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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애국운동 단체로만 배웠던 '독립협회'의 회장이 이완용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작성자겸손하자|작성시간03.10.06|조회수549 목록 댓글 15
학교 다닐때 국사 시간에 애국단체로만 배웠던 독립협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이 사회의 기득권층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후손인지라...암튼 한번 쯤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는것 같아서.
'패자(敗者)의 역사 :구본창 著'에서 퍼 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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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과 일본의 은혜(?)를 동시에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895년 4월,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며, 조약 제1조에 '중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명확히 인정한다'라는 조항을 강제로 집어넣었다.

그 후, 1896년 7월에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된 독립협회는, 일본과 청 사이의 이 조약을 통해 조선이 청으로 부터 독립했다며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또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서울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독립문을 세웠는데, 독립문이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 이유는 이전까지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이 서 있던 곳이었기 때문에 청으로 부터의
독립을 보다 더 극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로 현재의 위치에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독립협회는1898년 8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을 방문하자,
그를 '조선 독립에 큰 공을 세운 사람'으로 극찬하면서, 감사의 표시로
독립문이 새겨진 은쟁반을 선물하였다.

그러니까,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고, 동시에 조선을 독립
시켜준 일본의 은혜(?)를 동시에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청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도록 강요한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간단하다.
조선을 집어 삼키려는 일본에게 가장 큰 경쟁자가 되어온 청을 제거하기
위한 의도였다.
당시 민씨 정권은 청에 의존해 권력을 유지해왔고, 청은 민씨 정권을
보호하는 대신, 조선의 종주국으로 행세해 왔기 때문에, 일본에게 있어서
청은 한마디로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쟁탈전에서 청을 제외시키기
위해, 청으로 하여금 조선이 자주국임을 인정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명확히 인정한다'는
의미는 '중국은 조선에서 손을 떼고 물러난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2. 좌충우돌 돈키호테들의 집합체였던 독립협회

현재의 국정 교과서에서는, 독립협회를 계몽운동을 벌인 애국단체로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독립협회를 만들고 주도했던 중심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대단히
엽기적이다. 을사오적으로 일컬어지는 이완용이 독립협회의 회장으로
활동했었고, 부친과 같이 2대째 대를 이어 일본인으로 귀화했던
친일파 윤치호도 회장을 지내며 중심인물로 활동했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3월 7일에 윤치호는 경성일보에 다음과 같은 담화문을 발표했었다.

"강자와 서로 화합하고 서로 아껴 가는 데에는 약자가 항상 순종해야만
강자에게 애호심을 불러일으키게 해서 평화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만약 약자가 강자에 대해서 무턱대고 대든다면 강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약자 자신을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그런 뜻에서도 조선은 내지(일본)에 대해서도 그저 덮어놓고 불온한 난동을 부리는 것은 이로운 일이 못됩니다"

또한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은 평생을 한국인이 아니라 미국인,즉
필립 제이슨으로 살았으며, 조선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인식은 독립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우리나라 백성들은 몇 백년 교육이 없어서...자유니 민권이니 하는 말도
모르고 혹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렇게나 하는 것을 자유로 알고
남을 해롭게 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을 권리로 알기 때문에, 이러
한 백성에게 갑자기 민권을 주는 것은 도리어 위태롭기만 하다..."
- 1898년 7월 28일. 독립신문 -

이렇듯, 조선의 백성들을 일방적으로 교화(敎化)시켜야 할 무지몽매한
대상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동학농민 운동과 의병활동에
대해서 격렬히 비판했고, 농민군과 의병에 대해 잔악한 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의 백성들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짓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權)의 불법한 일을 부당히 여겨
일어나서, 고을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것인데,
저들은 불법한 일을 저희가 행하니 그건 곧 도적이라"
- 1898년 8월 12일. 독립신문 -

결론적으로, 독립협회의 계몽활동은,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교화시켜
바른 길로 인도 한다는 식이었으며, 독립협회가 말하는 민권(民權)은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지주와 자본가들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이었다.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정작 개혁의 지지기반이 될 백성들을 철저히
도외시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돈키호테식의 개혁론자들이었다고 평가
할수 밖에 없다.

3. 독립협회 주도층의 사상적 한계

독립협회의 주도층이 갖고 있던 사상적 기반은 적자생존(適者生存)과
우승열패(優勝劣敗)를 절대시 하는 사회진화론, 즉 약자는 도태되기 쉽고, 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이 당연한 세상의 질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제국주의는 저항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본받고
배워야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구의 국가들,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과 영국의 앵글로 섹슨족 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민족이며 그들이 세상을
지배하는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일본이 바로 '동양의 영국'이었으
므로 ,일본에 대한 저항보다는 일본에 협력하고 동화되는 것이 오히려
'태생적으로 약한 조선민족의 살길'라는 결론에 쉽게 빠지게 되었고,
그래서 독립협회의 주도적 인물들 거의 절대다수가 일제에 합방 된 이후 친일파가 된다.
또한 극단적인 서구우월주의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목표는
오로지 조선을 최단시간내에 서구화 시키는데 있었고, 그것이 곧 조선의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이러한 시각은 독립협회 회장을 지낸 그의 글들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독일은 벽촌이라도 도로가 청결하고...길가에도 의복을 풀거나 발을
벗고 다니는 아녀자 하나 볼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서재필이 한자식 이름인 서재필 대신에 굳이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 이름을 쓴것도, 또 독립신문에서 한자를 쓰지않고 한글만을
쓰고, 영자판 신문을 찍어낸것도, 그리고 1898년에 들어서면서 독립협회가 열강의 침략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되자 서둘러 탈퇴한뒤 미국으로 귀국해버리고만 것들은 이들이 서구우월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 할수 있다.

4. 독립협회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립협회는, 현재의 국정교과서에서 서술한 것처럼 구한말의 순수한
애국 계몽단체도 아니었고, 조선의 독립에 긍정적 역할만을 한것으로
평가할 수도 없다.
독립협회는 처음 조직할 당시부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직된 관변단체의 성격이 짙었고, 또 독립협회 주도층의 지나친 서구 지향적인 태도로
인해 일본의 침략의도를 간파하지 못했고, 그래서 동학농민 운동과
의병운동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오히려 의병 운동에 대한
일본군의 잔악한 소탕작전을 찬양하는등..반 민족적이고 반 민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민심(民心)으로 부터 멀어져 갔었다.
이들은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백성을 개혁의 동반자로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교화(敎化)의 대상으로만 삼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정치인식을
높히는데도 실패했었다.
그러면, 독립협회의 성격을 어떻게 결론 낼수 있을까?
독립협회의 주도적 인물들은, 그 나름대로의 순수성과 애국심을 갖고
운동을 시작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터무니없는 엘리트 의식과,
서구우월주의에 빠짐으로서, 조선을 두고 벌어진 열강들의 첨예한 대립속에서 좌충우돌 하는 돈키호테식 행보를 보임으로써 실제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 기여한바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 보여진다.
그리고 독립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승만이, 8.15해방이후
에도 터무니없는 엘리트 의식과 독선으로,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
막은 최대 원흉이 되었다는 점에서, 독립협회를 주도한 당시 인사들의
돈키호테식 성향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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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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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달콤쌉사름g | 작성시간 03.10.15 "용서하라.그러나 잊지는 말라"or"용서하지마라.그러나 잊었다"
  • 작성자달콤쌉사름g | 작성시간 03.10.15 왠지모르게 이말이하고싶음 -_ -;
  • 작성자九千年史大韓民國 | 작성시간 03.10.15 국사 교과서... 믿을 수 없지요.... 식민사학과 반도사학에 찌들고, 남의 논문을 배끼기나 하는 인간들이 판을 치는 우리 나라 역사학계.....
  • 작성자술먹는 하마~ | 작성시간 03.10.22 식민사학과 반도사학이라? 민족주의 사학 역시 교과서를 왜곡하기는 매 마찬가지이죠.
  • 작성자브라이먼 | 작성시간 03.11.15 자기 나라를 판 매국노~! 이익을 위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하는 넘이죠. 제2의 이완용이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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