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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현스님의 글법문

이 뭣고(이게 뭐냐)?

작성자맑음|작성시간15.03.21|조회수855 목록 댓글 5

 

 

 

 

이 뭣고(이게 뭐냐)?

중생들이 무엇인가를 믿고 알고 행하는 것들은 흔히 무지의 소산일 뿐이고 그 자체가 중생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세 가지 정도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셨다.

자작(自作), 타작(他作), 자타작(自他作)이 그것이다.

자작은 모든 것을 내가 한다고 믿는 것이며, 타작은 어딘가에 초월자가 있어 그 의지대로 모든 것이 되어간다고 믿는 것, 그리고 자타작은 자작과 타작이 합하고 교차하며 모든 일이 이루어져간다는 믿음이다.​

먼저 자작(自作)에 대해 살펴보자.

우리는 살면서 많은 부분,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행하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다. 손발과 자신의 육신을 움직여 별별 일들을 하고, 온갖 좋고 나쁜 그른 말들을 하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갖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일으킨다. 이때, 의식의 저변에는 '이 모든 것들을 내가 하고 있다'는 인식이 바탕처럼 깔려있다. 이런 인식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일정 부분은 지극히 인간적이고 정직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는 한, 중생은 그 업과 업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행하는 느낌이 있다면 그 결과 역시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자작자수(自作自受), 즉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그 연속되는 과정으로부터 결코 숙명적으로 벗어날 수 없게 되고 만다.

또, 조금만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면, 내 안팎에 내 의지와 관계없고 심지어 나의 존재와도 관계없어 보이는 무수한 일들이 항상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저 바람에 하늘거리는 품의 움직임은 내 의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의도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여린 풀잎은 전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이 광막한 우주의 모든 일을 생각하면 먼지 같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가? 그렇다면 당연히 의문이 들지 않겠는가? 어떻게 모든 것이 내가 벌이는 일이라고, 내 탓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자작이 아니면, 그럼 타작(他作)이 옳을까?

타작은 개체의식을 가진 세상의 온갖 개아들 밖에서 다른 누군가가 이 모든 것을 섭리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의도 하지 않은 어떤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 역시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무지의 베일 밖에서 세상 모든 일을 관장하고 있는 어떤 존재가 있으리라고 쉽게 상정(想定)하곤 한다. 대개 그런 것의 명칭을 '신'이라고 한다. 이런 믿음에 사로잡혀서 보면, 심지어 스스로 의지를 내어서 행동하는 것까지도 신의 뜻에 따라 그렇게 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스스로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는데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배후에 나의 창조자로서 그 '누군가'가 있다고 강하게 믿게 되는데, 그런 소견을 가리켜 타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소위 유신론이라 부르는 입장이다.

그런데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그 누구도 절대자를, 주재자를 본 일이 없다. 다만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관점 혹은 견해에 불과하는 말이다. 신 스스로도 당당하게 그 존재를 모든 사람이 의심할 수 없게 나타내어 보이지 않고, 그런 신의 계시를 받거나 신의 존재를 확신한다는 그 어떤 사람도 그런 인격신의 존재를 완전히 증명하지 못한다.

또한 이런 견해로는 이 세상에 자명한 도덕률을 세우지도 못하며, 사람이 생사의 근원적 고통으로부터 자기노력을 통해 벗어나는 길 또한 제시할 수 없게 된다.

외부의 어떤 존재가 온 세계를 주재한다고 믿는 타작의 입장마저 긍정할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자타작(自他作)이다. 어떤 것은 내가 행하지만, 그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립적 견해 혹은 절충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자타작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작도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고 타작도 믿을 수 없고 온당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타작은 부족한 두 가지의 불완전한 결합일 뿐이지 결코 완전한 진리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진리일까? 이것은 종교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자 우리 삶에서도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부분이기에 우리가 그것을 여실하게 규명하려는 작업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런 시도를 포기한다면 진리는 영원히 베일에 덮여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체로 남아있게 될 것이며 우리이 생사고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주 닫히고 만다.

무엇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을까? 그 사실만 깨달으면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의문을 해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존재계의 가장 궁극적인 가치를 실현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이것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무지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오늘도 고통 속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다면, 그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필시 무엇이 이것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음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자작, 타작, 자타작에 대해서는 옳지 못한 소견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렇다면 무엇이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 불법인가에 대해서는 될수록 설명을 피하려고 하셨다. 그것은 말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아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간혹 외도들이 부처님께 찾아와서 이러한 문제로 논쟁을 벌이려고 했으나, 부처님께서 이런 외도들의 질문에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무기無記'의 태도를 취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분명히 진리가 진리로서 존재하고 우리 생사고의 소멸이 그로부터 가능하다 해도, 말로 그것을 설명하거나 논쟁을 통하여 시비를 가리려고 드는 태도는 실지로 그것을 증득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식지 法華법화 2015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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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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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원경화 | 작성시간 15.03.21 오랜만에 법당안이 꽉차고 거실에서 듣는 스님의 법문...그리고 한순간 삼매에 빠진듯한 금강경독송...
    또..그리고......
    차담 시간.......
    많은분들이 돌아오는 길...
    보살님들 얼굴 얼굴에 "法花"가 활짝....

    말로 하기 부끄럽지만
    "두분의 스님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도널드사슴 | 작성시간 15.03.22 말로 표현 안된 그 뭔가의 감동...이게 뭔가 했더니 바로 "법화"였군요.
  • 작성자법화림 | 작성시간 15.03.22 밝은 얼굴로 만난 두 분 반가웠습니다 ^^
  • 작성자heidy | 작성시간 15.03.23 법화를 보려 합니다. 참스승의 그림자라도 따라 가고 싶습니다. 선지식을 향하는 마음, 표현할 수 없어 "지극한 말은 말 없음" 으로 대신합니다.
  • 작성자回圓 | 작성시간 15.12.02 늘 의문을 가지고 무엇이 하고 있는지 한 걸음 한걸음 찾아 나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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