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한 지 열하루가 지났다.
그래서인지 집 안은 이제 낯설지 않다.
그런데 밖은 여전히 남의 동네 같은 느낌이다.
그전에는 이렇게 시간이 많은 날이면
호숫가 산책도 나가고
공원도 한 바퀴 돌고 왔을 텐데,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5월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집을 옮긴다는 것이
내 삶에서 혼자 결정하기엔 버거운 일이었지만,
무리 없이 잘 해내고,
이렇게 한가로움을 느껴보는 스스로가 대견하다.
딸아이도, 주위 사람들도 쉽게 말을 건넸다.
나도 그럴 거라고 대답은 했지만,
살림을 간단히 정리하는 것,
즉 버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추억이 있어서,
어떤 것은 혹시 다음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어떤 것은 선물 받은 것이어서,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버려야 할 이유보다 늘 많았다.
이삿짐을 싸는 것은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라,
추억을 헤집는 일이었다.
행복했던 순간들,
상처로 남아진것들 ,
그 물건과 함께했던 기억들,
손때 묻은 정,
낡았지만 고스란히 떠오르는
내가 살아온 날들의 흔적들이다.
큰 가구를 다 버리는 절차는 복잡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살림을 정리하려고 이사한다고 했더니
누군가는 '화려한 변명'이라며 농담을 던졌고,
또 누군가는 충분히 이해한다고 공감해 주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이사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짐을 싸고 또 풀었다.
이사를 하면서 느낀 점도 많고,
반성도 많이 했으며,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이사는 온전히 혼자만의 일이어야 했다.
몰래 감추어둔 일기장을 누군가 봐서는 안 될 것처럼,
내 살림살이도 그랬다.
그 일기장에 큰 비밀이 있지는 않더라도
나 혼자만의 이야기이길 바라는 것처럼
내 살림살이를 누가 들추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고 싶지를 않았다.
마치 일기를 쓰듯 혼자 몰래몰래 챙겨 와
새 공간에 채워 넣었다.
비우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도,
비우기란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버려야만 비워지는 것인데
또 가득 채워졌다.
앞으로는 사들이는 것은 최대한 절제하고,
버리는 것은 과감하게 해야 되겠다.
힘든 노동과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는 일에도
잘 버틴 나의 건강이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무엇보다 나의 건강이 최우선임을
늘 잊지 않을 것이다.
나의 새로운 집이 참 좋다.
창밖에는 하얀 배롱나무꽃이 보이고,
뒤뜰에는 내가 가꾸던 화분들이 나를 따라와
나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린다.
무성하게 볼품없이 자란 키가 큰 벤자민 나무를
어제 사람을 불러 아담하게 다듬어 주었다.
나뭇가지에는 목마른 새들이 잠시 쉬어 가도록
물통도 달아 놓았다.
며칠 전 벌새 한 마리가 날아왔었다.
그 벌새가 벤자민 나무에 집을 짓기를
조용히 소망해 본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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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든 작성시간 26.06.08 또 가득 채워졌다.
그래도 공간이 작아졌으니 결국 많이 정리가되었겠지요.
애쓰셨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아녜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9 가득 채운것 보다 공감이 있는게 좋은데
여전히 채워지네요.
그래도 곳곳에 공간이 좀 남아있어 다행입니다 .
다시는 채우지 않으려고요 ㅎㅎ -
작성자수피 작성시간 26.06.09 울아녜스님
이사 잘 하셨군요.
버려야 비워진다는 것 저도 잘 압니다만 그게 참 쉽지가 않습니다. ^^* -
답댓글 작성자아녜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9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
정말 버리는것은 쉽질 않아요 .
건강하게 잘 지내시길 바랍니다 . -
작성자다저스 작성시간 26.06.13 나이가 들어가니까 집을 정리정돈하는 것이 노후인생의 큰 과제인 것 같습니다. 아녜스님 애 많이 쓰시네요ㅡ응원합니다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