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내 주세요...”
더러 나를 잃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빡빡한 일정에 맞춰 돌아가고 있는
하나의 톱니가 된듯 생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일이라고
주님의 뜻이라고
주님께서는 모두를 알아주실 것이라는 생각을 꼭 붙들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스스로를 다그치고 최대의 역량을 뽑아내느라 애를 쓰면서
자신을 소진하는 것이
과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바쁜 일정에 사로잡혀서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조차 없이 지내는 모습은 결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한답시고
주님의 속만 무던히 썩였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제 영혼을 깨웠습니다.
“‘나는 탄식으로 기진하고 안식을 찾을 수 없구나’ 하고 말한다 (…)
너는 너 자신을 위하여 무슨 위대한 일들을 찾고 있는데,
그런 일들을 더 이상 찾지 마라”(예레 45,3-5).
주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모두 기쁘게 살기 원하십니다.
이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행복과 기쁨을 제대로 누리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제 삶에 ‘군림’하며
바쁘고 분주하게 만들던 일들을 하나씩 접어나갔습니다.
신문의 강론을 접고
잡지의 연재를 접고
포콜라레 사제 년피정을 떠나는 길이 얼마나 홀가분하던지요.
메마르고 황폐했던 마음이 대번에 촉촉해지는 듯 했습니다.
이렇게 짧은 글 하나도 적어내리기 어려웠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잠시 영혼을 울리며 솟구쳐 오르던 감정들이
동분서주하는 중에 깡그리 사라지곤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삼촌신부님이 떠올랐습니다.
벌써 다섯 해, 혼절해 계신 삼촌신부님을
바쁘다는 핑계로
틈이 나지 않는다는 구실로
‘다음’으로 또 ‘다음’으로 미루며 찾아뵙지 못한 허물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딴에는 도리를 한답시고 찾아 뵈온
병상의 삼촌신부님은 참혹하게 망가져 계셨습니다.
솔직히 마음이 아픕니다.
너무나 속이 상합니다.
진심으로 주님께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당신의 사제를 비참하게 하십니까?
무슨 까닭에 당신 사제를 이리 처참한 상태로 놔두십니까?
무슨 이유로 이러십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왜? 왜? 라는 숨 가뿐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항의했습니다.
주님을 원망했습니다.
주님이 계시다면 결코
이렇게 하실 수는 없다고도 생각되었습니다.
너무너무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
아무 말씀도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습니다.
+++
우리는 수많은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당신의 뜻을 알 수 없다고 진단합니다.
당신께서 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의심합니다.
어제 밤새도록 제 마음이 그랬습니다.
아니 지금, 제 마음을 뒤져도
이런 원망과 의심으로 꽉 차 있을 것도 같습니다.
솔직히 삼촌신부님을 ‘이렇게 만드신’ 주님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더 솔직히 사랑의 주님이시라면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으니까요.
이렇게 뒤숭숭하게 새벽을 맞았습니다.
입이 쓰고 마음이 떫고 몸은 추웠습니다.
그러다 문득
어느 성당의 십자고상에서 뵈온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발꿈치가 뒤틀려 발등에 얹힌 끔찍한 모습이 기억났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한 작가’라고 평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물처럼 엎질러지고 제 뼈는 다 어그러졌으며
제 마음은 밀초같이 되어 속에서 녹아내립니다”(시편 22,15)라는
성경구절을 되뇌던 일도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저는 주님의 극심한 고통과 무관하게
그분의 고통을 구경하고 즐겼던 관객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고통에서 비켜서 있는 방관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잠시나마 당신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저를 혼내 주십시오. 주님,
삼촌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없애주지 못하고
그저 함께 고통당하고 계신 당신 사랑을 ‘모자란 듯’ 여겼던
이 죄인을 야단쳐 주십시오.
주님,
+++
말라키 예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신 이후,
하느님께서는 수 백 년 동안을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대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수많은 질문에
침묵으로 답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보탤 말씀이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너무나 분명하게
세상의 모든 일마다 마다에 당신의 뜻을 밝혀주셨기 때문입니다.
하여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진 항변에도 묵묵하십니다.
우리의 의심에 장황한 변명을 들려주지 않으십니다.
그저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말라키 예언자에게 들려주신 그 말씀으로 응답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말라 1,2).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알바트로스 작성시간 13.12.01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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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마르첼라 작성시간 13.12.02 존경하는 장재봉 신부님~~~
피정 잘 다녀오셨지요?!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 성서의 말씀이 정말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서 참 감사한 마음이랍니다.
신부님의 너무나 진솔한 마음의 말씀이 오히려 제게 더 많은 위로와 힘이 되네요.
그저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에 기대어
부족한 저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편찮으신 삼촌 신부님...기도중에 기억하겠습니다! -
작성자행복한눈물 작성시간 13.12.02 훌륭한 연주를 하려면 음표 못지않게 쉼표를 제대로 지켜야하는 것처럼
삶을 멋지게 연주하기 위해서는 쉼을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바쁘게 달려오신 신부님께 찾아온 쉼표! 그 쉼표가 명품 연주로 완성되리라 믿습니다.
삼촌 신부님과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시는 예수님을 뵙고
혼내 달라고 ....하신 그 마음 제게도 심겨지길 기도합니다.
고통 중에 계시는 주님을 번번히 알아 뵙지 못하는 아둔한 제가 당신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