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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꽃을 향한 아부

작성자유현덕|작성시간26.06.10|조회수503 목록 댓글 32

 

엄니와 누이는 꽃을 좋아했다. 예전에는 먹거리도 귀했지만 꽃도 귀했다.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대표적 봄꽃이라는 벚꽃도 거의 없었다.

꽃이라고 해야 산꽃과 들꽃 정도였다고 할까.

 

봄이면 개나리 진달래와 살구꽃이 저절로 피었다가 졌다.

누이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진달래를 꺾어 왔고, 사이다 병에 꽂아 마루 한쪽에 세워 두고 며칠 동안 꽃 감상을 했다.

이런 꽃들이 지고 나면 찔레꽃과 감꽃, 아카시꽃이 피었을 것이다.

 

누이와 엄니는 가난한 살림에도 봄이면 장독대 옆 담벼락 아래에다 작은 꽃밭을 가꾸었다.

혹독한 겨울을 무사히 견딘 작약은 해마다 스스로 나왔지만 나머지 꽃들은 심어야 한다. 봉숭아, 해바라기, 나팔꽃, 맨드라미 등이다.

 

보리 타작과 모내기를 마치고 나면 개구리들이 울었고, 꽃밭에서는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누이가 채송화를 심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장독대 주변과 담벼락 아래에도 채송화가 피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집 꽃밭의 꽃은 여름 내내 피고지고를 반복하면서 장마도 태풍도 꿋꿋하게 견뎠다.

나팔꽃은 해바라기 몸통을 감고 올라 갔다가 담벼락 위까지 손을 뻗어 당당하게 꽃을 피웠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우리집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꽃밭이 있는 집이 있었다. 대문이 있는 브로크 담벼락 위로 한약 냄새가 풍겨 오던 부잣집이었다.

부자들은 항상 행복한 줄만 알았는데 가끔 식구들이 싸우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집 마당가에는 우물이 있어서 마을 공동 우물을 이용하는 일도 없었다.

 

대문 쪽은 브로크 담이었지만 옆쪽은 탱자나무 울타리여서 쪼그리고 앉으면 그집 마당을 절반쯤 구경할 수 있었다.

이따금 대문이 열려 있기도 했으나 무서운 그집 할아버지 때문에 들여다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늘 한약 냄새를 풍기던 그집에 어느 날 초상이 났고 사나흘 곡소리가 들렸다. 상여가 나가는 날 대문 앞에 화려한 꽃으로 장식한 상여가 놓여 있었다.

어느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상여꽃이라 했으나 그때 나는 상여꽃이 무서웠다.

 

상여 나가기 전날이었던가? 언제나 꼭 닫혀 있던 그집 마당이 궁금해서 구경을 갔다. 부잣집이라서 그랬을까.

멍석이 깔린 넓은 마당에는 술상 앞에 앉아 있는 조문객들로 붐볐다.

 

아마도 여름이었던가 보다. 그집 마당가 넓은 꽃밭에는 온갖 꽃들이 피었는데 상여꽃보다 더 다양한 꽃들로 가득했다.

그중 키가 큰 접시꽃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것이 접시꽃이라는 것을 훗날에야 알았지만 화려한 꽃잎을 달고 나란히 서 있던 접시꽃이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배고픈 조무래기들은 행여 음식이라도 얻어 먹을 요량으로 마당을 어슬렁거렸다. 후덕한 상주가 아이들에게 시루떡을 하나씩 나눠줘서 달게 먹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에 부잣집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화려했던 꽃밭이 궁금했던 나는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로 고개를 내밀어 봤지만 솥뚜껑 만한 토란잎에 가려서 절반만 보였다.

늘 풍기던 한약 냄새는 그쳤지만 그집 꽃밭에는 해마다 접시꽃이 피었을 것이다.

 

 

엊그제 큰 누이집을 다녀오는 길에 만난 접시꽃이다. 좁은 시골길임에도 나는 운전을 하느라 보지 못했는데 아내가 보고 감탄사를 내질렀다.

"어머 어머, 저기 접시꽃 핀 것 좀 봐!"

 

무슨 일 때문인지 이날 아내와 의견 충돌이 생겨 잠시 옥신각신 했었다. 우리 부부의 냉각기라고 해봐야 항상 금방 끝난다.

짧으면 1시간, 길면 8시간 정도라고 할까.

오는 도중 약간 썰렁한 차안에서 나는 언제 화해의 말을 건낼까를 노리고 있는데 꽃이 먼저 나선 셈이다.

 

구멍 가게 옆 공터에 차를 세우고 꽃구경을 갔다. 아내가 접시꽃 좋아한다는 것을 이날 알았다.

내 아내는 좋아하는 꽃이 자주 바뀐다.

 

언젠가는 안개꽃을 제일 좋아한다고 했고, 어느 날은 장미가 꽃 중의 꽃이라서 제일 좋다고 했다.

어쩌면 조만간 필 능소화를 보면 가장 좋아하는 꽃이 능소화라고 할 것이다. 우리는 구멍 가게에서 산 하드를 먹으며 잠시 꽃구경을 했다. 

 

문득 어릴 때 부잣집에서 봤던 접시꽃이 생각났다. 그 추억 때문인지 내게 접시꽃은 화려함 뒤로 묘한 슬픔이 묻어나는 꽃이기도 하다. 나도 이날 아내처럼 접시꽃이 더 좋아졌다.

 

 

요즘엔 꽃 종류도 많고 어디를 가나 꽃이 천지인 세상이다. 이름을 다 외우지 못할 정도로 다양한 꽃에다 빛깔도 어찌나 화려한지 눈이 어지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내겐 우리집 꽃밭에서 피던 봉숭아와 채송화 같은 소박한 꽃들이 아련한 추억으로 자라 잡고 있다. 그 부잣집에서 봤던 접시꽃 또한 마찬가지고,,

 

인생에서는 아부가 디딤돌보다는 걸림돌이 될 때가 더 많다. 그래서 아부가 양날의 검이기도 하거늘, 아부 중에서 가장 쉽고 무난한 것이 꽃을 향한 아부다.

오늘 나의 꽃을 위한 아부는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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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1 둥근해님 저도 반갑습니다.^^
    부지런한 숙이네 아부지 덕분에 골목 골목 온갖 꽃들을 볼 수 있었다니 완전 꽃 피는 산골에 꽃대궐이었겠습니다.
    이래서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도 큰 복이라는 말이 있나 봅니다.

    사루비아, 분꽃, 해당화, 찔레꽃, 과꽃, 나팔꽃, 채송화, 해바라기 등, 제가 다시 옮겨봐도 너무나 친근한 꽃들입니다.
    우리집 꽃밭에는 없었지만 본문에 나오는 부잣집에는 이런 꽃들이 전부 있었을 것으로 보이네요.

    요즘 화려한 꽃들이 많지만 저는 이렇게 어릴 적에 봤던 꽃들에 더 정감이 간답니다.
    예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칼라풀 | 작성시간 26.06.11 유현덕님 잘 지내시죠?

    저도 처음 접시꽃을 접했을땐 그 우람한 자태에
    한번 눈이 동그래 졌고
    크기에 또 한번 놀랐지요..

    꽃이라고 하기엔 그 위용이 대단하다고 느꼈답니다
    여장부 같은 스타일 이라고 할까?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미와 안개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들에핀 꽃과 설악산의 에델바이스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군더더기 없는 이웃집 이장님 같은 글
    즐감합니다,,


    그리고 꽃 이름을 모르지만..
    생시적 아버님께서 키우던 꽃이 있었는데 이름은 모름
    그꽃을 해마다 볼때면 아버님 생각에 마음 한 구퉁이가
    저며오네요~~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1 넵~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칼라풀님 말씀처럼 접시꽃이 키도 크지만 꽃잎도 큰 편이긴 하지요. 그래서 접시꽃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네요.
    얼굴 보구 이름 짓는다는 말도 있듯이요.

    그러고 보니 지금쯤 설악산 공룡능선엘 가면 에델바이스가 반겨줄 때이기도 합니다. 님이 이꽃을 좋아하신다니 반갑기도 하구요.
    칼라풀님 아버님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 이름은 몰라도 꽃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으니 그래도 다행이지 싶습니다.

    참, 저도 모처럼 이번 토욜에 멀리 있는 산을 갑니다. 무슨 산인지는 다녀와서 알려 드릴게요.ㅎ
    항상 좋은 날 되세요.
  • 작성자동연 | 작성시간 26.06.13 카페오기 심드렁하여 창 밖에서 기웃기웃

    시어머니는 펌프 주변에
    게발선인장, 공선인장, 손바닥선인장, 꽃기린을 키우셨어요

    엄마는 마당 있는 집에 살 땐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과꽃을 심으시더니

    시골에 가서는 밭을 매다가 가장이 둔덕에
    봄맞이꽃, 꽃마리, 냉이, 꽃다지, 개망초, 돼지감자꽃을 옮겨 심고
    짬짜미 바라보셨지요


    추천 꾹


  • 답댓글 작성자유현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3 답글이 조금 늦어네요.
    동연님의 댓글로 인해 저도 어릴 적 마을 풍경을 떠올려 봅니다.
    동연님 시어머님처럼 제 친구네 집에도 여러 선인장을 길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호기심에 만지면 가시가 여지없이 손가락을 찔러서 얌전히 구경한 했지요. 참고 기다리면 선인장꽃도 피었구요.

    어머님이 밭둔덕에 심으셨다는 봄맞이꽃, 꽃마리, 꽃다지 등은 잘 모르는 꽃이긴 해도 이름들이 토속적이라 참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평화로운 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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