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현대전 이야기

제3차 중동전쟁 마지막회 - 골란 고원의 혈전 그리고 단 하루만에 시리아 무너지다!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작성시간14.01.10|조회수2,254 목록 댓글 7

 

(1967년 6월 9일 골란 고원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이 노획한 시리아군 소속 독일제 4호전차)

 

 

 

골란 고원 전투 - 6일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던 시리아와의 전쟁

 

시나이 반도(이집트)와 웨스트 뱅크(요르단)에서의 전투가 속전속결로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감되어갔던 것과는 달리 북동쪽에 골란 고원을 중심으로 펼쳐진 시리아와의 전투는 쉽게 불붙지 않고 조용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전부터 시리아는 이스라엘 쪽으로 포를 발사하면서 도발을 거듭했었고 전쟁의 시작도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분쟁이 그 시작이었으므로 이스라엘은 전쟁 시작과 함께 가장 증오하는 대상이 시리아였습니다. 사실 시리아를 손 봐주기 위해서 인접 강대국들인 이집트와 요르단을 함께 제압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었지 이 두 강대국들에게 시리아만큼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시리아는 그대로 놔둔다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북쪽에 대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잠자리에 드는 집주인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 사실이고 이왕 전쟁이 시작된다면 이번 기회에 완전히 밟아놓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감정은 그러했지만 우선은 이집트와 상대하는 시나이 반도와 요르단과 전투를 시작한 동부전선에 집중적으로 병력을 투입하고 확실히 승리를 거둔 후에 비교적 전력이 약한 시리아 쪽으로 힘을 모으기 위해서 전쟁 발발 직후에는 시리아와의 접경 지역인 골란 고원에서 본격적인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이때 시리아가 선제 공격을 강력하게 시작하고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전투에 충분한 전력 투입이 어려웠던 이스라엘에게 심각한 타격을 줄 수 있었다면 6일전쟁 전체의 판도가 바뀌었을지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정작 전쟁이 발발하자 시리아는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선제 공격을 주저했습니다. 이런 것만 보아도 얼마나 전쟁 발발 당시에 중동 국가들 간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공조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골란 고원 전투 개시 직전에 브리핑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골라니 보병 여단 병사들)

 

하지만 전쟁 이틀째인 1967년 6월 6일 이집트 라디오 국영 방송이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고 실제 전황과 정 반대의 허풍 투성이의 방송을 하는 것을 청취한 시리아는 자극을 받고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고작 2개 대대 규모의 병력과 20여대의 탱크만을 앞세워서 소극적인 공격을 하였는데 작심하고 공격을 기다려온 이스라엘 지상군은 강력한 반격을 가했고 시리아는 무려 200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서둘러 후퇴를 해버리는 볼 쌍 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잔뜩 겁에 질려버린 시리아 군은 골란 고원에 구축된 요새 안으로 들어가서 방어로 일관하기 시작합니다. 북부 전선에 이스라엘군은 요르단과의 서부 전선에 상당 수의 병력을 지원한 상황이었으므로 충분한 병력과 화기가 확보되지 못한 상황이라 시리아를 강력하게 밀어붙힐 수 없었습니다.

 

피의 능선 - 골란 방어선의 혈투

 

 

(흰색 부분이 바로 골란 고원입니다.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접경이고 이곳을

통과하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입니다.)

 

또 한가지 이스라엘군이 시리아군이 방어하는 골란 고원 요새를 강력하게 공격하지 못한 이유는 이 골란 고원이 천혜의 요새로써 험난한 지형이 공격하는 입장에서 효과적인 공격을 구사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이스라엘군은 진격해온 적에게 타격을 입히고 후퇴를 시킬 수는 있었지만 추가 병력 지원 없이 추격을 하여 밀어붙히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골란 고원의 지형은 헤르몬 산의 끝자락으로써 해발 1,000m의 고원 지대였습니다. 특히 동쪽의 시리아 본토와 연결된 방향을 제외한 나머지 세방향이 모두 깎아지른 듯한 경사의 천연 성벽에 시리아군은 지난 수년간 대공사를 하여 인공 군사 방어 시설을 건설하여 더욱 더 이스라엘군이 공격을 쉽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고지대에 시리아군은 한눈에 세방향의 시야가 탁 트인 상태에서 접근하는 적을 쉽게 발견하고 포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시리아군이 건설한 두께 1m의 철근 콘크리트 포좌 속에는 T-34(1967년에 무려 20년전에 사용하던 소련 구형 탱크들을 아직도 사용하다니??? )와 나치 독일이 운용했던 4호 전차(아무리 1960년대 말이지만 이정도면 탱크 박물관 수준이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30대가 엄폐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총 연장 8km에 달하는 참호선은 강철판으로 덮혀있어서 공중 폭격에도 끄떡 없었습니다. 전쟁 발발 전에 시리아를 방문하였던 소련 군사 고문단은 이곳을 둘러보면서 프랑스의 마지노 선만큼 강력한 방어 시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2차대전 당시 마지노 선은 나치 독일 지상군이 우회를 하여 가버리는 바람에 무용지물이 되버렸지만 이곳 골란고원에 시리아 방어시설은 이스라엘군이 우회할 수 있는 경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967년 6월 9일 골란 고원 정상에 배치된 나치 독일이 쓰던 4호 전차. 이스라엘도

2차대전에 사용하던 셔먼 탱크를 개조한 슈퍼 셔먼을 70년대초까지 사용했지만

독일 4호전차가 시리아 군에 의해서 1967년에 실전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골란 방어선도 몇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는데 이곳은 프랑스 마지노 섬처럼 녹지대에 건설된 것이 아니라 사막 한가운데 위치한 탓에 지속적으로 식수와 식량이 공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즉 보급선이 끊겼을 때 탄탄하게 만들어진 콘크리트 참호는 시리아군에게는 참호가 아니라 굶어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지옥의 감옥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상군의 상황은 이렇게 답답한 상황이었지만 시나이 반도나 서부 전선과 마찬가지로 제공권만은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서 확실하게 확보된 상황이었으므로 사실상 골란 방어선은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두번째, 전쟁 발발 당시 시리아는 내부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쿠테타로 집권한 공산 바트당 정부는 끊임없이 새로운 쿠테타의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런 탓에 이집트나 요르단과 비교해서 그리 넉넉하지도 않은 병력과 탱크들을 만약의 쿠테타에 대비해서 수도 다마스커스의 치안 유지를 위해서 빼돌려 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군의 이런 답답한 심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불과 2~3일만에 시나이 반도와 서부전선에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게 된 이스라엘 지상군 병력과 탱크들이 속속 북부군 사령관 엘리자르 장군 휘하로 도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6월 9일 아침에 이스라엘 지휘부로부터 공격 명령을 받은 엘리자르 장군은 명령의 내용을 읽고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미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전쟁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상태에서 이스라엘 지휘부는 "빠른 시간"내에 북부 전선에서의 전투가 마무리 지을 것을 요구했고 속전속결을 바라는 또 하나의 이유는 괜히 시간이 길어지면 세계 여론이 중동쪽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3차 중동전쟁때 시나이 반도 전체를 점령하고도 미국과 소련의 압력으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고 원위치를 해야 했던 경험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국제연합(UN) 안전보장이사회가 소집되어서 전쟁 중재를 위한 발빠른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지휘부는 이런 이유에서 시리아 내륙으로 진격은 절대 금지하며 이스라엘 영토를 위협하는 골란 고원 일대만을 점령하여 차후에 시리아로 인해서 위협을 받지 않도록 원인 제거만 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보급선이 끊어진 상황이었으므로 공군이 집중적인 포격을 가하면서 보급선만 확실히 차단해놓으면 불과 일주일 이내에 적은 항복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하루 이틀내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정면 공격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막대한 희생을 치뤄야 하는 명령임을 알면서도 엘리자르 사령관은 공격 명령을 받고 2시간 만인 아침 9시에 전면적인 공세를 시작합니다. 골란 방어선을 향해서 우선 포격과 함께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집중 폭격을 가한 후에 용맹한 골라니 보병여단과 알버트 기갑여단이 선봉을 서서 진격을 시작합니다.

 

탱크가 간신히 올라갈 수 있는 급경사를 탱크와 보병들이 허덕이면서 기어 올라가자 시리아군은 엄청난 포격과 사격을 가해옵니다. 여기서 기가 막힌 전쟁 속에 토목공사와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 군은 적의 진지를 향해 접근하게 되는데 우선 공군의 폭격이 가해지면 시리아군은 포격을 멈추고 진지 속으로 숨어들게 되고, 잠시 포격이 멈추는 시간을 이용해서 암반을 먼지를 뒤집어쓰며 보병들이 기어 올라가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암반을 폭파한 후에 야전삽으로 서둘러 돌조각들을 쓸어내고 탱크의 진입로를 만들면 이어서 탱크들이 그 진입로를 따라 기어올라가는 식이었습니다. 시리아군의 포격이 다시 시작되면 공군의 폭격이 다시 반복되고.....유효 사격 거리에 접근하게 된 탱크는 시리아 진지를 향해 조준 포격을 가하게 되면 시리아군은 다시 진지 속으로 뛰어들어가고 포격이 멈추게 됩니다. 그러면 다시 보병들은 좀 더 앞으로 기어올라가 다이너마이트로 다시 암반을 폭파하고.....

 

 

(알버트 기갑 여단의 주력 탱크는 슈퍼 셔먼이었습니다. 이런 구형 탱크가

골란 고원의 급경사를 기어 올라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시리아 군의 포격과 사격 중에 보병들은 탱크의 뒷면에 엄폐한 채로 야전삽을 들고 급경사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탱크의 캐터필더 밑으로 돌들을 밀어넣어주었습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경사면 곳곳에 시리아군들이 지뢰를 묻어놓은 탓에 이곳을 잘못 건드린 보병들은 갈갈이 찢겨져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악전고투를 하면서 진격해 올라간 골라니 여단의 보병들과 골라니 기갑여단의 탱크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룬 후에 고지 정상에 도달할 수 있었고 일단 시리아군 진지를 파괴하고 들어가자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진지 벽을 부수고 탱크들이 들어오고 그 뒤를 보병들이 우지 기관단총으로 사격을 가하면서 뛰어들어오자 시리아 병사들은 진지를 버리고 도망쳐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골란 고원 전투 상황도 - 지도 위쪽에 붉은 방어선을 뚫는 이스라엘 진격로가 보입니다.)

 

이스라엘 최정예 보병여단이 골라니 여단은 최선봉에 장교가 앞장 선다는 전통 때문에 많은 장교들이 희생을 당했고 시리아군의 쏟아지는 기관총 사격으로 쓰러진 전우의 시체가 철조망 바리케이드를 덮어버리면 그 등을 밟고 넘어 진격을 하는 끔찍한 지옥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결국 진지 정상에 도착한 이스라엘군은 방어하던 시리아군들이 겁에 질려 진지를 버리고 도망치려하자  거의 학살에 가까운 보복을 하였는데 실제 전투가 끝난 후에 결과만 보아도 이스라엘군이 얼마나 잔혹하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 측이 대대장(중령)과 대부분의 소대장들을 초반에 잃었지만 어쨌든 공식 집계는 이스라엘측 전사자 115명, 부상자 306명인데 반해 시리아군 측은 2,500명 전사, 5,000명 부상입니다. (솔직히 이스라엘측과 시리아측의 전사자/부상자 규모가 너무 차이가 크다는 느낌이 들겁니다.) 시리아측 피해의 상당 부분은 이스라엘군이 진지에 도착하기 전에 이스라엘 공군의 폭격과 탱크의 집중 포격으로 발생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일단 진지에 올라간 이스라엘 보병들도 추호의 동정심 없이 가차없이 사살해버렸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추측은 요르단이 그러했듯이 시리아 역시 6일전쟁 후에 자국의 전사자와 부상자 규모를 뻥 튀기 해서 발표하였습니다. 이유는 중동의 단합과 세계 여론의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기 위한 의도였는데 그런 배경에서 시리아측이 피해를 늘렸을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골란 고원의 방어선은 난공불락의 요새였음은 확실했고 이곳을 단 하루만에 점령해버린 이스라엘 보병여단과 기갑여단의 용맹성은 가히 놀라울 정도입니다.

 

다마스커스 점령

 

골란 고원 방어선이 무너진 후에 상황은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승리 분위기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전투에 투입되었던 보병과 기갑 부대들이 골란 고원 남쪽에서 독자적인 진격로로 시리아로 진입해들어가버립니다. 지휘부에서는 시리아 국경을 넘어가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이미 피맛을 보게 된 이스라엘 보병들과 이집트와 요르단과의 전투에서 기적의 승리에 도취된 기갑부대들은 6월 9일 해가 지고 어두운 밤이 오자 다음 날 아침에 시리아 내륙으로 진격을 다짐하며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

 

6월 10일 아침이 밝자 골란 고원에 시리아 영토 쪽에 주둔중인 시리아군 탱크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공군의 공습이 시작됩니다. 집중적인 폭격으로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은 시리아군 기갑부대는 먼지가 미쳐 걷히기도 전에 진격해들어온 이스라엘 탱크들의 정확한 조준 사격으로 남은 탱크들도 순식간에 불덩어리가 되어버립니다. 얼마 후에 피폭된 지역으로 진입한 이스라엘 지상군은 이미 시리아 영토의 골란 지역에서 시리안 지상군들은 깨끗하게 철수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날 오전 이스라엘군은 골란 지역에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격을 하면서 전혀 시리아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무사 통과로 점령을 해나가게 됩니다.

 

도대체 시리아군은 하룻밤 사이에 왜 이렇게 "완벽한" 철수가 이루어진 것일까요? 그것은 시리아 라디오 방송이 6월 10일 아침 8시에 긴급 속보로 골란 지역에서 시리아군의 참패와 이스라엘군이 이미 다마스커스로 진격중이라고 보도를 하였던 것이 이 모든 급작스런 태도 돌변의 원인이었습니다. 이 방송을 들은 시리아군들은 패닉 상태에 빠져서 너도 나도 부대를 이탈하고 줄행랑을 놓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날 아침에 아직 골란 고원에 시리아 영토가 완전히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되지는 않았던 상황이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시리아 방송은 무려 반나절이나 앞서서 골란 고원이 전부 이스라엘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성급한" 뉴스를 보도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서둘러 뉴스라고 방송을 했을까요? 물론 이런 보도 덕분에 이스라엘은 10일날 오전 내내 골란 고원의 험한 지형에서 탱크들이 얼마나 빨리 달려서 진격할 수 있는가 테스트를 하는 것 같은 무혈 점령이 일어났지만 훗날 이런 시리아 방송의 불가사의한  방송은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렸던 집권 바트당이 사회 불안을 국외 전쟁 상황을 이렇게 위급한 상황으로 보도하여 전환시키려는 정치적인 술수였다고 추측이 있습니다.

 

어쨌든 무혈행진을 계속하던 이스라엘군은 멀리 다마스커스 회교 사원의 첨탑이 바라보이는 위치에서 진격을 멈추었고 저녁 6시를 기해 시리아 정부는 UN의 휴전중재를 수락하였고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셈입니다. 

 

전쟁의 결과 - 이스라엘의 포식

 

(위에 지도를 보면 전쟁 전에 흰색 지역이 이스라엘의 영토였는데 1967년 6일전쟁

끝난 후에 골란 고원 동쪽, 웨스트 뱅크 그리고 시나이 반도를 전부 합친 엄청나게

넓은 면적을 차지하게 됩니다.)

 

(6일 전쟁이 끝난 직후에 이스라엘 영토를 한가지 색깔로 통일시켜보니 얼마나

넓어졌는지 보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6일 전쟁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은 단 6일간에 전쟁 결과로 기적과 같은 선물을 받은 셈이 되는데....

 

이스라엘은 원래 영토에 무려 6배에 달하는 4만7천 평방마일의 새로운 땅을 영토로 얻게 됩니다. 여기서 저는 문득 히틀러의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과 이스라엘의 이번 영토 확장 전쟁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물론 두 사건이 절대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왠지 자꾸 데자뷰의 느낌은 버릴 수 없군요....)

 

전쟁 직후 모세 다얀 국방상은 "절대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이번 전쟁에서 획득한 영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패전한 아랍 국가들이 국제연합을 통해서 반환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은 새롭게 획득한 시나이 반도, 웨스트 뱅크, 골란고원에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절대 반환할 수 없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새로 획득한 영토 중에서 웨스트 뱅크에 비옥한 땅을 빼면 거의 대부분의 땅들이 아무런 쓸모없는 사막 지대들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악착같이 이땅들을 양보않겠다는 의도는 바로 군사적으로 주변국들과의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경우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려면 먼저 수에즈 운하를 건너고, 시나이 반도의 넓디 넓은 사막지대를 건너와야 합니다. 요르단도 요르단 강을 건너서 웨스트 뱅크를 건너야 침략이 가능합니다.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사이에 두고 있어서 험난한 지형을 통과해야 이스라엘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의 성장은 1973년 발발하는 제4차 중동전쟁의 원인을 제공해준 셈입니다. 주변 아랍 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심은 한없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한편 이번 전쟁이 주변 국가들에게 끼친 영향 역시 막대하였습니다.

 

이집트는 나세르 대통령이 집권한 후에 20억 달러(당시 가치 기준)를 쏟아부어 소련으로부터 최신형 무기 구입은 물론 소련 고문단으로 하여금 이집트 군을 훈련시킬 정도로 군사력 강화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제1차와 제2차 중동전쟁과 마찬가지로 제3차 중동전쟁이었던 6일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전쟁 후에 이집트는 정치,경제적으로 대혼란을 겪게 되고 전쟁 전까지 서방 국가들과 소련 양쪽으로 줄타기 외교를 해오던 정책에서 친소정책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리게 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겨울섬 (김영준) | 작성시간 14.01.11 3차 중동전이 끝났네요. 수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준만님 영문 성함이 Jun Man Kim이 맞나요?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1.11 june man kim이요.^^
  • 답댓글 작성자겨울섬 (김영준) | 작성시간 14.01.11 알겠습니다.
  • 작성자미친도사(정권희) | 작성시간 14.01.15 20세기 중반 이후에도 전쟁을 통한 땅따먹기로 저렇게 차지할 수 있었다니.
  • 답댓글 작성자따블오남편(김준만)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1.15 결국 요즘 일본놈들 속셈도 당시 이스라엘과 큰 차이 없을 것 같다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