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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사회

[스크랩] 결정론, 그리고 자유의지

작성자지발돈쫌|작성시간12.06.26|조회수464 목록 댓글 5

결정론, 그리고 자유의지



이 세상은 결정된 것인가?


“이 세상의 모든 움직임들과 선택들은 시간의 화살에 따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과연 우리가 선택을 하는 것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아니 그런 자유가 있기는 한가?"


이 물음들은 철학사에서 계속 제기되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장이 서로를 반박하면서 물고 물리는 양상을 보여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를 원용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이 존재함을 논증하려 하였다. 이는 ‘인간은 신이 결정한 운명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아퀴나스보다 1,500년 이전에 이미 이를 부정한 바 있다.


“만약 모든 움직임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이 결정론에 의한 순서에 따라 발생한다면 이 세상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사람이 갖고 있는 자유의지의 원천은 무엇인가?”


에피쿠로스 학파에서는 모든 것은 자그마한 원자로 구성되어 있어서 엄격한 결정론적 법칙을 따르지만, 원자는 때때로 일탈을 하며 이 일탈이 확장되어 인간 행위는 비결정적으로 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일탈로써 자유의지의 존재를 주장한 루크레티우스의 관점은 현대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다시 한 번 제기된다. 물론 일탈하는 원자 대신 양자의 기계적인 불확정성이 두뇌 세포의 구조적 요소에 따라 거시적으로 확대된다고 주장하는 점과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즉 두뇌의 구조와 신체적 조건 및 환경에 따른 경향성의 결정 등에 따라 완전한 자유의지를 갖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며, 이 제한적인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로 확대되어 매우 복잡하게 얽히면서도 거대한 경향성(전체주의 같은)과 일탈(반동)이 혼재한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이 일탈이라는 것도 “실은 결정론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렇게 되면 논점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이런 식의 반복적 논박은 철학사에서 계속되어 왔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결정론이나 자유의지의 문제는 각각의 주장이 나름의 논거나 증거를 갖기도 하지만 확정적 증거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어 결국 ‘맨땅에 헤딩’한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이 글에서는 결정론에 대한 전반적인 이론과 주장들을 살펴보고, 인간행위에서의 자유의지가 가지는 의미 및 위상과 이에 따른 도덕적 책임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긴 글을 읽기 곤란한 분들을 위해 미리 결론을 제시하자면 “결정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정론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원용하여 집대성한 원인론(그리고 여기에서 제일원인론을 도출하여 신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은 결정론의 모든 주장을 이끄는 핵심적 원리이다. 사실 언뜻 보아도 우리의 일상에서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어 보인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는 속담은 여전히 타당하다.


우리는 길거리에 죽어 있는 고양이를 보았을 때 원인을 상상한다. 차에 치었거나, 누군가가 죽은 고양이를 길에 버렸거나, 아니면 길거리에서 자연사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즉 아무 이유 없이 저절로 길거리에 죽은 고양이가 누워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비록 이유를 모른다고는 생각하지만,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결정론’은 어떤 사건(event)이 있을 경우 거기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주장이다. 결정론도 여러가지 유형이 있다.




보편적 결정론


보편적 결정론은 “모든” 사건에는 그 사건을 일으키는 원인이 있다는 이론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데는 그렇게 발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선행조건들이 있다는 것이며, 바꿔 말하면 “선행조건에 따라 완벽하게 결정되지 않는 사건은 단 하나도 없다”는 이론이다.


보편적 결정론의 체계를 세운 프랑스의 천문학자 겸 수학자인 라플라스는 어떤 악마를 상상하는 것에서부터 논지를 이끌어 나간다. 이 악마는 모든 지식을 갖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의 모든 상태를 판단하고 또 이를 무제한적으로 계산할 수 있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모든 사건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앞으로 다가올 상태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을 활성화시키고, 자연 속 모든 존재의 상황을 모두 이해하는 지능이 우주의 커다란 물체와 가장 가벼운 원자의 모든 움직임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능을 가진 악마의 입장에서 보면 그 어떤 것도 불확실하지 않으며 악마의 눈 앞에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환하게 드러날 것이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계산한 대로라면 비대칭성을 가진 시간(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른다)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 뿐만 아니라 미래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제한적인 능력을 가진 인간의 입장에서는 선택이니 대안이니 하는 말로써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라플라스의 악마가 보는 관점에서는 인간의 선택이나 대안조차도 이미 결정된 것일 뿐이다.


하지만 보편적 결정론은 현대에 들어와서 부정되고 있다. 우선 “모든” 결정에서 제외되는 것이 있다.

바로 우주의 창조이다. 우선 신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는 빅뱅이론을 보편적 결정론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할 수 있으며, 신에 의한 천지창조로써 빅뱅을 설명한다고 해도 ‘신의 창조는 누가? 무엇이?’라는 식의 반론으로 “모든” 결정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제일원인론이니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니, ‘존재의 이유를 내포한 존재’니 하는 식의 신존재증명을 인정하든말든 그것 자체로써 이미 보편적 결정론은 반박되는 것이다.


보편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또 다른 반론은 양자역학적 서술이다. 코펜하겐 해석이라 불리는 이 서술은 입자의 움직임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그저 확률에 따라 파악할 수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 서술은 우리 일반인들에게는 조금 역설적으로 들린다. 아원자 수준에서 발생하는 불확정성이 왜 거시적 물체에까지 확대되지 않는가 하는 의문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해 현대 물리학자들은 아원자 수준에서 벌어진 불확정성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거시적 물체에서는 사라진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일상적인 사건에서의 결정론까지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라고 주장하는 보편적 결정론이 맞지 않다는 반론으로는 정당하다. 그리고, 단 몇가지 반대사례가 있다면 우리가 모르는 더 많은 사례가 있을 수도 있다.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인간행위의 비결정론


거창한 우주의 창조나 미시적인 아원자 세계에 대한 고찰을 일단 배제(보편적 결정론을 포기)하고 우리가 지각이 가능한 거시적 관점의 세계, 그중에서도 인간 행위로 한정하여 본다면, 결정론은 갑자기 설득력이 높아진다. 이 ‘인간행위의 결정론’은 인간의 모든 행동이 앞선 사건들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 인간행위의 결정론은 앞선 사건이나 조건이 달라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는 운명론과 유사하지만 엄연히 차이가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은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운명론을 혼동하거나 의도적으로 혼용하여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예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라는 운명은 정해져 있으나, 인간은 예수를 믿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함으로써 신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이 미리 정해져 있다(14만 4천명)고 하면서 스스로 신앙의 선택에 따른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마는 경우도 있다. 이런 해석과 주장의 미세한 차이 때문에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수많은 종파가 생기고 있다.

영화 터미네이터 시리즈는 운명론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시하고 있지만 인간행위의 결정론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논하지 않았다.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인간행위의 운명론의 차이를 정리해서 설명하면, 전자는 선행조건들에 의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할지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상관없이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거나 혹은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든 어떤 조건에 놓여 있든 상관없이 인간은 같은 행동/선택을 할 것이라는 것이다.


인간행위의 결정론은 모든 인간의 행동을 지배하는 결정론적 법칙이 있다고 주장한다. 밥을 먹고 소화시키는 일, 더울 때 땀이 나는 것, 갑자기 놀라서 뒤로 물러서는 반사적 행동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지금 예시한 사례들은 ‘비자발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자발적’이라고 느끼는 행동들도 선행조건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가? 결혼 18년차에도 여전히 아내를 가슴 뛰게 사랑하는 일, 여러분이 이 지루하고 긴 글을 아직도 읽고 있는 현상태, 어제 저녁에 특정한 식당에서 특정한 메뉴를 먹은 일, 초등학생 개구쟁이가 짝꿍의 치마를 들춰버리는 일 등은 ‘더운 곳에서는 땀을 흘린다’는 것보다는 분명히 ‘자발적’인 선택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인간행위의 결정론자들은 그런 행동들이 ‘자발적’으로 보일 뿐이지 자발적인 행동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뇌신경 뉴런의 활동이라든지 근육 세포 하나하나의 상호작용 같은 것 등의 복잡한 검토는 배제하고 (선행)조건을 단순화하여 살펴보자. 만약 아내가 지속적으로 바람을 피우고, 또 살림을 거덜나게 하여 당신을 빚더미에 앉게 했다면 여전히 아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글이 무의미한 잡담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읽고 있을 것인가? 직장 동료들과 다수결로 정했거나, 혹은 독재적인 직장상사가 정해버린 메뉴라 어쩔 수 없이 먹고 싶지도 않은 요리를 먹은 것은 아닌가? 이성적 통제력이 미숙한 시기인 초등학생이 짝꿍의 치마를 들춰버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할 수 있었을까?


이때 인간행위의 비결정론자들은 다시 반박을 한다. 아내의 부적절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지적 호기심이 아닌 그저 권태 때문에 이 지루한 글을 계속 읽을 수도 있다. 집안일을 핑계대어 회식에 불참하고는 애인과 다른 곳에서 식사할 수도 있으며, 짝꿍을 진정 좋아해서 짝꿍이 곤란해 할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인간행위의 결정론자들은 이 반박조차 원래는 결정적인 행동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물리학, 생물학, 생리학, 정신의학 등의 발전으로 이러한 ‘선택적’이고 ‘자발적’으로 보이는 행동들도 예측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결정은 되지 않았다. 인간의 행동들이 완벽하게 결정론에 따른다고 하기 보다는 일기예보처럼 선행조건들에 따른 확률적 결과(최근에 확률적 결과가 아니라는 주장이 더 권위를 얻고 있다)일 뿐이고 예외(마치 기상이변 같은)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벤자민 리벳(Libet)의 실험


인간행위의 결정론자들에게 획기적으로 유리한 증거가 벤자민 리벳의 실험에 의해 제공되었다. 이 실험의 개요는 인간의 근육운동 전후의 뇌파의 움직임을 포착(EEG, eletric encephalo gram)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개시된 시간, 즉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을 t라고 할 때, 인간의 의식, 즉 근육에 특정한 운동을 하도록 명령을 내리기로 결심(의식)한 시간은 평균적으로 0.2(t-200ms, mili-second)초 전에 이뤄졌다. 여기까지 보면 별달리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보다 약 0.3초 앞선 시간(t-555ms)에 그 이전과는 구별되는 뇌활동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를 두고 리벳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두뇌는 이러한 행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주관적 의식이 생기기 전에 행동을 주도하기로 결정한다,”


인간행위의 비결정론자들은 인간의 자발적인 행동이 ‘내부에서부터의 선택에 의해’ 일어난다고 주장해 왔는데, 리벳의 해석에 따르자면 의식적인 선택을 하기 이전에 이미 행동의 착수가 이뤄졌으므로 적어도 인간행위의 비결정론이 주장하는 자발성은 그 전제부터 흔들리고 만다. EEG의 특정패턴(t-555ms)은 다른 선행조건(뉴런, 세포, 신경, 혈액, 성격 등의 내부조건과 기온, 분위기, 의무, 성장환경 등의 외부조건)을 고려하지 않고도, 인간의 행동이 비자발적으로 결정됨을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을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t-555ms의 패턴도 실은 ‘의식적인 결정과정’의 한 단계일 수 있으며, 단지 그 결정을 정리하고 저장한 다음 전파하는 일이 t-200ms에 이뤄졌고, 이때 우리의 기억만이 ‘t-200ms에 결정이 이루어졌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해석 말이다. 그러나 리벳은 t-555ms의 EEG패턴을 볼 때 의식과는 상관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반박은, t-555ms에서의 뇌활동은 의식을 담당하는 뇌부위에 선택/결정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일 뿐이지 그 자체가 선택/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t-555ms의 뇌활동은 "판단없이" 직관적 행동을 하게 할 것인가, 선택과정을 거쳐서 행동을 하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라 시간을 구성하면, t-555ms에 내려진 명령에 따라 의식을 담당하는 뇌부위는 355ms동안 판단을 한 다음 t-200ms에 근육에 명령을 내리는 셈이다. t-555ms에서 t-200ms에 이르는 평탄한 패턴은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해 그 시간동안은 뇌가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판단과 선택활동이 대전력이 필요치 않아서 뇌파의 특정패턴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며 실제로 평탄한 것도 아니라고 한다.

(리벳의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깜짝 놀라 뒤로 자빠지거나 눈에 뭔가가 날아들면 눈을 감는 것 같은 행동이 필요할 때는 판단을 하는 뇌를 거치지 않고 직접 근육에 미리 프로그래밍된 행동명령이 내려진다(t-555ms의 패턴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정말 이 경우 뇌의 다른 부위가 약 20~100ms에 활성화 되고 전두엽은 가만 있다. 이를 두고 양측 모두 "비자발적"이라고 인정한다.)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를 배타적인 관계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무엇이냐’의 질문 대신 ‘인간의 행동이 자유롭다는 것이 무엇이냐’의 문제로 들어가서 고찰해 보면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반드시 배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다음 중에서 자유로운 행동과 그렇지 못한 행동을 구별해 보시라.


a. 나는 친구의 짐을 들어 주었다.

b. 나는 일진의 협박에 못 이겨 빵셔틀을 하였다.

c. 나는 친구의 장난에 몸이 밀려 평소 흠모하던 선생님을 위에서 덮치면서 입술이 맞닿고 말았다.


자발성의 정도를 평가하면 a>b>c가 될 것이다. 물론 a도 동정심, 우정, 그날의 기분 등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완전하게 자발적인 행동이라 할 수 없고, c의 경우 대상이 흠모하던 선생님이 아닌 못생긴 남학생이었다면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하여 결국 덮치는 대신 옆으로 쓰러질 수도 있었을 것이기에 완전한 비자발적 행동이라고 말하기도 곤란하다. b의 경우 빵셔틀을 하는 대신 학교를 자퇴하거나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도움을 청하거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자발성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완전한 자발성도 완전한 비자발성도 없다는 점을 전제하되, 논의의 편의상 자발적(a), 중간적(b), 비자발적(c) 행동으로 분류하고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에 대해 살펴보자.




양립불가능론과 양립가능론


인간행위의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양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이 바로 ‘양립불가능론’이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결정론자든 자유의지론자든 간에 대체로 양립불가능론에 동의하는 경향이 높다. 즉 여러분이 결정론자 혹은 자유의지론자 중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든 간에 양립불가능론은 양립가능론보다 타당해 보일 것이다.


양립불가능론자이면서 인간행위의 결정론이 참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위 a, b, c의 행동 모두 자발성의 차이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모두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비결정론자인 자유의지론자들은 c의 경우는 몰라도 a와 b의 경우에는 분명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으므로 인간의 선택은 자유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인간행위의 결정론자와 자유의지론자의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몇몇 철학자들은 두 주장이 양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양립가능론자들은 “자유”라는 것을 다소 다르게 정의한다. 일단 외부적인 것(c 유형의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내부적으로도 인간에게는 충동 혹은 본능에 의한 움직임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a유형처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행동은 분명히 의도적(자유로운)인 결정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물론 친구를 기쁘게 하고 친구로부터 고마운 친구로 인식되고 싶은 욕망에 의한 것이므로 결정론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강한 책임감과 독립심을 갖게 해주려고 친구의 짐을 들어주지 않는 선택도 분명히 가능하므로 친구의 짐을 들어주는 행위는 분명히 자유의지가 작용한 것이다.


이 양립가능론은 자유의지가 일부 포함되는 결정론이라 하여 ‘유연한 결정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에 반해 자유의지와 양립이 불가능한 결정론을 ‘엄격한 결정론’이라 부른다. 한편 자유의지론은 양립불가능론에 속하면서 '인간행위의 비결정론'에 속한다.

※인간행위의 비결정론은 단순히 결정의 다른 선택이나 대안의 존재 여부에만 관심을 갖는 것에 비하여 자유의지론은 그 동기의 도덕적 가치와 행동결과에 대한 책임까지도 고려하기 위한 용어이다. 그러나 엄격하게 구별하여 사용할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논의에서 비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은 구별없이 사용되고 있다.




엄격한 결정론과 도덕적 책임


엄격한 결정론은 인간행위의 결정론이 참이며, 따라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자유의지를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에 주목하시라). 그런데, 엄격한 결정론은 예나 지금이나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 거부감이 생기는 원인은, 엄격한 결정론이 도덕적 책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인간존재의 의의를 공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엄격한 결정론이 어찌하여 도덕적 책임을 포기하게 만드는지 자세하게 살펴보자. 일단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려면, 그는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양립불가능론에 따르면 1가지 이상의 다른 행동도 가능하고 또한 선택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러나 엄격한 결정론에 따르면 실제로 저지른 행동 이외에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며, 이는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므로 따라서 그 행동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도덕적 책임의 기반이 되는 자유를 부정하는 탓에 엄격한 결정론은 철학사에서는 그리 인기가 없었다. 어쩌면 인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감을 가졌다고 봐야 할 것(데이빗 흄의 농간(?)에 깜짝 놀란 칸트가 3대 이성 비판서를 쓴 이유는 회의주의에 대한 것 뿐만 아니라 인간행동의 책임에 대한 것도 있다)이다. 하지만 이런 결론이 그토록 나쁘지는 않다고 보는 입장도 있다. 어린 시절 학대를 받은 자가 저지른 살인죄에 대한 정상참작이나 나아가 정신장애 변호(스콥스 재판으로 유명한 클러랜스 데로우가 10대 소녀 살해범을 사형 대신 종신형으로 감형하는 변호를 할 때 결정론을 내세운 것이나 기타 법적 처벌 대신 정신병원에 구금하여 치료받게 하는 것)같은 사례가 그렇다.


사실 엄격한 결정론이 모든 처벌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엄격한 결정론은 처벌을 광범위하게 이해한다. 현재 사회에서는 여러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범법자를 처벌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범법자의 범행에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이것은 여러 목적 중 하나, 즉 처벌을 면제해 준 것 뿐이며, 처벌 대신 범법자의 사회적 격리, 재범 억제, 다른 사람들의 모방범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 등은 여전히 유효(하나의 선행원인으로서 선택압적인 작용)하다고 주장한다.


인간행위의 결정론은 모든 인간이 교정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행위의 결정론은 유전적인 기질이나 과거의 학습이 행동의 결정적인 요인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자연(유전적 기질)과 교육(환경적 작용)의 중간쯤에서 상벌의 적용으로 행동 양식이 바뀔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도덕적 책임이 없다는 것이 처벌을 무효화시키는 것이 아닌데도 엄격한 결정론은 환영받지 못한다. 이 현상에 대해 데니얼 데닛은 “많은 사람들이 결정론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것을 다른 무언가로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결정론의 수용과 관련하여 사람들이 자기 충족적인 예언의 유해한 효과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술 도중에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과 통증은 있으나 몸은 여전히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끔찍스러운 상태의 환자가 겪는 무기력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말이다.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이 왜 해로운가 하면 아주 유해한 자기 파멸적인 체념과 무감각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핵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예방할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의 무기력한 체념을 한번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런 태도를 권장하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개탄해야 하지 않을까?”


데닛은 결정론이 곧 행위자의 무기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결정론은 우리와 상관없이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지만, 데닛이 신경쓰는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엄격한 결정론이든 유연한 결정론이든 간에 그것이 완전 포기 상태나 끔찍한 무기력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결정론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의 실제 행위 사이에 단절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유의지론, 행위자 원인론


자유의지론은 비결정론이라고도 부르며, 인간이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입장이다. 이 자유의지론은 결정론과 양립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에피쿠로스 학파가 생각한 일탈이나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불확정성에서 자유의지론은 시작한다.


그런데 이 불확정성(혹은 일탈)이 언제 발생하느냐에 따라 자유의지는 무효화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의사결정과 신체적 행동 사이에 불확정성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쉽게 인터넷에 떠도는 카톡의 오타로 일어나는 사고들을 연상지어 보자. 물론 신중한 작성 및 검토 없이 무작정 전송하였다는 도덕적 책임을 져야겠지만, 이미 전송되어 버린 오타 그 자체만을 생각해 보자. 우리의 자유의지와 상관없이 메시지가 작성되었음을 알아챘지만 이미 전송버튼을 눌렀을 경우 우리는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뒷수습을 위해 우리는 다시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메시지를 작성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애초에 보낸 메시지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난점(불확정성 혹은 일탈이 엉뚱하게 발생하는 것) 때문에 일탈을 근거로 한 자유의지론을 거부하고 대신 행위자를 원초적 개념으로 도입하는 자유의지론의 견해를 갖는 주장이 있다. 이를 “행위자 원인론”이라고 하는데, 자유롭게 행동하는 행위자인 내가 인과관계의 연쇄를 끊는 능력을 가지며, 또한 최초의 사건이 원인 없이 벌어지는 새로운 인과의 연쇄를 시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무로부터 자신의 미래를 창출하는 결단의 개념을 중시했다. 샤르트르는 자유로운 행위자에 대해 “그는 세상은 물론 그 자신과 관련해서 무(無)로의 기투를 할 수 있는 존재”라고 하면서, 결정론적인 법칙에 구애받지 않고도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생의 의미와 자기 명예 및 자기 가치를 실현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에 부담을 느낄 때, 혹은 변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결정론으로 대피할 준비를 한다." 


그러나 행위자 원인론은 몇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 우리가 일상 생활을 하면서 분명하게 느끼는 인간 행위의 한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더울 때 부채와 선풍기와 에어컨을 선택하는 문제, 즉 자원의 한계(지금 바깥이 40°C이고 내가 가진 것이 부채와 선풍기뿐이라면 더위는 궁극적으로 피하기 어렵다)는 왜 존재하는가? 스카이다이빙을 할 것이냐 스킨 스쿠버를 할 것이냐는 쉽게 결정하지만 낙하산 없이 뛰어내릴 수 있을지 잠수장비 없이 500미터 이하로 잠수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이다.


행위자 원인론의 문제는 행위자 원인론 자체에도 있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원인론이 아닌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결정론과 엄밀하게 구별을 지을 수 있는가?


마지막으로 자유의지론-행위자 원인론은 현대의 과학, 특히 뇌과학의 결과들이 보여주는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유의지론자들은 이러한 과학적 자료에 응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유연한 결정론자의 타협과 문제점


자유의지의 일부를 받아들이면서 결정론의 입장을 취하는, 즉 결정론과 자유의지론이 양립가능하다는 입장이 유연한 결정론이다. 엄격한 결정론은 도덕적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반면 자유의지론은 결정론의 증거가 압도적이어서 성립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일부 철학자들은 도덕적 책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해 자유의지론에서 말하는 자유를 일부 받아들인다. 즉 자유의지론과 결정론이 양립불가능하다는 해석을 거부함으로써 두 이론이 가진 딜레마를 피하고자 하는 것이다.


유연한 결정론은 곧 양립가능론이며, 우리 모두가 인식하는 구분에 기반을 둔다. 나의 행동 중 어떤 것은 외부에 의해 강제되고 어떤 것은 자발적 의지와 욕망의 결과라고 본다. 유연한 결정론에 따르면 방해받지 않고 나의 욕망에 따라 행동했거나 나의 욕망과 반하여 행동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면, 나의 행동은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나의 행동은 100% 나의 현재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 나는 여전히 내 행동의 주인인 것이다.


유연한 결정론은 자유로운 행동을 일으키는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기 때문에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내부적으로 스스로가 원한 행동과 외부적으로 강제된 행동을 구분하는 것이며, 유연한 결정론의 문제점은 자유와 부자유의 경계선상에 있는 다양한 행동들을 고려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일진이 빵셔틀을 시킬 때 이를 행할지 말지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를 보자. 

나는 일진의 폭력에 당하지 않으려는 안전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유의지로 빵셔틀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안전을 추구하도록 결정되어진 나의 유전적 기질이 빵셔틀을 하도록 한 것인가? 

또는 부당한 행위에 저항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빵셔틀을 거부한 것인가? 아니면 부당한 탄압에 저항하도록 결정되어진 나의 기질이 빵셔틀을 거부하도록 한 것인가?


또다른 형태의 선택을 보자. 바로 마약중독자에 대한 것이다. 중독자도 마약을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은 욕망이 있다. 즉 마지못해 마약을 하는 것은 부자유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그(그의 뇌)는 마약을 요구한다. 바꿔 말하면 결정론자들의 주장(혹은 결정론자들이 인용하는 과학적 주장)대로라면 중독자는 뇌의 작용에 의해 마약을 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마약을 끊고 싶은 욕망과 당장 마약을 주입하고자 하는 욕망 중에 어느 것이 진짜 욕망인가? 두 욕망은 명제상 양립할 수 없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보았을 때 양립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아니면 양립하고 있다고 봐야 할까?


유연한 결정론은 엄격한 결정론과 (일부)자유의지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엄격한 결정론자들의 주장을 부정할 근거가 유연한 결정론자들에게는 사실상 없다. 단지 인간행동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지우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자유의지를 도입했다는 비난만 받는다. 유연한 결정론자도 인간의 자유의지 행사가 환경(과거로부터 이어진)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되면 내부적 행동을 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되며, 곧 자유의지는 없다는 모순에 빠진다.




정 리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보편적 결정론은 현대과학으로 부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행위에 국한해서 결정론의 성립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현대 철학의 추세이다.


현재까지 자유의지론, 인간행위의 결정론(엄격한 결정론)이라는 양립불가능론과 유연한 결정론이라는 양립가능론이 주장되고 있으며, 현대과학은 점차 인간행위의 결정론에 무게를 둔 증거를 내고 있다.


엄격한 결정론은 사실 도덕적 책임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무어의 주장에 따르자면 사실에서 가치를 도출하거나 그 역을 생각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인식은 무기력한 인간상을 공포로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싶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그 타협점으로 양립가능론을 내세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격한 결정론을 반박할 여지가 별로 없다. 


한편 자유의지론은 점점 그 증거가 희석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인식은 어느 정도 자유의지가 있다는 유연한 결정론 쪽으로 기운다.




한편 엄격한 결정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인간행위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다음 행동/현상의 원인으로서의 모습이 결정되지 않는, 즉 그 향배(미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이는 비결정론과 마찬가지(그렇다고 자유의지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마치 비결정론적인 움직임이 얽히고설킨 양자적 움직임이 거시적으로는 확률적 경향성을 띤다는 양자역학적 해석과 반대의 개념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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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unterwegs | 작성시간 12.06.26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이 논점에서는 최첨단의 논의들이 소개된 듯 합니다. 자유의지라는 말은 이제 추방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제한적인 의지' 정도의 용어가 사용되는 게 오해를 피하는 길이지요. 양자역학도 그렇지만 진화에도 '우연'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연의 여지가 전혀 없다면 지금처럼 동식물이 150만 종이 아니라 1000여 종뿐이겠지요. 그러나 그 우연이라는 것도 일정한 한계 내에서 일어납니다. 파충류에서 우연한 돌연변이 등으로 갑자기 포유동물이 진화하진 않지요. 결국 물질의 세계든 유기물의 세계든 큰 물줄기는 결정되어 있지만 작은 물줄기는 결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겁니다.ㅣ
  • 답댓글 작성자함부르크 | 작성시간 12.06.27 운터벡스님도 수고하셨지요? ㅋㅋ ㅎㅎ ^^
  • 작성자함부르크 | 작성시간 12.06.27 에고....눈이야..목이야.. 제발님 너무하십니다.ㅋㅋ. 이 글은, 쓰신 제발님이나 읽는 사람이나 무조건 둘 다에게 박수를 쳐줘야할 것 같아요. 제가 재밌게(?ㅋ) 열심히 읽고, 읽으면서 이해도 거의 다 잘 한 거 같았는데 그게 또 아닌 것도 같고..ㅋ. 결국 기독교(엄격한 결정론?)를 비판하는 글이라고 생각하고 읽어내렸는데 보니 또 결론은 기독교를 수용하는 글인 것도 같고. 제발님 너무해요.ㅋㅋ. 저는 근데 보편적 결정론 (인간들의 타고난 피, 유전자가 저는 그곳에 관련있다고 생각하기에) 에 끌립니다. 하필 왜 악마로 인물을 설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답댓글 작성자함부르크 | 작성시간 12.06.27 제발님은 이 글을 왜 쓰신건가요. 무슨 학술?논문대회라도.?ㅎㅎ. 한번은 더 읽고 댓글을 더 하든지 말든지ㅋㅋ 하겠습니다. 어이구...함부륵 박수당. 지극정성이 뻗쳤당.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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