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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말의 화석(1) / 사라진 말 속에 잠든 시대의 마음

작성자비온뒤|작성시간26.06.16|조회수143 목록 댓글 2

말은 죽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가 매일 아무 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 버찌, 장사치, 벼슬아치, 묵은지 같은 단어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오래전 사람들의 삶이 아직도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무엇을 사랑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무엇에 분노했는지가

단어 하나 속에 화석처럼 남아 있다.

 

화석이 특별한 이유는 죽은 생명체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라진 세계를 다시 복원해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고생물학자는 돌 속에 남은 뼈 한 조각으로 수천만 년 전의 숲을 상상하고, 멸종한 생명체의 모습을

되살린다. 언어도 그렇다. 단어 하나는 작지만 그 뒤에는 한 시대가 숨어 있다.

 

우리가 그 뜻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사라진 풍경과 잊혀진 사람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감정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예술 작품 속에는 그것을 만든 시대의 정신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그 통찰은 언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쩌면 말은 그림보다 더 정직한 기록인지도 모른다.

그림은 화가가 남긴다. 글은 글을 아는 사람이 남긴다. 

 

그러나 말은 누구나 남긴다. 왕도 말을 남기고 백성도 말을 남긴다.

학자도 말을 남기고 장사꾼도 말을 남긴다. 궁궐도 말을 남기고 저잣거리도 말을 남긴다.

 

그래서 언어 속에는 역사책이 기록하지 못한 사람들의 삶이 남아 있다.

역사는 대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을 남긴다.

 

어느 왕이 즉위했고, 어느 장수가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어느 학자가 이름을 떨쳤는지는 기록된다.

그러나 이름 없이 살아간 사람들의 마음은 좀처럼 기록되지 않는다.

 

밭을 갈던 농부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장터에서 물건을 팔던 상인은 무엇에 웃고 무엇에 분노했을까.

 

긴 겨울밤을 견디던 평범한 사람들은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았을까.

문헌은 침묵하지만, 언어는 때때로 그 답을 들려준다.

 

그들은 말을 남겼다.

 

벚나무에 열린 작은 열매를 보며 '버찌'라는 이름을 붙였고,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땅끝을 보며 '곶'이라 불렀다.

 

손으로 곡식을 움켜쥐며 양을 가늠했고,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새로운 감정을 말로 빚어냈다.

 

그리고 어떤 날에는 권력자를 향해 '벼슬아치'라는 통쾌한 조롱을 던지기도 했다.

그렇게 태어난 말들은 세월 속을 떠돌며 살아남았다.

 

어떤 말은 뜻이 바뀌었고, 어떤 말은 모양이 변했으며,

어떤 말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흔적은 남았다. 그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단어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한 시대의 생활 방식이고, 한 공동체의 세계관이며,

수많은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희망이 켜켜이 쌓인 감정의 퇴적층이다.

 

이 글은 그 퇴적층을 더듬어 올라가는 여정이다.

먼저 우리는 말이 태어나는 순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삶의 감각이 어떻게 언어가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는 말이 뒤틀리는 순간을 따라갈 것이다.

제도와 권력, 신분과 관습이 언어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근대화와 표준화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수많은 말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도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상실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는다.

말은 생각보다 훨씬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새로운 말을 만들고, 낡은 말을 되살리고,

노래와 속담과 농담 속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남겨 왔다.

 

권력보다 오래 살아남은 말들이 있었고,

기록보다 오래 기억된 말들이 있었다.

 

이 글의 마지막 여정은 바로 그 살아남은 말들의 이야기다.

이 글을 읽는 동안 언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다.

 

수백 년 전 어느 들판에서 살았던 농부를 만나고,

저잣거리에서 손님을 부르던 장인을 만나고,

 

억울함을 풍자 속에 숨겼던 백성을 만나고, 노래와 이야기로 삶을 견뎌낸 이름 없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이 지금도 우리가 쓰는 말 속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말 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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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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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그려지는 | 작성시간 26.06.17
    한겹한겹 벗겨지어
    나타나는 무늬를
    그 무늬의 이랑을 기대합니다.
  • 작성자운선 | 작성시간 26.06.17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
    말만 있던 시절에 동굴이나 돌멩이 에 새겨 넣던 말의 흔적들
    새, 풀, 꽃 ...글이 되어 기록으로 남기느라 말은 점점 고와지고
    고급스럽게 전문화가 되었겠지요 각자의 방언이 어떤 형식으로
    오갔는지 알 수없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젠 글로 남아 말의
    임자를 죽은 곳에서 만나기도 하고 ㅎㅎ 글 잘읽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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