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박목월 詩, 김순애 曲, 사월의 노래)
오늘부터 사월입니다.
가곡이나 가요나 팝송 중에는 어느 한 달을 노래한 곡들이 꽤 있지요.
패티 김의 '구월의 노래'
많은 가수들에 의해 불려진 'Try to Remember'
(이 역시 구월의 노래네요. 가사 중에 The kind of September라는 구절이 나오니까요)
비지스의 'First of May'등이 떠오르네요.
아참, 가수 이름도 있네요. 우리네 젊은 시절에 인기가 높았던 듀엣 '사월과 오월' ^^
위에 적은 가곡 '사월의 노래'는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 '만화책'을 통해서 알게 된 가곡입니다.
네? 만화책과 사월의 노래? 이상한 조합이라구요?
좀 그렇죠? ^^
제가요, 초등학교 다닐 때, 아니 국민학교지요. 저희들이 다녔던 학교는 어디까지나 국민학교지요.
국민학교 다닐 때, 동네 만화 가게에 출근 도장을 찍다시피 했어요.
정말로 무쟈게 만화 읽어댔습니다.
그 시절의 만화방은 지금과 달리 어린아이들이 주 고객이었잖아요.
그리고 만화 내용도 지금처럼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이지 않았구요.
독고탁 시리즈로 명성을 떨치던 이상무 씨,
순정만화 삼인방이던 엄희자, 송순히('희'가 아니라 '히'였어요. 특이하게도), 민애니 씨 등이 기억납니다.
제가 여자라서 순정 만화를 주로 봤기 때문에 이상무 씨 외엔 순정만화 작가들만 기억이 나네요.
그 중에서도 저는 엄희자 씨의 팬이었습니다.
송순히 씨나 민애니 씨의 그림보다,
얼굴 윤곽이 둥글고 눈의 크기도 비교적 전체 균형에 맞던 엄희자 씨의 그림이 맘에 들었더랬어요.
만화는, 빌려가는 방법과 가게에서 보는 방법이 있는데
형제 자매가 여럿인 집에선 빌려다 보는 것이 싸게 먹히고
저처럼 혼자 크는 아이는 가서 보는게 이익이었지요.
그래서 저, 맨날 만화가게에서 살았습니다.
참 열심히도 읽어댔어요.
제가 책읽는 속도가 무척 빠른데, 그거 만화가게에서 쌓은 실력이랍니다. ^^
만화 삼매경에 빠져서 주변을 의식도 못하고 책장을 넘기며 소리 내어 웃기도 하고 눈물도 훔치던 여자 아이가 저였어요.
그렇게 엄청나게 읽어댔던 만화 내용들, 당연히 다 잊었지요.
하지만 '추억의 히야신스'라는 만화 제목 한 가지와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소녀가 가곡 '사월의 노래'를 부르면서 끝나던 또 다른 한 만화는 기억에 남습니다.
저 노래는 무슨 노래지?
목련꽃은 알겠는데 베르테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이냐?
왜 무지개 계절에 눈물이 어리나? 쩝...
국민학생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노랫말이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랬는지 그 가곡은 제 뇌리에 깊이 남아,
훗날 그 가곡을 실제로 듣게 되었을 때 그 아름다운 선율이 제 가슴에 감동으로 와 닿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리고 해마다 목련꽃이 필 때면 가곡 사월의 노래는 어김 없이 제 입 속을 한 동안 맴돌곤 하지요.
바야흐로 목련의 계절입니다. 꽃소식이 늦은 이곳 한수이북에서도
백목련 자목련이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어요.
목련꽃 그늘 아래서, 그 옛날 만화가게에서 혼자 웃고 울던 소녀는
예순 네 살의 봄날 속을 지나며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먼 산에 분홍 꽃불을 놓기 시작한 진달래,
아랫녘에서 북상하여 의정부 중랑천변을 밝히기 시작한 벚꽃의 화사함,
응봉산 암릉을 노랗게 뒤덮은 개나리의 물결,
멀미가 날 정도로 현란한 봄꽃들의 합창에 섞여 머리에 서리 내린지 오래인 나의 봄날의 노래도 작은 소리로 퍼져 갑니다.
연분홍 치마아~~가 봄바람에에~~ 휘나알리이더어라~~~
엥? 가곡으로 시작했다가 웬 가요무대? ^^
목련꽃 그늘 아래 봄날은 꿈결처럼 빠르게 흘러 가고 있어요...
눈 몇 번 깜빡이면 거짓말처럼 끝나 버릴 잠깐 동안의 봄.
올해에도 축복처럼 누리고 있는 이 찬란한 계절이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하네요.
봄이라서 행복한데 조금은 쓸쓸하기도 합니다.
아름답고 귀한 것들은 왜 이렇게 다 짧고 유한한 것일까요?
눈부신 순백의 목련이 활짝 피었습니다.
저 꽃송이가 금방 떨어진다 해도 슬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렇게 순하게 봄을 맞이하고, 감사함으로 봄의 한가운데를 지난 뒤, 이윽고 가버릴 봄날은 담담하게 보내주겠습니다.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저의 글벗께서는 어느 곳, 어느 꽃그늘 아래에서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4월에 대한 예의이고 의무이니까요. ^^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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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4.02 그 시, 최영미 시인의 선운사에서, 절창이지요.
베스트 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에서
그 표제시보다 저는 이 시 선운사에서가 더 좋았어요.
젊어서는 꽃이 피는지 지는지 큰 관심 없었는데,
나이 들어가니 봄마다 피는 꽃이 어찌 그리 애틋한지요.
소중한 4월의 또 하루가 저뭅니다.
현덕님 평안한 저녁 되시어요. ^^ -
작성자윤슬하여 작성시간 26.04.04 어머나
독고탁시리즈 오랜만에 들어보는
고향산천같은 이름이구요
정말 그 땐
만화가
폭력적이지 않았지요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것
잠깐이더라
지는 것 쉬어도
잊는 건
영영 오래더라ᆢ
선운사동백보다
목련꽃을 보면 더 생각나는 대목이지요
새벽에 도착해서
초코 데리러 영암 농장 출발 전
잠시
달샘의 달필을 읽고
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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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4.04 에고, 가까운 일본이라지만 그래도 해외 여행인데
새벽 도착에 또 영암 행이니 피곤하시겠어요.
여행은 즐거우셨지요?
일본도 동남아도 중국도 싫다는 우리 영감 땜시
저는 그저 국내에서만 돌아다닙니다.
우리 성, 이 좋은 봄날을 누려~~~ 요.
우리 성은 놀고 또 놀아도 될 자격이 충분해~~~ 요.
서은 할매의 인생의 봄날을 응원합니다! ^^ -
작성자로사리 작성시간 26.04.04 나도 목련꽃좋아해요 너무 짧아 아쉬움을 주는 꽃이기도 하지요 달항아리님 잘지내시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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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달항아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4.04 고우신 로사리님, 따뜻하신 로사리님, 반갑습니다. ^^
저는 게으르게 편안하게 잘 지냅니다.
남양주에 갈 때면 로사리님 생각이 나곤 해요.
이 좋은 봄날에 늘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