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현에서 우금치로
언덕저편 님이 정읍 답사기를 올렸다.
전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숨결을 찾고
정읍 황토현의 동학농민혁명 현장을 찾았던 모양이다.
나는 좋은 나들이를 했다고 화답했지만
나도 오래 전에 황토현에 이어 우금치를 답사했기에
지난 날의 글을 아래에 붙여본다.
사진이 좀 많지만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민족정기를 깨우치는 두 현장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금치
우금치 현장에서 / 김 난 석
충남 공주의 금학동 남녘 끝에 우금치가 있다.
예전엔 고개가 험하고 도둑이 심해서 저물녘이면
소를 끌고 오르지 말라 해서 우금치(牛禁峙)라 했다 한다.
그 고개를 넘어야 공주에서 논산과 부여로 통하고,
또 부여와 논산에서 그 고개를 넘어야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그곳에 가면 나는 울음을 금치 못한다.
나에겐 그래서 그곳이 <울금치>이다.
그건 소를 잃고 외양간을 고쳐야 하는 설움 때문이 아니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놓인 등불인 때에
사방에서 무슨 바람이 불어오는지도 모른 채
그 바람까지 불러들여 등불을 무참히 꺼버리고 말았기에
금치 못하는 울음인 것이다.
등불 앞의 바람은 나라요,
바람 앞의 등불은 반봉건과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의 숭고한 횃불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서로 사는 상생이 아니라
서로 죽이는 상쇄의 형국이었던 것인데,
외세의 바람까지 불러들였으니
그 숭고한 횃불이 어찌 들불처럼 번져나갈 수 있었으랴.
관군에 청군과 일군을 불러 드리고,
거기에 대원군까지 끼어들어
불빛을 덮는 암흑을 초래했던 것이다.
1894년 1월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불행하게도 그해 11월 9일, 우금치에서 종말을 맞고 만다.
전봉준과 손병희가 이끌던 혁명군의 남접,
북접이 논산에서 합류해
이인, 효포, 웅치 등지에서 관군을 밀쳐 내고
우금치까지 접근했으나
현대식 총포로 무장한 일군에 밀려
50여 차례나 밀고 밀리는 격전 끝에
모두 희생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를 일러 지금도 죽을 줄도 모르고 역경을 넘고 또 넘는 것을
<우금치현상>이라 한다지만,
참혹해도 너무 참혹했던 순간이요 현장이기에
그곳에 가면 울음을 금치 못하는 것이다.
최초 고부에서 발단되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숭고한 혁명운동은
관군과 일군에 의해 미완에 그쳤지만
그 정신만은 민중 속에 이어지고 있으니,
1973년 11월엔 천도교 공주교구에서 이곳에
동학혁명군위령탑을 세워 추모하고 있다.
팔월의 끝자락, 그 현장엔 잡초와 더불어
녹두꽃도 노랗게 피어나고 있는데,
오늘은 8월 29일, 경술국치의 그날이다.
동학혁명을 잘 다스렸더라면 그날이 있었겠는가.
이젠 울음의 현장이 아닌 숭고한 얼의 본거지로
되새기고 또 되새겨 자존을 확고히 해야 할 때다.
2015년 8월 29일, 경술국치의 날에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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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석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1 여하튼 역사는 가정법이 없다니
교훈으로만 삼아야지요. -
작성자흐니1 작성시간 26.06.11 73년도에 부산에서 우금치 답사를 갔는데 대중교통편도 제대로 연결이 안돼서 엄청 고생하고 이정표도 없는 깡시골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금치 고갯마루가 사진에서 보이는 초록 비탈인 듯 하네요. -
답댓글 작성자석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1 그땐 그냥 사람도 통행하지않던 고개였지요.
제가 60년도에 공주에서 학교다녔는데
인적이 접근도 안했어요. -
작성자지언 작성시간 26.06.12 사건.연도.
모두 외우시는지요?
석촌님은 천재이실 거란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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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석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2 천재는 요 뭘요.ㅎ
워낙 큰 역사의 변곡점 이었으니까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