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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상

0.3초

작성자둘째|작성시간26.06.08|조회수178 목록 댓글 8

(수필 — 0.3초) 

밤 두 시, 냉장고가 운다. 
윙윙 웅웅 운다. 우웅우웅 같기도 하다. 
아무도 그 소리에 이름 붙이지 않았다. 윙윙이나 웅웅, 아니면 우웅우웅일 테니 그냥 윙윙으로 듣기로 한다. 
아침,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고 문을 닫는 시간은 0.3초다. 그 짧은 순간에 웅웅거렸다. 
윙이나 웅이나 우웅우웅이나 우는 소리다. 
의미 있든 의미 없든 소리 내어 운다고 모두 슬픈 것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 

아버지의 오른쪽 귀가 왼쪽 귀보다 0.3센티미터 낮다는 것을 나는 마흔셋에 처음 알았다. 영정사진을 고르면서. 
아버지는 평생 안경이 비뚤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안경 탓이 아니었는데. 
평생 아버지 얼굴만 보고 살았던 엄마는 아버지 귀가 짝짝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래 산다고 다 아는 것도 아니고, 안다고 다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 이유는 없다. 
그런데 본가 안방은 큼큼한 냄새가 베이고 어두침침하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너무 장수해서 그렇다. 그런 이유다. 

검색창에 '왜 사람은' 이라고 입력한다. 
자동완성이 뜬다. 0.3초도 안 걸린다. 
왜 사람은 잠을 자야 하나 
왜 사람은 늙는가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하나 
왜 사람은 외로운가 
왜 사람은 늙어도 지혜롭지 못한가 
자동완성이 뜨는 0.3초 내에 나는 묻고 싶었던 것을 잊어버렸다. 자동완성이 내 질문을 가져갔다. 아니면 원래 쓸모없는 질문이었거나.  

천수답 쌀농사는 힘들다, 
여름 가뭄에 명자 아버지는 팔촌 아재랑 물꼬를 두고 멱살재비를 했다. 
밭고랑에 앉아 수박 먹던 천수답 자리에 지금 편의점이 있다. 
나는 수박씨를 뱉던 그 자리 ㅡ 편의점으로 변한 곳에서 삼각김밥을 먹는다.

0.3초의 짧은 순간이 차곡차곡 포개져 공간 위에 쌓이는 방식이 재개발이다.
그래서 지금의 명자는 지 아버지처럼 악다구니 쓸 일이 없다. 천수답이 개발되어 그 땅값으로 빌딩을 올렸다. 
소설 '모래톱 이야기'의 황폐한 모래톱인 조마이섬은 군대가 차지해 버리고, 재개발의 이권은 커녕 갈밭새 영감이 감옥에 가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세상일이라는게 그냥 그렇다.  

오늘 버스에서 본 여자는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눈물을 흘리는지 그냥 멍하니 있는지 0.3초 만에 지나쳐버려서 알 수 없었다. 
0.3초. 그 여자의 이야기 전체가 0.3초 안에 있었다.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만날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아니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잠깐 스친 인연이 너무 가벼웠으니까.

아침에 켜놓고 끄지 않은 전등의 낮 시간 
오늘 먹은 편의점 삼각김밥 
홀로 마시는 맥주잔 거품속의 궁상스러웠던 청승 
다시는 오지 않을 늦은 밤 열한 시 오십구 분은 ㅡ

오늘 죽은 것들이고,

냉장고 소리에 붙인 이름, 윙 
알 수 없는 여자의 0.3초짜리 이야기 
왜 사람은 거짓말을 하나 
왜 사람은 늙어도 지혜롭지 못한가의 자동완성 검색어 
지금 끄적거리는 이 문장은  ㅡ

오늘 태어난 것들이다. 그냥 그렇다. 

언어가 없던 시절 인간은 무엇으로 슬펐을까. 슬프다는 단어 없이도 슬펐을 것이다. 그러니까 슬픔이 먼저고 언어가 나중이다. 
나는 가끔 언어가 생기기 이전의 감각으로 돌아가고 싶다. 말하기 전의 그 덩어리. 아직 아무 이름도 없는 것. 
이 글도 그것에 가까운 말하기 전의 무엇이고 싶었는데 결국 언어가 되었다. 
냉장고가 여전히 운다. 윙. 오늘 밤은 우우웅으로 들어도 괜찮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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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둘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지는해 옴마!
    얼마만에 듣는 고운 멘트인지 ~ ^
    긍정적인 시선 고마워요.
    이다지 고운 심성이시라니 저도 본 받겠습니다 ^^
    가끔 행간에 송곳 숨길때도 있는데 ~ 큰일 나것어유~
    구름 끼여 눅눅하니 수영장 가서 땀 뻬세요 ^^
  • 작성자마음자리 | 작성시간 26.06.08 제 어릴 때 큰형이 흑백 서부영화 보기를
    좋아했는데, 보고와서 해주는 이야기
    중에 이런 말이 기억에 남았어요.
    "게리쿠퍼는 0.3초, 버트랑카스트는 0.5초."
    건맨 배우들이 총을 뽑는데 걸리는
    시간이었답니다.
    그 이후로 0.3초란 말을 처음 듣습니다.
    언어로 표현되기 전의 감각적인 찰라의
    그 느낌, 저도 그 느낌에 머물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름을 가지기 전의 사물들,
    하늘 바람 나무 밤 풀 길... 수많은 말들,
    그 이름 이전의 느낌만으로 온전히 있는
    그들을 만나고 싶을 때가 많거든요.
  • 답댓글 작성자둘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그렇지요 이름 이전의 때묻지 않은 온전함
    그런대 우리는 이름으로 모두를 한정지워 버리지요
    그래서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르는게 더욱 많을거예요
    우리 삶의 많은 것이 짧은 순간 발생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타인을 끝내 다 알 수 없다는 것도 그런 뜻이겠고요. 고맙습니다. ^^
  • 작성자아녜스 | 작성시간 26.06.10 저는 왜 둘째님이 0.2초도 아니고 0.4초도 아닌 0.3로
    그 순간들을 표현했을지를 0.3초 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
    글을 참 잘 쓰시네요 .
  • 답댓글 작성자둘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0 너무 짧아서 붙잡을 수 없고
    지나가면 되돌릴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운 짦은 0.3초의 시간
    삶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0.3초의 파편들이 쌓여 만들어지고
    그런 사소한 순간들의 축적이라는 말이니 0.2나 0.4나 같은 의미로 볼수있겠네요. ~^^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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