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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상

가증스럽다

작성자단풍들것네|작성시간26.01.30|조회수557 목록 댓글 33

1.
최근 한 공직자 후보의 청문회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서
참고인이 '가증스럽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을 보았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가증스럽다’는 표현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뒤 맥락을 살펴보니 참고인은 후보자의 해명과 태도를 오만과 거짓으로 판단했고

그 감정을 ‘가증스럽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


‘가증(可憎)스럽다’는 글자 그대로 증오할 만하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도덕적 판단,
감정적 불쾌감,
위선과 염치 없음에 대한 혐오,
타인을 억압하는 태도에 대한 분노가 모두 겹쳐 있다.

즉,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역겹고, 꽤씸하고, 추악하며, 부도덕하다는 의미를 담은 매우 강한 꾸짖음의 언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몹시 얄밉다'는 정의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의미가 담겨있다.
함께 이념을 나누던 동지에게는 쉽게 쓸 수 없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말이 청문회장에서 공개적으로 나왔다
그 원인이 세상을 오만과 교만의 잣대로만 재단했던 선민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거짓을 거짓으로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부도덕함 때문인지는 알 길이 없다.

2.
'어유! 저 가증스러운 인간 다아시!'

이 문장은 소설 '오만과 편견'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품었던 감정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낸다.
그 시점의 그녀는 위컴에게는 호감을,
다아시에게는 강한 반감과 불신을 품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위컴을 부당한 피해자로 믿었고,
다아시는 오만하고 냉혹하며 타인의 삶을 망가뜨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위컴에게 완전히 확신을 두지 못하는 마음,
다아시의 인품과 사회적 조건이 주는 미묘한 흔들림을 스스로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녀가 느낀 ‘가증스러움’은 단순한 혐오가 아니다.
자기 옳음에 취해 타인의 삶을 함부로 다루는 다아시의 오만과
그런 인간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당혹감과 자기혐오의 두 감정이 겹쳐 만들어낸 복합적 정서다.

다아시의 오만은
'내 판단은 틀릴 리 없다'는 계급적 자존심이며 자기 확신의 과잉이다.
오만은 결국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윤리적 오류이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모든 것을 자기 해석의 틀에 맞춰 재단하게 만든다.

물론 다아시는 소설 중반부에서 오해받은 선인으로 밝혀졌지만  
엘리자베스가 소설 초반에 느낀 '가증스러움'의 구조 자체는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3.
그래서 청문회 참고인의 입에서 '가증스럽다'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자연스레 '오만과 편견'을 떠올렸다.

“어유! 저 가증스러운 인간 다아시!”

소설속의 그녀가 느낀 가증스러움의 핵심은 오만이었다.
나는 옳다는 계급적 자존심과 내 판단은 틀릴 리 없다는 확신의 과잉.
자기 옳음에 취한 사람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모든 것을 자기 틀에 맞춰 재단한다.

그 장면에서 청문회의 참고인이 느낀 감정도 바로 그 구조와 같은 것이다.  
자기 해명이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태도,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시선,
세상을 선민의식으로 바라보는 오만.

200년 전 영국 귀족 사회의 오만이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도 반복되는 이유이며 그것이 바로  '오만과 편견'이 지금도 읽히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가증스럽다’고 느꼈던 얼굴들 중에는 내 오만이 투사된 그림자도 섞여 있었을지 모르며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에게 느꼈던 혐오 속에 자기 자신에 대한 당혹감이 함께 있었듯이,
나 역시 타인의 오만을 비난하며 내 확신의 과잉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4.  
원문 “Oh! the abominable Mr. Darcy!”의 
abominable은
끔찍한, 혐오스러운이라는 강한 정서적 표현이다.
단순한 반감이 아니라 도덕적,정서적 역겨움을 포함하는 말로
민음사 출판(2023년 2판, 윤지관, 전승희 옮김)은 이 구절을 '가증스럽다’로 번역했으며 다른 판본은 확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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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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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아녜스 | 작성시간 26.02.01 단풍들것네 오해가 있으시네요 .
    저는 사극 잘 안 봅니다.
    오디오 북은 수면제 대신이지요 ..
    주로 인문학을 듣고 때로는 종교 강론을
    듣기도 합니다 . 천주교 , 불교 입니다 .
    네플릭스에서 영화 ,드라마를 (한국자막 )
    주로 봅시다.
    요즘 본것 중에 Train Dreams가 너무 좋았습니다.
    강력하게 추천 합니다 .
    과자는 좋아해도 안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애 간식까지 뚝 끊을 필요 있을까요 ?
    조금씩이라도 드셔야 사는 맛이 나지요 .

    단풍님은 매번 저랑 코드가 안 맞는것을
    강조 하시는데 저는 늘 잘 맞는다고 착각을 하니
    이것참 - 입니다 .

    어쨨건 추위 조심 , 눈길 조심 하세요 .
  • 작성자린하 | 작성시간 26.01.31 오만과 편견 어렸을 때 읽은 것 같은데
    내용이 잘 생각 안 나서
    언젠가 다시 읽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하고
    영국배우 키이나 나이틀리가 나오는
    영화로 보았어요.

    <가증스럽다> 그런 말은 생각안나고
    이말은 생각나요.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정치판은 항상....ㅜㅜ
  • 답댓글 작성자단풍들것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2.01
    반가운 걸음 반깁니다.
    사실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어쩌면 유치하지요.
    오만과 편견도 등장인물 대부분이 결혼, 체면, 재산 이야기만 늘어놓는 로맨틱 드라마 공식 그대로이니까요.
    영어권 고등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중에는 세익스피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고 위대한 캐츠비도 포함된다는 말이 있다네요.
    현실과 동떨어진 지겨운 드라마 공감할수 없는 단지 오래전의 이야기일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요즈음 간간히 고전을 읽으며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보고있습니다.
    20대 읽었던 데미안과 지금 읽는 데미안은 분명 다른 깊이로 다가오니까요.

  • 작성자이베리아 | 작성시간 26.01.31 '가증스럽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깊이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단풍님 덕분에 깊이 생각해 보게 되네요.
    그리고
    '오만과 편견'으로까지 문장이 확대되니
    많은 분들의 댓글도 흥미롭네요.
    '오만과 편견'은 영화도 보다 말았고
    책도 읽다 말았는데, 내용은
    흐릿하게 나마 기억이납니다.
    이제 매서운 바람속에서도
    살짝 봄기운이 느껴지네요.
  • 답댓글 작성자단풍들것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2.01 맞아요,
    잘 사용하지 않는 말이지요.
    ㅎ 사실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이 지금 시각으로 보면 어쩌면 유치하지요.
    오만과 편견도 등장인물 대부분이 결혼, 체면, 재산 이야기만 늘어놓는 로맨틱 드라마 공식 그대로이니까요.
    벌써 봄기운이 느껴진다니, 감성적인 분이라 그런가 봅니다.
    여긴 한 겨울 중간의 눈 속에 파묻혀 지내는 나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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