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신록보다도 더 싱싱했던
내 청춘시절의 이야기다.
설문지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설문지 뭉치를 들고 모대학교에
설문지 조사를 하러 갔는데
벤치에 나무늘보처럼 앉아있는
복학생이 눈에 띈다.
군대용 야상을 입은 걸로 보아
남의 야상을 빌려 입지 않은 한
얼굴은 어려 보였지만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이 틀림없다.
그 복학생에게 용기를 내어 설문지 조사에
응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대뜸
아가씨, 우리 학교 학생 아니지? 하고 물어본다.
(속으로 흥! 어따대구 초면에 반말이야?)
째려보았더니 눈치를 챘는지 그다음부턴
존댓말을 한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다른 여대생들 옷 입은 것 좀 보고 배워요.
요즘 때가 어느 땐데
차이나 칼라에 360도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다니냐며 땀띠 나게 싸매고 다니지 말라 한다.
속으로 그쪽도 만만치 않거든요.
그 야상이나 벗어던지세요!! 엄청 더워 보여요!!
그리고 남이사 한복을 입고 다니던
360도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다니던
그쪽이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틀어막았다.
상대는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이고
나는 다양한 아르바이트로 사회 경험이 풍부한
나름 인생 경험자이다.
둘 다 얼마나 사연이 많고 할 말이 많겠는가
허지만 지금은 상대방의 말을 들어줘야 할 때다.
쓸데없는 논쟁으로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말아야 한다.
설문지 조사에 많이 응해줄 수 있는 곳을
소개해줄 테니 자기 얘기를 좀 들어달라고 한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진지하게 경청을 하고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반응을 해주어야 한다.
거기다 재밌는 얘기를 하면 웃어주기도 해야 한다.
반응도 없고
재밌는 얘기를 해줘도 웃지도 않는다면
누가 말을 하고 싶겠는가!
그렇다고 주책바가지처럼
쓸데없이 오버하고 아무 때나 웃으라는 건 아니다.
사람들은 남의 말을 듣는 것보다
자기 얘기를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어쨌든 설문지 조사에 많이 응해줄 수 있는 곳을
소개해준다는데 까짓 거 들어주지 뭐!
그의 얘기를 끝까지 다 들으면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그의 삶의 여정에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그의 얘기엔
삶의 진실함과 성실함이 진액처럼 묻어났다.
얘기가 다 끝나자
자! 이제 설문지 조사 하러 같이 갑시다.
내가 이래 봬도 발이 넓어요.
처음엔 못 봤는데, 맨발이다.
양말도 안 신고 슬리퍼 차림이다.
설문지 조사가 다 끝나자 제법 진지한 어투로
저기, 아까 내가 옷 입은 거에 대해 말한 건
농담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다음 주 화요일 학교 앞 카페에서
모임이 있는데 오실래요? 한다.
예술과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토론도 하고, 비주류인 데다, 간식도 주고
설문지 조사도 응해줄 사람 많아요.
이것도 인연인데.....
그냥 헤어지기엔 왠지 아쉽고
아가씨가 강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있네.
하며 배시시 웃는다.
저기요, 궁금한 게 있는데
왜?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다녀요?
혹시 무좀 있어요? 했더니
야!! 천잰데...하며 빙그레 웃는다.
그가 설마 말할 사람이 없어서 처음 본 여자한테
그렇게 속사포처럼 떠들어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봤을 때 그는 사교적이고 인맥도 넓은 것 같고
유모 감각도 있고 성격도 호탕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싶을 만큼
신뢰가 가는 사람이 없었으리라.
그래서 모르는 사람한테 그냥 말을 하고 싶었으리라.
오래전 내 젊은 날에 있었던 이 일을 생각하며
우리가 갈망하고 굶주려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많은데 진심으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가끔은 어떤 말을 해도 부담이 없는
자유로운 대화 상대자를 찾으며
진실한 대화에 목말라하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의 욕구 중
성욕, 식욕, 수면욕만큼이나 강한 욕구가
글쓰기 욕구와 수다욕구인 것 같다.
무엇인가를 계속 쓰고 싶고
누군가와 속내를 털어놓고 말하고 싶은 욕구말이다.
허지만 욕망은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갈증을 느끼고 쉽게 권태를 느끼게 된다.
욕망은 조절하고 적절하게 분산할 때
더 큰 쾌락이 오는 법이다.
욕망에 올인하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쾌락은 쾌락의 정점이 아니라
쾌락에 이르는 과정인 것 같다.
무조건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뒤도 보고, 옆도 보면서
천천히 즐기면서 음미하는 쾌락이야말로
최고의 쾌락이 아닌가 싶다.
일회용 반창고처럼 한번 쓰고 버려지는
즐거움이 아니라
구수한 숭늉처럼, 진한 커피 향처럼
여운과 향기가 오래 남아 시간이 흘러도
마음을 설레게 해 주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정으로 멋진 쾌락인 것 같다.
댓글
댓글 리스트-
답댓글 작성자삶의지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4 new
하고 싶은 말하고
듣고 싶은 말 듣고
들어야 할 말 들으면서
살 수 있다면
사람 냄새나는 세상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작성자최성원 작성시간 26.06.24 new
저는 삶의지혜 님 글을 3번도 더 읽었네요.ㅎㅎㅎ...
늘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정확히 청춘의 끓는 피가 흐를 때 우리나라 남성들은 군대를 가니까 개인적으로도 아픈 기억이 더 많았답니다.
씩씩한 남자처럼 사실 수 있는 삶의지혜 님은 분명 대단한 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답댓글 작성자삶의지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4 new
아공~무쟈게 감사합니다.
군대를 가야 하는 우리나라
남성들의 고충
겪어보진 않았지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가 그렇겠지만
저는 씩씩하게 사는 걸
좋아합니다.
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당당하고 멋지게 살고 싶습니다.
하루하루가 보석같이
소중한 시간들이기에
늘 변신을 꿈 꾸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또한, 변해야 할 때와
변하지 말아야 할 때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이기에
삶의 조화와 균형에
어긋나지 않게
한쪽으로 치우 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삶의지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4 new
삶의지혜
무엇을 하든지 건강이
기본이기에
몸에 좋은 음식도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고
무엇보다
충분한 수면 시간을
확보하려고 잘 자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최성원 님도 잘 주무시고
건강 관리 잘하셔서
늘 행복과 평화가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
작성자최성원 작성시간 06:49 new
말씀처럼 건강이 기본이지요.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저도 충분한 수면을 취하려고 노력 중인데 말처럼 쉽지 않아서
수면시간이 오르락 내리락하고 있습니다.
삶의지혜 님도 늘 건강하시고 언제나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