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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만만한 여자

작성자굽은솔|작성시간13.09.27|조회수99 목록 댓글 2

집사람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가 오갔다.

" 서른이 넘도록 장가를 못 간 이유가 뭔가요?"

" 그야, 만만한 여자가 없어서.....!"

" 만만한 여자라니요?"

"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여자!"

" 요새 그런 여자가 어디 있어요?"

" 글쎄요!.....! "

 

몇 번 더 만남이 이어진 후 집사람이 말했다.

" 어차피 여자는 남자 따라 사는 게 아니던가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전부 다 하겠다는 확고한 선언이었다.

더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내 나이가 많음을 고려, 조기 결혼에도 선선히 동의했다.

4/8 만남, 6/17 약혼, 11/11 결혼, 같은 해에 일사천리로 모두 해치웠다.

31세 남, 23세 여, 8년차의 커플이 하나 새로 생긴 것이다.

 

몇 년 세월이 흘러 좋은 시절이 끝나갈 무렵.

집사람과 대판 싸웠다.

내가 네 살 박이 딸아일 데리고 앉아 심각하게 말했다.

" 애야! 저 못된 엄마를 쫓아내버릴까?"

" 아빠, 그러지 말고 우리가 쫓겨 나가자, 우리 가게 집에 가자 응!"

어린아이 눈에 쫓겨나야 할 사람이 엄마가 아니고 아빠라고 비친 것이다.

 

어느 땐가

내가 집사람을 장난삼아 " 정경부인!" 하고 불렀다.

옆의 중 3 아들 녀석이 듣고 "정경부인이라니요?" 했다.

" 임마! 대감부인이 정경부인이지 뭐야?"

" 에게게! 그럼 아빠가 대감이란 말예요?"

녀석 말이 엄마는 정경부인이라 해도 되지만

아빠가 대감으로 격상되는 건 당치않다는 것이였다.

 

애들이 사물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있는 사실 그대로에 절대로 편견을 가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마와의 크고 작은 쟁투에서

언제나 패배자가 아버지라는 걸 국제심판처럼 꿰뚫어 본다.

언제나 주도권을 쥔 쪽은 엄마이고

고분고분 따르는 쪽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횃불처럼 환히 알고 있다.

 

집사람은 결코 왈가닥이 아니다.

원래 착하고 순한 성격 그대로이다.

다홍치마 때나 지금이나

신장도, 체중도, 식성도, 말투도, 서체도, 영어 실력도, 심지어는 애창

곡까지도 뭐 특별히 달라진 것이 없다.

본디의 여성적 요소 80프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입속의 혀. 물통 속의 바가지, 손에 든 스마트 폰, 알라딘의 램프와 같은

서비스의 화신이 돼주기를 바라는 나의 황당무계(?)한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진일 마른일 안 가리고, 종종걸음을 친다. 나의 천부적인 게으름에

하느라 날마다 수고가 많다.

 

집사람은 내게 바가질 긁지 않는다.

집사람은 내게 주먹을 날리지 않는다.

집사람은 나의 목을 조르지 않는다.

집사람은 결코 내게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애초에 날 이기려는 어떤 불순한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도무지 나와의 쟁투에는 관심조차 없다.

세월이 흐르듯 차근히,

물이 흐르듯 순리대로

그냥 저냥 조용히 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난 집사람에게 꼼짝 못한다.

애들이 본 그대로이다.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 아마도 허니문이 지난 직후부터 )

집사람이 시키는 대로 찍 소리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고양이 앞에 쥐,

뱀 앞에 개구리,

사자 앞에 사슴처럼.....!

 

나는

내가 시키는 대로 순종할 만만한 여자가 아니라

되레 내가 고분고분 따를 무서운 여자를 얻은 셈이다.

 

나는 날이면 날마다

집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간다.

삼식이가 된 뒤로 이 증상은 더욱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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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끌레도르 | 작성시간 13.09.27 ㅎ~ 그러니까 '삼식이 대감님의 무서운 정경부인'이시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굽은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9.27 저는 여전히 대감이 아닙니다.
    집사람 역시 정경부인 윤허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하하!
    그저 소시민이 살아가는 평범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요.
    부인을 여왕으로 자신은 노예로 설정하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노예가 여왕과 동침하는 재미는 안 겪어본 사람은 잘 모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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