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화엄경]반야는 佛母, 방편 원력은 佛父 - 보현행을 닦으면 성불한다! 2012년 통도사 화엄산림 법회 4부 세계성취품
작성자普賢작성시간23.04.04조회수35 목록 댓글 6[종범스님화엄경]반야는 佛母, 방편 원력은 佛父 - 보현행을 닦으면 성불한다!
2012년 통도사 화엄산림 법회 4부 세계성취품
https://www.youtube.com/watch?v=cPzwUDZNLok&t=28s
일체찰해의 모든 장엄이 무수한 방편과 원력으로 생기었다.
일체찰해가 항상 광명을 비추는 것이 한량없는 청정업으로 일어났다.
오랜 세월에 선지식을 친견하고 함께 닦은 선업이 다 청정하고, 자비의 광대함이 중생에 두루함이 이로써 모든 세계를 장엄함이다
세계를 깨끗하게 만드는데 세계를 깨끗하게 만드는 건 아주 간단해요.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 세계가 깨끗해진다. 세계는 각심소현, 보리 마음, 정각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 세계. 각심을 떠나 세계는 없다. 그러면 청정한 세계가 어디로 나왔나? 전부 청정각심에서 나온 것. 거기에 대한 게송임.
일체찰해는 모든 세계. 장엄은 꾸며진 것. 이것이 무수한 방편원력 생이라.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데는 어머니 아버지가 계셔야 한다. 싯달타의 어머니는 마야부인, 아버지는 정반왕. 화엄경 처음에 정각을 이룬 부처님은 싯달타가 아니다. 부처님이다.
부처님은 마야부인과 정반왕에게서 태어난 분이 아님. 부처님은 일각적조. 일각이 고요하면서 이 세계를 비추는 그 세계가 부처님이다. 일각이 적조하면 그 세계가 부처님인데, 일각이 적조하면 차제가 엄정이라, 차례가 다 장엄이 되어 있는데 그 장엄 하나하나가 청정하다. 그래서 세계를 깨끗이 하려면 깨달음을 얻으면 그 세계가 그대로 청정세계가 된다.
시성정각이 나오면서 바로 나오는게 그 땅이 견고해서 금강으로 되어있다는 말. 금강은 변하지도 않고 항상 빛나고 항상 유익한게 금강. 시성정각에 금강도량, 이게 화엄경이다.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고 나니까 그 땅이 금강도량이 된 것. 그래서 내가 깨달음을 얻으니 시방이 전부 장엄이고 시방이 전부 청정. 이게 화엄.
모든 세계가 어디서 나오나? 자기 광명 자기 공덕에서 나오죠. 일체찰해의 모든 장엄이 여러 방편 원력으로 나왔다. 방편 원력은 정각의 활용인데, 방편 원력은 정각에서 저절로 나온다. 그러면 방편 원력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게 되는 아버지!인 것. 방편이 없으면 부처님에게 아버지가 없다.
어머니는 그러면 누구냐? 색이 공함을 보는 반야, 그게 부처님의 어머니.
그래서 부처님의 어머니는 반야다. 그래서 반야는 불모, 방편은 불부. 그래서 부처님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야로써 색이 공함을 탁 보는 조견수행, 택법관공, 어떤 수행이든 선택해서 공임을 보는 것. 공이란 불생불멸인데, 일체만법이 불생불멸인 걸 보는 게 반야. 거기서 부처님이 탄생하는 것. 그런데 반야로부터 탄생한 부처님을 키우는 건 방편, 방편을 끝까지 잘 이어나가는 건 원력. 방편원력이 없으면 반야 관공에 의해 태어난 부처님을 키워낼 수가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아버지는 방편. 어머니는 반야.
반야심경에 보면 무수상행식, 몸뚱이가 공함을 보는게 반야. 몸뚱이가 불생불멸임을 보는 게 반야. 안이비설신의가 공함을 보는게 반야. 또 육식이 모두 공함을 보는게 반야. 역무노사, 늙고 죽는 게 없는 걸 보는 게 반야. 여기서 부처님이 나오는 것. 무지역무득, 공함을 아는 지혜까지 없는 걸 보는 게 반야. 또 거기서 얻은 열반도 불생불멸임을 보는 게 반야. 이렇게 공으로 태어난 부처를 잘 길러내는게 방편. 그래서 부처님은 반야가 불모, 방편이 불부. 방편을 통해 여러 공덕을 닦아 구경각을 이루는 것.
그런데 태어나기는 반야조견, 반야관조에서 태어난다. 그니까 성불하고 싶으면 반야조견을 하면 거기서 부처가 태어난다.
방편이란 이야기는 일체가 수행이라는 것. 보시를 하는데 복보보시를 하고 내가 오늘 복을 지으면 다음에 복을 받는다, 이것은 복보보시. 자식을 잘 키우면 덕을 본다, 이건 복보보시. 은행에 예금하면 나중에 찾지 않나? 이와 똑같은 것.
그런데 수행은 방편으로 하기에 내가 자식을 키우면 그걸 뭘 받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게 하나의 지혜를 닦는 방법. 보시를 하면 그게 나중에 보답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게 지혜를 닦는 방법. 그래서 뭘 하든 모두 지혜를 닦는 데로 돌린다. 그게 대승불교. 사람을 돕는 게 아니라 내 지혜를 닦는거다, 이게 전부 바라밀행. 그래서 성불하는 모든 행을 바라밀행이라 그런다. 저 부처의 세계로 가는 것. 그래서 이 세계가 다른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전부 공덕에서 나왓고, 그 공덕은 원력에서 나왔다.
집을 보면 집이 어디서 나왔나? 기둥도 있는데 집을 지을 때 원력은 안 보인다. 눈이 있으면 집을 보면 집 모양만 볼 게 아니라 집 지을 당시의 원력을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눈앞에 보이는 건 나의 공덕. 나이 많으신 분들은 혹시 그런 경험 있을지 모르는데, 나이가 들다 보면 눈앞에 뭐다 뱅뱅 도는 게 나타나는 병이 있다. 그걸 경에서는 털바퀴, 모륜이라 한다. 털바퀴가 왔다 갔다 하는 것. 안과에서는 그걸 비문. 있어서 뱅뱅 도는 게 아니라 노안이 되니 눈이 늙으니 도는 것. 눈앞에 털바퀴가 왔다 갔다...
내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하면 세계가 아주 청정하고 아름답다. 세계를 맑히기 위해서는 내 마음을 맑히는 것, 그게 아주 중요하고 부처님이 하신 게 그것. 그래서 세계의 얘기를 왜 하냐? 부처님의 깨달음을 얘기하기 위해 세계 얘기를 하는 것. 세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부처님의 깨달음을 말하는 것.
위리중생.......위리중생수승행...중생을 위해 (보현행을) 닦으시며/ 복덕광대상증장...복덕은 늘 증장하고/비유운포증허공...비유하자면 구름이 허공에 가득하듯/일체찰해개성취...일체 모든 국토를 성취하는 것과 같다
중생을 위해서 뭘 한다는 건 불교에서는 중생을 위해서 뭘 돕는 게 아니고 중생을 위해서 공덕을 닦으면 그게 성불하는 방법이다. 나무는 뿌리가 있어야 성장하듯 성불하기 위해선 중생을 위해 닦는 것이 뿌리가 되어 보리의 열매가 열린다. 중생을 뿌리요 깨달음은 열매. 일체중생이 나를 성불시키는 뿌리가 되는 것. 그게 대승불교의 발심이다.
중생 속에서 수행하는 게 홀로 수행하는 것보다 몇 배 천 배 어려운 것. 사람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사람들은 말 안 듣는다. 절대 말 안 듣는다. 사람만 말 안 듣는 게 아니라 동물도 말 안 듣는다. 고양이란 넘도 얼마나 말 안 듣고 버르장머리가 없다. 사람이 가도 일어날 생각을 안한다. 아무리 잘해줘도 가고 싶으면 그냥 가 버린다. 인정사정 그런 거 없다. 그걸 야속하게 생각하든지 댓가를 바라면 안 된다. 그걸 전부 좋게 보는 거여. 고양이가 그렇게 하는 것도 다 예쁘기 보고, 사람이 그래도 전부 좋게 보는 것.
그래서 원력을 가지고 방편으로 공덕을 닦는 사람은 섭섭한 마음이 없다, 왜? 전부 좋게 보니까! 그런 원력으로 그렇게 닦아가는 게 수행. 그것이 대승 불교 수행. 그런 원력과 공덕으로 세계가 다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와같이 되는 세계.
정수무등일체법, 생기무변xxx 종종방편화군생,
평등함이 없는, 똑같음이 없는 일체 차별한 법을 다 닦고,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제도.
발심한 보살이 닦는 경계는 말로는 이타행이 있는데 이타라는 게 모두 자리. 타라는 게 없다. 모든 게 자기. 이것이 불심. 다른 이가 없어져 버린다. 내가 보는 건 다 나다.
온갖 공덕을 닦는 것이 남을 돕는 게 없다. 자기 지혜 닦는 것. 온갖 공덕 닦는 걸 보현행이라 그러는데, 보현행은 온갖 공덕을 닦는 거거든요? 온갖 공덕을 닦는 보현행을 자꾸 실천해 나가면 어떤 결과가 오느냐? 보현행을 닦으면 성불하는 거다. 그래서 보현행원품에 보면 이보현행오보리, 보현행원으로 아뇩다라.를 깨닫는다.
중생을 가까이 하는 건 보리의 씨앗을 심는거다. 그 씨앗이 점점 자라 보리의 열매가 열리는 거다. 그게 화엄수행이요 그게 보현수행이요 원력수행. 그래서 이런 걸로써 국토를 장엄한다, 여실오장엄 여시국토해로다. 이렇게 되요.
이렇게 되어 공양일체제여래 하야 국토무변실청정이로다. 공양이라는 것도 부처님 앞에 뭘 갖다 드리는 게 아니고 나의 지혜를 닦는 게 공양. 그게 바로 보현행이고 방편행. 그런 보현행 방편행 공양행을 통해 반야에 의해 태어난 부처가 성장하는 거에요. 부처의 세계는 뭐냐? 도량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항상 계신다, 해서 도량.
통도사 도량이라 하면 통도가 전제가 도량. 그러면 통도사에는 어떤 부처님이 계신가? 중생들이 잘 못 느끼니 집을 지어놓고 집을 불전,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을 지어놓고 이름을 붙인다. 극락전=아미타불, 대광명전=비로자나불. 광명은 적광이라, 大라는 건 고요한 大이기에 양변이 없다. 이쪽 끝 저쪽 끝이 없다 가도가도 끝이 없다
또 시종이 없다. 언제 대가 시작됐는지 언제 대가 끝나는지... 그래서 그걸 대라 그런다. 시작을 헤아릴 수 없고 종말을 헤아릴 수 없다 또 양변이 없다, 저쪽 끝 이쪽 끝이 양변인데 이걸 헤아릴 수 없다.
시작과 끝을 생각하며 사는 게 우리 인간이고 이쪽과 저쪽 끝을 생각하며 사는 게 인간인데 이건 완전히 의식놀음. 생각 속에만 있는 거고 부처님의 正覺 속에는 없다. 그래서 깨달음이란 생각에서 정각으로 들어가는 것. 삶과 죽음이 전부 생각. 좋다 나쁜 게 전부 생각. 그러면 그 생각이 정각하고 동떨어졌나? 동떨어지지는 않았다. 자기 방에서 나그네 꿈을 꾸는 것처럼, 꿈꾸는 것과 같은 게 생각.
자기 집에 가만히 누웠는데 꿈을 꿨다. 그러면 나그네가 된다, 자기 집인 줄 모르고. 그게 생각이다. 그래서 아 내 죽겠다, 살려달라 밉다 좋다... 문제는 그게 죽겠다 좋다 밉다 하는게 생각에서 나온 것. 생각이 바뀌면 죽겠다 밉다 좋다 안할 수가 있다. 그니까 그 생각 보고 따라갔다가는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오늘 생각하고 내일 생각하고 틀릴 수가 있으니까.
그니까 간판을 전부 걸어서 대광명전 대웅전 금강계단 대방광 적멸보궁이다... 이런 게 전부 일각적조, 한 깨달음의 고요한 비침에서 나타난 일이다. 그러면 그 일각적조가 어딨느냐? 전부가 우리 몸 우리 생각에서 벗어난 게 아님. 그래서 화엄경은 우리 생각 우리 몸을 가지고 대광명의 세계를 바로 알고 대웅의 세계 금강계단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 해탈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 이것이 화엄.
오늘 다 설명할 수 없을 거 같아 게송을 하나 지어왔다.
안이비설명색신의, 우리 몸 전체, 명색신이 대방광불화엄전이다, 대방광불이 있는데 그게 어떤 부천고 하니, 화엄경에 10불이 있다. 몸이 십신이 있다. 보통 대승에선 삼신을 말하는데 화엄은 십신을 말한다. 중생신, 중생신이 대방광불의 몸이다.
온 일체 중생이 부처님 몸. 이거 참... 내 몸이 그대로 부처님 몸이다. 국토신, 온 국토가 대방광불의 몸이다. 화엄의 부처는 대방광불인데, 대방광불이 어떤가?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선업 지어 선보 받고 악업 지어 악보 받은 업보신, 성문신, 연각신, 보살신, 여래신, 지혜신 지신, 근본 몸이 부처님 몸인 법신, 허공신, 이게 부처님의 십신인데 이게 대방광불에요. 이런 몸이 전부가 부처님 몸. 우리 몸이 화엄전이다.
여기에 온갖 것이 다 있다. 여기에 대웅신도 있고 약사신도 있고 극락신 적멸신 금강신도 있고 안이비설 명색 신의가 그대로 화엄전이다. 그러면 이걸 어케 해야 하나? 화엄경에 원교인데, 원교는 일구에 무진장 설법이 다 있고 무진장 설법이 일구에 다 있는 이게 원교. 일미진에 시방세계가 다 있고... 이걸 원융이라하기도. 원융의 가르침을 펴는 게 원교.
오전에 안녕하세요 하는데 오전에 무량억겁이 다 있다. 정각으로 볼 때는 일찰나가 무량겁. 생각으로 볼 때는 일찰나는 일찰나 무량겁은 무량겁. 양변과 시종을 가르는 건 생각. 양변과 시종이 없이 찰나가 영겁이요 영겁이 찰나인 건 원교. 화엄경은 그걸 말하는 것.
그런 가르침을 펴기에 圓敎 寶門이라 함. 원만한 가르침 보배로운 문장. 이걸 善受持하면 잘 받아 간직하면. 어떻게 하는게 선수지? 경을 보고 마음을 보고 看文 看心. 첫째 딱 펼치면 글자를 본다 이게 간문. 거기서 끝나면 선수지가 안 된다. 마음을 봐야 한다 간심 그게 선수지. 경을 통해 마음을 본다! 이게 또 뭔 얘긴지... 경으로 시작해서 마음을 본다, 이거다.
경봉큰스님께서 화엄경을 보시다가 종일토록 다른 사람의 보물을 세는 것이 나한테 반푼어치 값도 안 나간다, 는 대목에서 발심을 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런 게 善受持.
글을 외우는데 멈추지 않고 마음을 꿰뚫어본다! 왜 그러냐? 우리 몸 전부가 대방광불 화엄전, 여기에 마음을 챙기면 일미진중 함시방, 일찰나가 무량겁. 바로 경을 펼치는 동시에 마음을 봐서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것.
그래서 선수지하면 시불(十佛)보현이 咸출현, 화엄경에 시불 세계가 있는데 이세간품에 가면 정각불 원불 업보불 주지불 열반불 법계불 심불 삼매불 본성불 수락불, 중생들이 좋아하는 대로 나타나는게 수락불. 십불 세계가 대방광불. 그 십불세계가 하는 일이 보현공덕행이다. 그래서 십불보현이 항상 출현한다.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로 말했다. 시작부터가 정각으로부터 시작됨.
화엄경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래서 그 깨달음의 세계를 의상스님은 법성이라 했다. 법의 본성, 법성이라는 물건은 원융이다. 원융은 둘이 없는 것 무이상. 거기에 도달하는 게 중도, 도달하는 걸 실제라 그럼.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 실제중도상이 법성원융에 도달하는 것. 그러면 억만 번 꿈을 꾸고 태어나기도 죽기도 했는데 그 법성원융 무이상 자리에서 털끔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것. 그래서 구래부동한 걸 아는 게 부처다. 그래서 법성게를 보면 화엄의 이치를 설명한 건데, 첫째가 법성원융무이상이고 마지막이 궁좌실제중도상 구래부동명위불로 끝남. 이걸 도표로 보면 불자와 법자가 딱 맞물려 있다.
화엄경이 어렵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려운 게 아니고 아주 쉽게 만들어놨다. 약찬게를 쭉 외우면 화엄경의 구성체계가 그대로 드러나고 법성게를 외우면 화엄경의 내용이 그대로 드러난다. 법문은 참고로 듣고 실제로는 약찬게 법성게 외우면 법성게을 외우면 화엄의 이치가 눈앞의 유리알처럽 보이고 법성게 외우면 화엄의 체계가 그래도 보인다 이게 옛날 선지식들이 가르쳐준 화엄 체계. 그래서 이걸 자꾸 수지독송하면 절대로 글 읽는 게 아니다.
간경은 간심, 경을 보는 건 마음을 보는 것. 마음을 보면 어케 되냐? 법성원융 무이상, 구래부동 명위불이 그대로 나타나고 구세십세호상즉이라 이게 말이 아니고 그대로 마음이기에 눈에 보일 때가 와요.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일미진중함시방, 한 티끌 속에 시방이 다 있다, 무량원겁 즉일념이라, 한 찰나에 무량원겁이 다 있다, 이걸 깨달을 때 인생 문제가 다 해결된다.
그래서 오늘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마음을 닦는 일. 마음 공부. 이게 아주 심각한 거다 지금. 오늘날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닦는 것. 그래서 무엇을 얻든 어디를 가든 자력행복을 얻을 수 잇어야 한다. 자기 힘으로 행복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자력행복을 못 얻으니 잘 보여서 행복하려고 하고 뭘 많이 가져서 행복하려고 누구 이겨서 행복하려고... 힘만 들지 맨날 나의 행복은 산너머 뜬구름. 그래서 우리 몸이 늘 대방광불 화엄을 닦는 궁전이다, 이렇게 딱 보고 내가 내 마음을 잘 닦아서 생노병사가 공함을 믿고 죽음을 무서워할 게 아니라 죽음을 무서워하는 내 마음이 뭔가. 죽음이란 없는 건데 내 생각으로 무서워하는 거거든요? 그니까 생각을 돌아보면 끝난다.
그래서 옛날 큰스님들이 살려달라고 막 소리치면 두 가지 가르침을 줌. 하나는 반야심경, 둘은 화두 들어라. 경봉큰스님은 어떤 젊은 스님이 죽겠다고 살려달라 하자 야야 화두 들어라 이러시더라구? 나는 그때 얼마나 스님이 원망스러웠는지 몰라요 사람이 큰스님이 인정머리가 있어야지!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하는데 화두 들어라 하니 그게 말이 되냐고! 그때는 나는 아주 충격을 받았다. 도인이 왜 저리 인정머리가 없냐고.
오늘날 와서 보니 그렇게 해야만 되는거더라. 살려달라는 마음을 돌아보면 없는 거에요 그게! 내 생각으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을 만들어내는 생각을 돌아보면 색즉시공, 끝나는 것. 그게 반야바라밀행. 마음을 자꾸 닦는데 보현행이 있다. 여러 가지 일은 남 좋게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닦는 일이다, 그래서 반야는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보현은 부처님을 양육시키는, 그러는 것이 다 지혜와 공덕으로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것.
똑바로 보면 지금 대한민국이 가난해서 행복하지 않은 게 아니다. 마음이 빈공해서 행복하지 않은 것. 원인을 알았으면 마음을 풍요롭게 갖는 노력을 해야지, 점점 더 많이 갖고 많이 알려는 것은 자발적 행복 능력이 없는 것. 숨을 쉬더라도 자발 호흡이 있어야 한다. 자발 호흡이 없으면 인공 호흡이 이게 아주 불안하다. 자발 호흡을 가지려면 스스로 원을 세워 스스로 공덕으로 마음을 닦는 일을 해야 한다.
2012년 통도사 화엄산림 법회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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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4.04 앞으로 시간 되는대로 종범스님의 화엄법문을 녹취 올릴 생각입니다. 배울 바가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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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4.04 다만 오늘 법문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우리 옛스승님들은 화엄경 공부에 약찬게 법성게만 강조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보현행원품!을 유독 강조하셨던 것이 우리 해동 스승님들이시지요.
제가 학문적으로 몰라서 그런데, 제가 아는 한 보현행원품을 화엄경에서 따로 떼어내어 하나의 완전한 경전으로 대중들에게 유통 시킨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을 겁니다. 중국은 그렇게 못했을 겁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만큼 그렇게 널리 유통 시키지는 못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화엄을 전수 받아 신라 이후 오히려 우리나라 화엄보다 더 화엄을 발전 시킨 일본도 그렇지 못했을 거에요.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4.04 법성게, 약찬게만 갖고는 화엄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제 개인 생각입니다.
무비스님도 실지 화엄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벌써 20여년 된 것 같은데 화엄경을 천 번 읽으면 된다! 고 하셨지요. 그리고 약찬게를 독송하라고도 하시고요. 보현행원품 독송은 이르시질 못했습니다. 아마 스님은 지금도 그러시지만 그때는 더욱더 화엄수행의 정수가 보현행원 실천인 걸 모르시는 것 같더군요.
보조스님께서도 탄식하셨듯, 선오비로자나법해 후수보현행해 라는 옛 화엄종의 전통이 그렇게 착각을 하게 만든 것 같아요. 修보현행해가 왜 悟비로법해인 것을 왜 모르시는지! 왜 그토록~~~~~~다들 모르시는지! 이보현행 오보리, 라고 떡하니 행원품에 나와 있는데! 또 그걸 다들 알고 법문에서도 인용하고 그러시는데! 왜 비로법해와 보현행해가 따로 있는지!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4.04 선오비로법계 후수보현행해 ㆍ원돈성불론 보조 지눌 - 부사모게시판법당 - 화엄경보현행원(부사모) - https://m.cafe.daum.net/bohhyun/HzNP/19167?searchView=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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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3.04.05 법문 내용이 감동적입니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쑥 들어오는 화엄법문도 참 오랜만입니다.
종범스님 늘 느리고 찬찬한 목소리로 법문해 주십니다. 법문 듣고 있으면 편안해 져요.
이 긴 글을 녹취하시고 정리해주신 보현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도 녹취하기 힘든데 그 연세에 이작업이 보통 일이 아니었을텐데요.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불국 이루리...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