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떠졌다. 알람이 깨웠다. 백색의 천장이 멀어 보였다, 그러고도 한동안 누워 있었다.
수영장 물은 차갑다.
매번 차가웠다. 몇 년이 지나도 그 차가움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것 하나뿐인 것 같아서 좋다.
물속에 있는 동안은 아무런 생각이 없다. 팔과 다리와 가쁜 숨만 있다.
내가 매일 이 소독냄새 심한 수영장에 오는 이유다.
마트를 지나쳤다.
복숭아가 쌓여 있었다. 노랗고 삘간 것과 흰 것. 잠깐 섰다가 그냥 걸었다.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요즘은 음식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먹고 싶은 것이 없어진다는 것이 편한 것인지 걱정스러운 것인지, 잠깐 생각했다. 걱정스럽다는 쪽이다.
먹고 싶다는 욕망이 사라진다는 것은 무언가 꺼져가는 신호일까, 확인하고 싶지 않아서 생각 않기로 했다.
시장을 언제 갔는지 지난주였던가, 냉장고가 비어도 기억이 없다.
식구ㅡ 밥을 함께 먹는 사람. 조금 서글펐다.
오후에 옷장 정리를 시작했다.
낡은 옷을 버릴 봉투에 넣었다. 서랍을 열다가 멈췄다. 작은 천 주머니. 어머니 것이다.
주머니 속에는 어머니가 평생 끼고 다니시던 금가락지가 있다. 손바닥에 올려놓으니 가볍고 작았다.
이것을 끼고 내 머리를 빗겨 주셨다. 그 손이 지금 없다. 눈이 뜨거워졌다가 가라앉았다.
아쉬웠다. 그 아쉬움 닿을 곳 없는 마음이 제일 무거웠다. 가락지를 천 주머니에 다시 넣고 한동안 손에 쥐고 있었다.
바로 밑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어금니가 말썽이라 치과 간다고. 잘 다녀오라고 했다.
언니는 오늘 뭐 해? 그냥 있어. 그냥 있으면 안 되지, 뭐라도 해야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오늘만이 아니다. 요즘 매일 그랬다.
많은 시간은 은퇴 전에는 꿈같은 일이었는데 막상 그랗게 되고보니 보람 있게 써야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었다.
결국 시간이 그냥 지나갔다.
채 오 분이 지나지 않아 넷째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가 무겁고 젖어 있다.
딸이 남자친구와 헤어지기로 했다고. 성질이 난폭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고. 몇 년을 사귀었는데.
위로를 해야 하지만 다른 말이 먼저 나왔다.
몇 년을 사귀었고 가을에 식 올려야 한다더니 이제야 알았다는 게 말이 되냐. 그동안 뭘 봤던 거야.
여동생이 조용해졌다. 말이 날카로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주워 담지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틀리지 않은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사람됨됨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몇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니.
여동생이 속상해서 전화한 건데, 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했다.
전화가 끊겼다.
저녁, 책 두어페이지를 읽다 그만 덮었다.
'새는 휘파람소리로 날다' 에 실린 조ㅇ무의 2004년 시 총평으로
이렇게 관습적이며 평면적으로 장황하게 시평을 할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냉장고에 달걀 세 개와 두부 반 모가 있다.
두부를 잘라 소금에 찍어 먹었다.
창밖을 보았더니 구름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다.
윗집인지 옆집인지 왁자지껄 웃는 소리가 간간히 터져나왔고. 아래윗집 모두 조용한 사람들일텐데 그럼 옆집인가.
창밖을 벗어나는 웃움소리로 하루를 마감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겠구나,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 하루 수영을 했고 복숭아를 사지 않았고 옷장을 정리하다 멈췄다. 두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위로를 못 했다. 두부를 먹었다.
대단한 것이 없었다. 보람 있는 것도 없었다.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서글픔과 그리움과 아쉬움과 핀잔과 두부와 가락지. 그런 것들을 거스르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것. 저항하지 않고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삶인지 체념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아마 그 경계쯤에 오늘 하루가 있었을 것이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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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라 작성시간 26.06.09 어제 누군가가 묻더라고요.
요즘 어찌 지내냐고.
그래서 그랬지요.
맨날 그날이 그날이라고 ㅋㅋㅋ
그런데 구체적으로 보면
날마다 다른 날이기는 해요.
어쩌면 무탈하게 잘 지냈다는 의미로
그날이 그날 같지만요.
어제는 제가 주문했던 독일 명품
빌레로이앤보흐 접시가 왔어요.
식탁위에 늘어놓고 좋아서 방글방글 웃었지요.
그리고 6인 세트로 구매할까
행복한 고민을 하고요.
작은 그림 하나가 주는 그 설레임이란
말로 표현 못하지요.이미지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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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둘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맨날 그날 그날이 더할나이 없이 행복한 때였다는 걸 지나고 보면 깨닫게 되니 아쉬워요,
마음에 꼭 드는 접시에 맛있는 요리 듬뿍 담아 가족과 함께 정겨운 시간 되세요 ~ ^^ -
작성자아녜스 작성시간 26.06.10 저는 오늘 하루종일 딸네집에가서 손자들 봐주고
냉장고 청소도 해주고 ,오븐도 닦아주고 ...
힘든 하루였습니다 .
저도 가끔 둘째님의 하루같은 날들을 보내기도 하지요 . -
답댓글 작성자둘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0 힘들게 몸을 움직일수 있으니 좋은 일이예요.
이글은, 특별히 할일이 없는 무료함
은퇴 이후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과 공허함, 상실, 관계의 피로, 그리고 체념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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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 아 작성시간 26.06.14 어쩌다 여기까지와서
둘째님 글접하고
읽었으므로 인사합니다 ㅎ
저는 쭉 전업주부로 살아서 늘 그날이 그날같지만
또 그날은 그날
오늘은 오늘로 새롭기도 합니다
탈없이 흘러간 하루가 이제는 감사하네요
딸부잣집이라 좋건 싫건
전화가 온다는게 저는 부럽습니다
자매가 없어 제 전화기는 조용하거든요
오늘도 평온과 즐거움이 있는 휴일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