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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한미르님께 질문...

작성자自由人|작성시간05.01.25|조회수79 목록 댓글 11
한미르님께 질문드립니다.
아래 글은 어느 교회 교지(교회에서 전도용으로 매달인지 매 분기인지 한번씩 만드는 소책자)에 실린 글입니다.
글쓴 사람은 수필 형식으로 썼으나, 그 안에 이 사람의 신앙관이 대체로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게 한미르님과 유사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신실한 기독교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한미르님이 아래 글을 쓴 사람과 님의 신앙관 차이를 이야기 해 주시거나, 혹은 아래 글을 쓴 사람이 가진 신앙관의 문제점을 님의 입장에서 이야기 해 주실 수 있나요?
참고로 아래 글은 모 침례 교회의 교지에 나오는 글을 제가 옮겨 온 것입니다.
아쉬운 건 그 교지에 나오는 다른 글은 글쓴 사람의 이름이 다 있는데, 이 글에는 글쓴 사람 이름이 없더군요. 인터넷에 올리는 동안 이름이 사라진 듯합니다.

이하 모 교회 홈피에서 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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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리를 구하며 / "세상이 아름다운 건"

어린 시절 읽은 쌩 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당시에는 그냥 아름답다고만 생각하던 부분들이 점점 자라오면서 그 속에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인 필자가 그려준 상자 안에 있는 새끼 양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어린 왕자를 바라보면서, 그 동화에 나오는 표현인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가운데 우물이 있기 때문이란 말이 떠오르는 건 왜 그럴까? 즉 그 말 한마디로 인하여 무엇이 아름답다는 건 그 안에 무엇이 있다는 표현을 하기 때문입니다. 조종사가 비행기를 고친 후 자신의 위치로 돌아와서도 하늘의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는 건 그 안에 어린왕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동화가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어린 왕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거꾸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막이란 공간안에는 과연 무엇이 많은가? 우물이 많은 것일까? 그건 아닐 것입니다. 사막에는 모래와 바위들이 주를 이룰 것이고 그 안에 있는 오아시스 혹은 우물은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우물이 있음으로 인하여 사막은 생명을 가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많고 많은 모래와 바람보다는 생명을 만들어 내는 그리고 그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우물이 더 중요하고 아름다운 겁니다.

여기서 혹시 이런 충동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우물이 있기 때문이란 말을 세상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아름다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라고요.

똑같은 방법으로, 우리 마음에는 천국만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성경은 물론이며 하물며 많은 철학책에도 잘 나와 있으며, 결론적으로 우리 마음에는 선과 악 그리고 그 외의 것 등 무수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어쩌면 천국이 있는 자리는 아주 작은 지도 모릅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을 비유하여 밭에 감추어진 보배라고요. 넓은 밭 속의 작은 보배! 그러나 그 보배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살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넓고 그 안에 숱한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 있는 천국, 하나님, 혹은 진리에 비한다면, 다른 것들은 거의 아무 곳도 아닌 것이지요. 어떤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하나님은 가치를 자신의 어떤 것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귀하다고 여기는 모든 걸 다 합쳐도 그 분의 천만 분의 일도 안돼는 하찮은 그래서 비교가 안돼는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다른 모든 걸 다 합쳐도 그 속에 있는 천국에 미치지 못하므로, 그 진리가 그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편으로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성경이 아름다운 건 그 안에 진리가 있기 때문이다 라고요. 성경을 적은 성경책은 그야말로 종이 위에 적은 글일 뿐입니다. 즉 성경책은 성경을 기록한 것으로 자체가 고귀한 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성경 즉 그 문자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지요. 성경 문자는 단지 그 살아 있는 진리를 사람이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둔 즉 진리를 인간의 용어로 만들어 둔 표시일 뿐입니다. 완전한 진리를 불완전한 인간의 용어로 표현한다는 건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고, 예수님도 천국이나 진리를 말씀하실 때 비유라는 방법을 쓰시는 것이 이러한 문제점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러면 밭 속에 감추어진 보배, 즉 마음속에 있는 천국은 한 곳에 있는 것일까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것일까? 우리가 진리를 한번에 알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성경책이 두꺼울 필요도 없고 아니 어쩌면 성경책이 없어도 될 겁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도 진리인 예수님을 표현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인 것처럼, 보배는 하나이면서 여러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작은 옹달샘을 볼 때, 옹달샘은 여기 저기 있는 듯이 보이나 그 근본인 지하수는 하나라는 겁니다. 즉 마음 속 이곳 저곳에 진리가 있는 듯이 생각되나 그 작은 지점에서 맥을 잡고 따라가면 큰 그리고 전체가 하나인 진리가 있다는 걸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소중함으로 인하여 다른 건 다 포기할 수 있게 되겠지요. 즉 밭 속에 있는 보배를 찾았는데, 이제 보배만 신경 쓰지 밭의 다른 부분을 돌아보겠습니까? 보배를 찾았으면 보배를 밭에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면 그 보배를 가지고 뭘 할 것인가? 성경에 보면 천국을 설명하는 다른 예로 겨자씨의 예가 나옵니다. 밭에 숨겨진 보배는 아주 작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발견된 후의 보배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는 구절이 작은 겨자씨가 나중에는 새들이 깃들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처음에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찾고 있을 때에는 너무나 작아서 과연 우리 마음속에 진리가 있는 지 없는 지 의심도 들지만, 일단 찾고 나면 그 진리는 우리의 마음과 모든 걸 지배할 수 있는 거대한 것이 되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진리에 대한 즐거움은 그 사람이 소속된 곳으로 전파될 수 있을 겁니다. 보배를 찾고도 자꾸 밭에 집착하는 사람이 없듯이, 진리를 찾았으면 그걸 실천하고 즐겨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에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여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찾았으면 그 진리를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책에 쓰여진 문자는 진리를 사람이 이해하도록 기록한 것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즉 진리는 사람들의 전달 수단인 문자로 완벽하게 기록될 수 없으므로, 진리를 발견하여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성경책 속에 기록된 문자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본 그 진리를 실천하라고 성경에서 가르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표현한 말이 위에서 언급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표현이란 생각을 해 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가야할 길을 알기에 그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집니다. 사람들은 욕심이 많습니다. 이 욕심으로 인하여 괴롭고 고통스럽기도 하며 때때로 그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가장 욕심이 많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 혹은 천국에 갈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걸 어린아이와 어른에 비유하며 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작은 장난감을 서로 가지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더 큰 걸 가지려고 욕심을 부립니다. 그러면 그 더 큰 것 즉 사회적 지위나 권력 혹은 경제적 풍요로움을 무시할 정도로 큰 걸 가지려는 사람을 어떻게 욕심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대가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음에서 할 때 즐거운 것이지, 천국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한다면 그건 또 다른 욕심이며, 그 선행이 우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정말 큰 욕심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리고 그것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실천할 때, 자신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무엇을 원하여 그러는 것이 아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설정하고 나면,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는 아주 자명해 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장난감을 소유하기 위해서 다투지만, 어른들과 같이 있으면 더 이상 장난감을 혼자 차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른들이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장난감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는 걸 잘 알거든요. 마찬가지로 진리를 실천하려는 사람은 세속적인 것에 대하여 경쟁을 하는 상대가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선행을 하고 그 자체를 즐기므로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교화시킬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찾고 천국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즉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말에 신문의 사회면을 보면 선행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위의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을 예로 들 때, 어느 사람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까? 전 도움을 받은 사람보다는 도움을 준 사람이 훨씬 더 행복한 걸 알고 있습니다. 선행에 대한 즐거운 보상이 천국을 경험하는 한 예라는 걸 믿습니다.

세상이 즐거운 건 그 안에 아름다운 제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천국의 작은 부분 어쩌면 옹달샘도 아닌 그 옹달샘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를 찾은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것을 따라 가면 커다란 진리가 있다는 걸 확신하기에 그래서 하루하루를 그 진리를 찾고 또 쫓아가는 제 삶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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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한미르 | 작성시간 05.01.25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증인으로 자임하면서 확신에 넘쳐서 예수의 부활을 전하였다. 예수의 부활을 하느님께서 주신 깨달음으로 받아들였다. 그 깨달음을 전한 하느님의 영, 성령, 그것을 부활하신 예수의 영과 동일시하였다. 하느님의 영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고 믿었다.
  • 작성자自由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6 윗글을 쓴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ㅋㅋㅋ... 기독교 관점에서 본다면 상당히 위험한 신앙관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요? 불교 냄새도 약간 나고요... 기독교가 깨달음의 종교도 아닌데, 바이블을 그 깨달음의 길잡이로 삼고 있는 듯이 풍기는 뉘앙스하며... 어쩌면 한미르님보다 더 진보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일 수도
  • 작성자自由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6 있고... 일부 생각엔 동의 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제가 싫어하는 사고를 가진 듯이 보이거든요. 제일 맘에 안드는 부분이 바이블 안에 진리가 있기에 바이블이 아름답다고 한 말... 정말 글 쓴 사람은 바이블을 제대로 일고 하는 소리인지도 궁급하고...ㅋㅋㅋ
  • 작성자自由人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26 한미르님... 님의 말 중에서 제일 헷갈리는 부분 중의 하나가 예수의 육체적 부활입니다. 얼핏 관념적인 듯이 보이기도 하다가 어떤 때는 정말로 육체적 부활을 주장하기도 하고... 제가 보기에는 님이 이것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안된 듯이 보입니다. 언제쯤이면 정리가 될 것 같습니까?
  • 작성자한미르 | 작성시간 05.01.26 예수의 육체적 부활? 내가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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