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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고바우 영감이 길러준 나의 활자 탐험기

작성자유현덕|작성시간26.05.05|조회수399 목록 댓글 25

 

어릴 때부터 활자 중독자였다. 나는 활자(活字)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지만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이 活이라는 글자에 더 끌림이 간다.

지금도 활자를 통해 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고 하면 지나친 비유일까.

 

일자무식인 엄니는 새끼들 먹여 살리느라 새벽부터 밤중까지 논으로 밭으로 남의집 품을 팔러 다녔다.

그런 일이 없을 때는 물때에 맞춰 바닷가에 나가 조개나 파래 같은 해산물을 수확해서 푼돈을 마련했다.

 

당연히 나는 어머니한테 공부해라 책 읽어라 이런 말을 들어보지를 못했다.

엄니는 자식 공부에 앞서 우선 굶지 않게 하려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그런 중에 어떻게 나는 활자 중독자가 되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어릴 때 우리집 벽지는 신문이었다. 가난해서 꽃무늬 벽지든 사방연속무늬 벽지든 그런 벽지로 도배할 형편이 안 되었을 것이다.

신문으로 사방 벽을 도배하고 서까래가 보이는 천장까지 도배를 했다. 엄니는 한참 나중인 이듬해엔가 꽃무늬 벽지를 사서 그 위에 도배를 하긴 했다.

 

여름 한철만 지나면 천장 벽지는 까만 파리똥이 잔뜩 끼어 글자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다소 억지소리 같지만 신문 벽지가 유일하게 좋은 점은 독서 함양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횃대가 걸려 있는 아랫목 벽 일부만 두꺼운 기름종이였고 3면의 벽은 신문지였다. 신문지 글씨는 크기가 작고 한문이 절반이라 제대로 읽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더듬더듬 아는 글자만 찾아 읽는 것이 내 최초의 독서였을 것이다.

 

물론 학교에서 영희야 철수야 바둑아 놀자 등을 배우면서 글자를 깨우쳤기에 가능했다.

받아쓰기도 곧잘 해서 선생님이 색연필로 그려주는 참 잘했어요 동그라미를 자주 받는 아이였다. 어쩌면 집안 신문지 벽지에서 읽은 독서의 힘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활자라면 무조건 읽고 보는 탓에 신문 벽지에 기사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자가 절반 이상인 신문기사를 다 이해한 것은 아니고 그냥 뜻도 모르고 읽은 것도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네 컷짜리 시사만화 고바우 영감이 기억에 남는다.

 

고바우 영감이 나오는 4컷 만화를 찾아 열심히 읽었다. 3면 벽에 있는 고바우 만화를 다 읽자 천장에 있는 만화를 보고 싶었다.

문제는 집에 의자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플라스틱 의자도 흔하지만 당시 우리집에는 나무 의자마저 없었다.

의자라곤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앉는 동그란 짚방석이 유일했다.

 

오두막집 천장에 있는 고마우 만화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다 꾀를 냈다.

장독대에 엎어져 있는 항아리를 딛고 올라가는 것이다. 작은 항아리는 높이가 낮아 큰 것을 골랐다.

무거운 장독을 방에 들여와 그 위에 도마를 얹고 올라가서 기어이 고바우 만화를 읽을 수 있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엄니가 이것을 보고는 장독 깨지면 어쩔 뻔했느냐며 지청구를 했다. 나의 독서 이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밤이면 호롱불을 켰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쯤엔가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전까지는 호롱불이었다.

잘 사는 집에서는 호롱불보다 훨씬 밝은 남포등을 켰지만 우리집은 언감생심이었다.

내가 책을 읽느라고 호롱불을 늦게까지 켜고 있으면 엄니는 지름(석유) 닳아진다면서 얼른 자라고 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학교가 없어서 건너 마을로 학교를 다녔다.

동네 모퉁이 산길을 돌아 저수지 부근을 지나고 한참을 더 가야만 학교가 있었는데 그 먼 길을 걸어서 다녔다.

학교가 있는 마을은 우리 동네보다 컸고 버스도 들어왔다. 5학년 때쯤인가. 그 마을에 사는 친구네 집은 책이 많았다.

 

세계문학전집, 위인전 등이 꽂혀있는 커다란 책장이 있었다.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여행기, 프란다스의 개 등을 빌려 읽었다.

다행히 친구는 내가 빌려달라고 하면 곧잘 빌려주었고 나는 책을 읽고 돌려주면서 다른 책을 빌려왔다.

 

친구 어머니가 책 빌려가는 내가 기특하게 보였는지 칭찬을 해줬다.

내가 반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친구와 함께 공부하며 더 놀다가라고 간식을 주기도 했다. 이렇듯 나의 국민학교 독서는 빌린 책이었다.

 

중학교 1학년을 끝으로 밥벌이에 나섰다.

당시 나의 취업 제1의 조건은 숙식이 제공되는 거였다. 공장 기숙사는 허름하기 짝이 없었으나 내겐 잠을 잘 곳이 있는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기숙사에서도 활자 중독을 벗어나지 못했다.

선배들은 일이 끝나면 당구장이다 술집이다 외출해서 놀기 바빴지만 나는 어리다고 끼워주지를 않아 혼자 기숙사에서 책을 읽었다.

 

마음만 먹으면 읽을 책은 많았다. 기숙사 구석에 돌아다니는 선데이서울부터 각종 무협지, 명랑만화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다.

교양서라 할 만한 것은 없었는데 어느 날 겉장 떨어진 잡지 샘터를 만났다. 아마도 선배 중 한 사람이 사서 읽었을 것이다.

 

작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글들이 많았다. 활자의 매력을 알게 하는 신세계였다.

소설가 최인호 선생의 글과 법정 스님 글도 거기서 많이 읽었다. 아마도 박완서 선생의 글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근본 없이 막 자랐지만 훗날 박완서 선생의 문장을 좋아했다. 며칠 전 헌책방에 들렀다가 <모래알 만한 진실이라도>란 책을 만났다.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시기를 놓쳐 여태 못 읽은 책이라 바로 구입을 했다.

 

박완서 작가의 산문 중에서 엄선된 것만을 골라 실은 책이다. 어린이날인 오늘 이 책을 완독했다. 이제서야 박완서 선생을 온전히 만난 느낌이다.

열여섯 살쯤에 선생의 글을 처음 읽은 지 거의 50년 만에야 그를 온전히 가슴에 담은 셈이다. 인상에 남는 구절이 있어 발췌해서 옮긴다.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만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스마트폰과 AI 시대임에도 내겐 활자처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오늘 활자의 의미를 깨우쳐준 박완서 선생이 고맙다.

네 컷 만화로 코흘리개 소년에게 꿈을 품게 한 고바우 영감이 또한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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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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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5.06 우정이님 반갑습니다.
    자식들이 성장하면서 부모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겠지만 독서의 영향 만큼이나 큰 것이 있을까요.
    아버님이 언니한테 책 선물을 하셨다니 일찍부터 활자와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세상의 아버지들이 다 그럴 것 같지만 자식 책 사줄 돈으로 당신 술 사먹을 생각부터 하는 아버지도 있으니까요.

    신문만큼 활자와 친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매체도 드물 겁니다. 우정이님 아버님이 구독하셨던 신문 또한 자식들한테 영향을 미쳤을 테구요.
    나중에 아버지처럼 살아야지,, 이 대목에서 잠시 제 눈길이 멈췄습니다. 우정이님의 아버지 사랑에 박수를 보냅니다.
  • 작성자김지원. | 작성시간 26.05.06 현덕님의 꿈인 200살까지
    건강하게 삶을 영위하시길 응원합니다
    현덕님의 글을 어디서나 즐길 수 있길
    소망합니다.

    저도 지금 읽어야 할 책들 메모지에 적어 놓고,,,
    가끔은 서점에 들러 한 두권 사오기도 하는데 못 읽고 있어요
    죽고 싶어도 읽어야 할 책이 많아 하늘이 날 데리러 와도
    읽어야 할 책이 많아 아직은 못 간다고 전해라!,,, 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5.06 ㅎ 반가운 김지원님시네요.
    어쩌면 책 읽는 꿈이 저와 꼭 같은지 놀랍습니다. 저도 지원님처럼 책방에 들르면 일단 몇 권 구입하고 본답니다.
    마음은 곧 읽어야지인데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쌓여 있는 책이 아직도 많네요.

    김지원님은 읽어야 할 도서목록이 조금씩 줄어들기를 바래봅니다.
    그리고 읽어야 할 책이 많아서 하늘이 데리러와도 못 간다고 전하라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응원 보냅니다.
    책도 건강해야 읽을 수 있는 것이니 우리 책을 읽기 위해서라도 건강하자구요.
  • 작성자수피 | 작성시간 26.05.07 유현덕님과 비슷하게 저도 어려서부터 활자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5.07 제 글 찐팬이신 수피님 오셨군요.
    저의 부족한 글에 늘 관심주시는 수피님이 어릴 때부터 활자와 친숙했다니 더 반갑습니다.
    답글 달고 저는 이제 점심 먹으러 갑니다.
    절반 남은 하루도 좋은 시간 되세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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