 기특하다고 했다. 공부도 곧잘 한다고 하니 이런 효자가 따로 없다.

 

친구는 우즈베키스탄 여자와 결혼하면서 농장도 잘 되었고 두 자식까지 얻었으니 늦복이 터진 셈이다. 친구의 늦복에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직까지 이 친구한테 물어보지 못한 것이 있는데 나중 만나면 꼭 물어볼 참이다.

 

"니가 코 큰 여자한테는 자X가 안 선다는데 정말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친구는 당황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니 니, 그그 그 말, 어어 어데서 드 들었냐?"

여기까지가 오늘 나의 미시사의 끝이다. 내 친구의 행복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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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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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31 와우~ 페이지님 반갑습니다.
    저는 글을 누군가 읽어주길 바라면서 쓰기도 하지만 저를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가 가장 인생이 안 풀리는 사람이라 생각했다가도 내 친구 영철이 같은 인생을 보면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구나 싶지요
    글로든 댓글로든 소통한다는 것이 이렇게 페이지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답글다는 마음일 겁니다.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흰구름도사 | 작성시간 26.03.31 TV 다문화 고부열전 프로그램을 너무 많이 봐 온 터라 '까무잡잡이면 어때요? 신랑신부 사이 좋으면 그만이지' 이렇게 받아주고 싶었는데 도망가버리고 마지막 귀착지가 우즈베키스탄으로 정착했으니 잘 된 일이지요.
    친구 영철씨는 무슨 운을 타고 났기에 나이 마흔 다섯까지 ?? 여복이 없다고 해야 하나 염복이 없다고 해야 하나? 참나 원.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3.31 내 친구는 러시아 같은 서양 여자보다는 동양 여성에게 더 호감이 가는 편인가 봅니다.
    베트남까지 가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모셔왔는데 그만 달아났으니 얼마나 배신감이 들었겠는지요.

    그래도 우즈베키스탄 여성을 만나 날라가버렸던 행복을 다시 찾았으니 이런 것을 전화위복이라 할 만합니다.
    60중반을 향해가는 영철이가 지금도 금슬을 유지하는 것은 그의 곱고 부드러운 성품이라 생각하네요.
    흰구름도사님, 항상 좋은 날들 되세요.
  • 작성자리진 | 작성시간 26.04.01 친구분의 장가들기가 참 고단했겠지만 끝이 좋으니 다 좋은거죠.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4.02 리진님의 댓글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이런 것도 대기만성이라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뒤늦게 터진 여러 복들 누리는 영철이가 참 보기 좋답니다.
    희망은 이래서 늘 품고 살아야 나중에라도 내것이 되는 모양입니다. 너무나도 좋은 봄날입니다. 리진님의 봄날이 행복하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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