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화택(火宅)이요 고통의 도가니다. 이 세상 안에 집을 짓는 일은 따라서 영원한 안락을 찾아 길을 나선 수행자의 일이 아니다. 세상의 작고 덧없는 즐거움들은 아무리 끌어 모은다 해도 영원하고 완전한 기쁨이 되지 않으니 열반을 찾는 나그네들은 발심출가(發心出家)하여 집착과 얽매임의 집에서 벗어나 구도의 길을 나서야 하고 위대한 포기를 해야 하고 버리고 떠나기를 감행해야 한다.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지수화풍(地水火風)으로 된 집을 짓고 있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草廬) 삼간(三間) 지어내니
나 한 간, 달 한 간에 청풍 한 간 맡겨두고
청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옛 사람의 이 멋진 풍류를 떠올리면 문득 근사한 거처를 하나 마련하는 일이 매우 낭만적이고 가슴 부푸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인간이라는 복잡한 동물의 주거시설은 어디 까치집처럼 나뭇가지나 주워다 얼기설기 걸쳐 놓으면 되는 것도 아니고 몸뚱이와 함께 덤으로 저절로 생겨 자라나는 조개껍질 같은 것은 더욱 아니고 설계나 측량도 없이 건축자재를 외부에서 조달할 필요도 없이 한 순간도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불과 한 시간 안에 지어낼 수 있는 거미집 같은 것이 전혀 아니다. 시간 버리고 돈 버리고 성질 버리고 짓다가 내가 죽을 어떤 때는 짓고 나서 살아보지도 못하는 웬수덩이다.
나는 출가 전 얼마 동안을 건축 공사장에서 남의 집 짓는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출가한 이후에도 매우 여러 번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짓는 일을 해야 했다. 집 떠나와 출가한 사람이 또 자꾸 집을 지어야 하는 운명도 아리러니컬하지만 집 하나 지으면 너무 고생스러워 목숨이 십 년은 줄어든다는데 이렇게 번번이 집을 짓고도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내가 본래 고생고생하면서도 아주 오래 살도록 되어 있는 매우 불행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집이란 자기 한 몸이나 뉘이고 무슨 영화를 한 오백 년 누리자고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미 소싯적에 알았다. 그것은 석굴암을 조성하고 에밀레종을 만들듯이 최소한 무굴제국의 황제 사자한이 열 네 번째 아이를 낳다 죽은 왕비에게 다하지 못한 사랑이 너무 큰 나머지 나라가 망하는 것을 무릎쓰고 지은 왕비의 무덤 타지마할처럼 그렇게 숭고하고 비장하게 생겨나거나 무수한 생명과 자원을 희생시켜가며 억지로 억지로 만든 만리장성처럼 그처럼 비참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요새 큰 빌딩 같은 큰 건물 하나만 지으려 해도 그 공정이 진행되는 도중에 사람 하나 둘 죽을 것은 미리 예상하고 그 재해 보상금을 아예 건축예산에 넣어 잡는다고 한다. 막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집을 짓는 일을 하다 보면 인간이 왜 이렇게 수고롭게 살아야 하는지 새삼스레 서글픈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극락세계에선 사람이 연꽃 속에 화현(化現)하고 그 맑고 향기로운 연꽃이 아침이면 새로 피고 저녁이면 꽃잎지붕이 닫히는 집이 된다는데 아프리카 같은 데선 거대한 바오밥나무 고목 밑둥치의 구멍에 사람이 무상으로 그냥 들어가 살면 된다는데…….
불교 초기 교단의 수행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거의 무소유(無所有)로 떠돌면서 하루 한 끼 탁발한 음식을 먹고 나무 밑에서 자되 한 나무 밑에서 사흘 이상 머물지 않는 생활을 이어갔다. 물론 큰 인욕심과 지족(脂足)의 정신 그리고 고통에 가득찬 세상에서 벗어나 치열한 발보리심으로 대도(大道)를 구하고 일체 중생을 고해(苦海)에서 건지려는 원력에 의지한 수행자들에겐 그 유행주의(流行主義)가 집에서 사는 안일과 무각성(無覺聲)의 늪보다 오히려 훨씬 완전하고 생동감 넘치는 수행의 장 진정한 도량(道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출가자가 늘어나고 교화권이 커지자 교단은 가장 높고 순수한 원형만을 고수할 수 없게 되어 갔다. 때맞추어 이 세상 진리의 고귀함과 그것을 찾고 전해주는 수행자들의 고마움 그리고 그 수행 터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 불자들이 하나둘씩 물심양면의 노력을 바쳐 가람을 지어 승단에 바쳤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엔 많이 무색해져 가지만 이 세상에서 부처님 도량이 생겨나 몇 천 년을 이어져 가는 연원이며 가람의 존재이유이다.
나는 도량의 꿈을 가졌다. 불문(佛門)의 가람은 누구나 거기 오면 부처가 되기 위해 제 마음을 찾는 자고로 선불장(選佛場)이어야 한다. 어찌 변변찮은 중들의 사유화된 집구석, 복을 팔아 덩치만 자꾸 키워가는 장판이 될 수 있겠는가? 화려한 전각 수려한 풍광이 눈요기감이 되고 속세의 혼탁한 놀음을 더 근사하게 즐기는 명소 따위나 되고 만다면 심신이 다 지쳐가는 사람들은 이제 어디 가서 이 암담한 동굴의 출구를 찾을 것인가? 어느 가난한 숲속의 고고한 수행자는 아주 초라한 토굴을 하나 지어 살면서도 이렇게 자조(自嘲)했다.
주워 모으면 일간(一間)의 초옥(草屋)
풀어 흩으면 본래의 들판이어라
마음대로 이것저것 끌어 모아서
내 것이라 집착하는 어리석은 짓이여
솔직히 말하면, 이번에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실제의 집을 짓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이미 지어 놓은 집에 살면서, 그 뒷마무리를 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일하는 수고로움을 알기에, 나는 될수록 말이나 손짓 등으로 남을 일 시켜 무엇인가를 해 놓고 마치 자기가 한 것 처럼 생색내는 사람이 되지 않으려 했고, 할 수 있는 것은 가능한 한 직접 나서서 하는 편이었지만, 사실 이 집처럼 남의 손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고, 또 이렇게나 큰돈을 들여 쉽게 후딱후딱 지어보기는 처음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진심 어린 도움과 지원 속에서, 나를 대신한 다른 이들의 고통을 거쳐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일은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축대 쌓고 땅 고르고 이리 저리 주변정리 하고 단장하는 일이 왜 그리도 많은지, 일은 단박에 잘 되지 않고, 숙련된 일손은 부족하고, 이러저리 들려오는 복잡한 소식들에 힘빠지고, 멧돼지 같은 녀석들과 싸우고, 행사일정에 쫓기고 비소식에 쫓기다, 마침내 태풍이 몰고 온 비가 연일 퍼부으니 여기가 터지고 저기가 물러나고, 온통 축대의 흙이 흐물흐물 곤죽이 되어 자꾸 어딘가로 흘러가려고 한다.
아, 지수화풍에 의지하여 살아가기가 왜 이다지도 힘들까. 물러서지 않으면 결국 되긴 되겠지. 죽지 않으면 살긴 살겠지. 그렇지만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연못이라고 막아놓은 논에 넘칠 듯 넘칠 듯 하염없이 밀려드는 흙탕물을 보며 나는 저 캄보디아의 흙탕물 호수 톤레샵에서 수상가옥(水上家屋)을 짓고 살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얼마나 깊은지 속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흙물 위에 보기에도 조금 어리럼증이 날 것처럼 떠 있는 집들.
그래도 그들은 그 동물 우리 같은 어설픈 공간에서 더러 평생을 살아가며 가끔 축제를 벌이기도 하고 장사도 하고 화분에 식물을 키우기도 하고 심지어 돼지를 치기도 했다.
그렇지 산다는 건 그런 거였지. 나는 다시 고사(古士)의 정갈한 방에서 듣는 여운 깊은 물소리 바람소리 대신 지겨운 논둑가의 물소리 개구리 소리를 베개 삼고 누워 다시 흙탕물 묻은 꿈을 꾼다. 저 아직 푸르러지지도 않은 초원 위에 이렇게 그림에도 없는 집을 짓고 난 도대체 누구랑 살아볼까?
이미 인생의 많은 날들을 살아왔고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훨씬 적을 테니 부디 이것이 금생에 내가 짓는 마지막 집이 되기를…. 하여 이것이 누군가를 위해 짓고 누군가에게 바치는 집이라면 그 누구는 바라건대 이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한다.
거창한 무엇인가를 찾아
어딘가로 허겁지겁 떠나려 하는 사람보다
가만히 있어도 인생은 빈 여행길임을 알고
그 중심에 고요한 휴식이 있는 사람
마치 침묵의 나무그늘처럼
지친 나그네를 땀 들이고 쉬게 하는 사람
번지르르하고 장황한 말을 늘어놓기보다
한번 멋진 미소를 날려
열린 가슴 사이로 따뜻한 바람이 불게 하는 사람
열매를 너무 탐내지 않고
진정 꽃답지만 스스로 꽃 대신 꽃대가 되어도 좋고
진흙탕에 더 깊이 내리는 뿌리여도 좋다고 여기는 사람
소유와 쟁취에 서툴고 더딜지라도
다 주고 남은 것을 슬기롭게 쓰고
결핍을 함께 아파하는 사람
누가 뭘 잘 하면 함께 즐거워할 줄 알지만
너무 잘 하기를 채근하지 않으며
자기가 뭘 못해도 그냥 함께 괜찮은 사람
생각해보면 모래성 쌓기 같은 이런 덧없고 시시한 일에도 선뜻 동참하여
서툴러도 기쁘게 일하며
일할 때 얼굴이 빛나는 사람
썩 좋은 길이 아니어도 바로 나와 함께 가는 것을 좋아라 하는
길이 틀려서 되돌아오는 동안에 오히려 한 번 더 손잡아주는
다시 길 찾고 있을 때
자기가 아는 길을 우월감 없이 될수록 표시 안 나게 가르쳐주는
그냥 동행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스승인 사람
너무 멋진 동행 속에서
목적지와 방향조차 별 의미 없어지게 하는
그리하여 이 생사의 포행길에서
마침내 그를 위해
천하를 버리게 되는 사람
나를 잊게 하는 사람, 죽여주는 사람.
젠장 오늘밤은 욕심이 과했나 보다, 정신 차리고 자야지.
그래도 그런 사람 있으면… 여기 와서 함께 손 잡고 잤으면 좋겠다.
심신이 이렇게 고단한 날엔….
소식지 法華법화 2011 / 8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통찰 작성시간 15.11.02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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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여실행~* 작성시간 15.11.02 스님 ~고맙고,,감사합니다
그리고~~~마니마니사랑합니다^^ -
작성자하얀목련 작성시간 15.11.04 스님,감사합니다.행복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_()_ -
작성자코알라 작성시간 16.01.10 그런사람~다시한번읽어보니 더더욱 마음넉넉하게해주는 스님글법문에감사드립니다
괜시리 가슴한켠이 시릴때 찾아뵙고있습니다
글법문올려주신 분께도 새삼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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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풀꽃 작성시간 16.03.23 한 컨에 세겨두고 싶습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