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모습은 이제 희미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지팡이를 짚고 회합에 나오셨을 때,
기존 회원들이 놀라듯 반가워하며 안부를 묻던 그날.
나는 양성 과정 2년 차였고, 그분을 처음 뵈었다.
자주 나오지 못하시는 분임을 분위기로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두어 번 더 뵌 기억이 있다.
대여섯 명이 모인 자리에서 다른 분께 건강 기구에 대해 물어 보셨는데
그날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혼자 이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몸이 불편해 보이는데,
혼자 운동을 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으시는 걸까.
40 명이 있는 단체 카톡방에서
그분은 가끔 뜻을 알 수 없는 초성 몇 개만 남기셨다.
마치 술 취한 사람이나 어린아이가 장난으로 쓴것 같은
조합을 해 보아도 추측으로도 말이 안 되는
초성들이다 .
나는 아직 정식 재속회원이 아니었기에,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었다 .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재속회원 회합 월보의
환자 명단에 그분의 이름과 영세명은 쓰여 있었다.
며칠전 12월 27일, 단체 알림이 울렸다.
전날 그분의 부고 소식이었고
그 후에 합동 연도와 장례 일정이 전해졌다.
오늘은 그분의 장례미사날이어서 성당에 갔다.
성전 앞 스크린에는
임민웅 베드로 님.
1940년에 태어나 ,
2025년 12월 26일 ‘Eternal Life’라고 적혀 있다.
제단 밑 중앙 통로에는 그분의 영정 사진이 있어
오늘 마지막으로 그분의 얼굴을 뵐 수 있었다.
많은 수녀님들이 미사에 함께하셨다.
옆에 앉은 이사벨라 자매님께 여쭈니,
따님이 수녀님이라고 하셨다.
우리 본당 신부님과 두 부제님
또 다른 본당 신부님 세 분이 오셔서 함께 미사를
집전 하셨다 .
고별인사에서 수녀님은,
엄마가 16년 전에 먼저 떠난 뒤 남동생과 여동생들이
아버지 곁을 지켜주었다며 감사의 말을 전하셨다.
나는 그분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의 삶이 평탄했을 리 없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들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20 넘게 혼자 사셨던
나의 아버지의 세월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떠난 뒤 내게 남은 것은 불효에 대한 후회와
부질없는 반성 이다 .
장례미사를 마치고 나오며 삶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어젯밤에도 이유 없이 솟아오른 미움과 분노로
잠을 설쳤다.
가끔은 누군가에게 보낸 카톡에서 오자 하나를
발견할 때마다 이미 보내진 작은 실수를 내 스스로
책망하곤 했다.
그분이 남긴 것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초성
몇 글자뿐이었지만,
나는 전하고 싶은 말의 뜻은 다 쓰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남에게 보이는 허점에 마음이 많이
불편해 한다.
늘 반복되는 나의 서툰 손놀림과 성급함은 고치질
못하면서 그런 나를 매우 못마땅해한다.
아주 작은일에 마음을 다치고 또 뺏기고 ,
아파하기도 한다.
결국 죽음 앞에서 분명 나는 더 사랑하지 못한 것을,
더 용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리석게도 여전히 죽음을 나와는
먼 이야기처럼 여기며 오늘을 산다.
그분의 장례미사는 나에게 조용한 질문을 남겼다.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남기고 싶은 말을 다하고 있는가?
미움과 증오를 왜 움켜주고 있는가?
사랑과 온기를 조금이나마 건네며 살고 있는가?
성당을 나서며 나는 마음속으로 그분의 초성에
말을 덧붙였다.
뒤늦게라도, 온전한 문장으로 그분의 마음을 읽고 싶다 .
그리고 그 분깨 이 글을 보낸다 .
베드로 형제님,
말로 다 하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이제는 영원한 곳에서 평안히 이어가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이베리아 작성시간 26.01.05 아프다는 댓글만 쓴 것
같아서 댓글을 삭제했습니다.
이해 바랍니다. -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진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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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진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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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우린. 작성시간 26.01.06 새해 들어 계획한 대로 움직이느라 좀 분주했습니다.
새해 전후로 매스컴에서 이승에서의 이별 소식을 접하는 요즈음입니다.
아녜스 님 주변에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한없이 숙연해지고 또한 자기성찰을 하게 되는 글입니다.
끝내 이승에서는 완성된 문장의 말 한마디 못하고 가셨지만,
천상에 가셔서는 마음껏 구구절절 심중을 토로하며, 자유로운 삶
사시리라 믿어요.
베드로 님의 명복을 빕니다. -
답댓글 작성자아녜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1.06 떠나시는 관을 바라보며 오히려 편안한 곳으로
가신다고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서 나는 왜 하잘것없는 일에
이렇게 마음을 쓰며 살아가고 있나 하는
깨달음도 있었지요 .
다 부질없는 분노와 욕심인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