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 담장 앞에서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길목,
우리 동네 아파트 담장에는 빨간 장미가 한창이다.
그냥 지나칠 때는
그저 꽃이 많이 피었구나 싶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꽃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다.
아직 단단히 입을 다문 몽우리도 있고,
막 붉은 속을 열기 시작한 꽃도 있고,
제 얼굴을 활짝 펼쳐 보인 꽃도 있고,
이미 바닥에 떨어져
제 빛을 조용히 내려놓은 꽃도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람 인생도
저 담장 위의 장미와 다르지 않구나.
태어나는 사람,
피어나는 사람,
한창 제 빛을 뽐내는 사람,
그리고 조용히 지는 사람.
한 담장 안에
사람의 평생이 순서대로 걸려 있었다.
요즘 들어 나이를 부쩍 느끼다 보니
그 장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크게 움켜쥔 것도 많지 않고,
남들 앞에 오래 내세울 만한 것도 별로 없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때 즐거웠던 순간들조차
지금은 모두 지나간 바람 같다.
젊은 날의 웃음도 지나갔고,
가슴 뛰던 일도 지나갔고,
밤새 뒤척이던 일도
이제는 흐릿한 그림자처럼 멀어졌다.
그렇다고
많이 가진 사람의 시간이
영원히 머무는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의 이름이
끝내 지지 않는 꽃으로 남는 것도 아닐 것이다.
가진 사람의 세월도 지나가고,
못 가진 사람의 세월도 지나간다.
잘난 사람의 하루도 저물고,
못난 사람의 하루도 저문다.
활짝 핀 장미라고
영원히 담장 위에 머물 수 없고,
먼저 떨어진 꽃잎이라고
유난히 억울한 것도 아닐 것이다.
꽃은 제 순서가 오면 피고,
제 시간이 지나면 떨어진다.
사람만이
피어 있을 때는 오래 피어 있을 줄 알고,
질 때가 가까워서야
모든 것이 잠깐이었다는 것을 안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것이 끝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또 어찌 보면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들고
그토록 애쓰며 살아온 내가
한심하기도 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그것이 인생의 본래 모습인지도 모른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완전히 허무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잠시 왔다가
잠시 마음 쓰고,
잠시 웃고,
잠시 무엇인가를 붙들고,
잠시 제 것인 줄 착각하다가
조용히 지나가는 일.
그러니 이제는
내 손에 남은 하루 하나를
조용히 들여다보며 살아도 되겠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인생이 하찮다는 뜻만은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조금 가볍게 살아도 되고,
아무것도 아니기에
끝까지 괴로워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다.
나는 떨어진 장미 꽃잎 하나를 보다가
발끝을 조용히 비켜 디뎠다.
피어 있는 꽃도 장미이고,
떨어진 꽃도 장미였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한때 피었으니 충분하고,
지금 조금 시들었어도
아직 내 안에 남은 빛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장미 담장 앞에서
나는 오래 서 있지 않았다.
다만 돌아서는 길에
마음 하나가 조금 가벼워졌다.
인생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오늘은 이상하게도
나를 조금 살려 주었다.
.........
링크 삭제합니다, 죄송
** 지난 번, 한 번 말씀 드린 것 같은데,링크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본문 끝에 알리고 싶은 것을,적어 넣으시면 어떻겠습니까.
훨씬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형평성을 생각하여...^^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장미를 보다가
사람 생각이 났는데,
선후배들과 냉면 한 그릇 나누러 가신다는 말씀을 보니
그 또한 피어 있는 인생 같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
작성자푸른비3 작성시간 26.06.10 모두 다 지나가노라.....
연연한 새 순도
활짝 핀 꽃잎도
곱게 물든 단풍도....
주어진 시간 동안 기쁘고 즐겁게 살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맞습니다.
새순도 지나가고,
꽃도 지나가고,
단풍도 지나가지만
그 계절을 살았던 마음은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주어진 시간,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자는 말씀에
저도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
작성자아녜스 작성시간 26.06.10 8월이면 5살이 되는 손자와 마른 장미꽃을 따는 놀이를
하였습니다 .
손자가 왜 꽃이 말랐냐고 묻길래 꽃이 죽은것이라고 했습니다 .
왜 죽었냐고 묻기에
다른 새꽃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 하기에 그런다고 말 했지요.
어렴풋이 '죽음'이 슬프다는것을 아는 손자도
그말을 해줬더니 바로 얼굴이 환해지더군요 . -
답댓글 작성자탁구시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참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마른 꽃이 슬픈 것이 아니라
새 꽃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라는 말씀에
저도 마음이 환해졌습니다.
손자의 질문도 예쁘고,
그 질문에 답해 주신 마음은 더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