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무분별로 분별을 안다 - 이게 반야의 지혜요 이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말씀은 화엄경에서만 볼수 있을겁니다!
작성자普賢.작성시간23.08.13조회수88 목록 댓글 13如是一切種種諸法을
我當以一念相應慧로
悉知悉覺하며
悉見悉證하며
悉修悉斷호대 然於其中에
이러한 종종 제법을 나는 한 생각에 상응하는 지혜로
모두 알고 모두 깨닫고 모두 보고 모두 증득하며
모두 닦고 모두 끊지만 그러나 그 중에
無分別하며 離分別하며
無種種하며 無差別하며 無功德하며 無境界하야
분별이 없고 분별도 떠나고
종종도 없고 차별도 없고 공덕도 없고 경계도 없으니
非有非無며 非一非二니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니
以不二智로 知一切二하며
이런 불이의 지혜로 일체 다른 것을 알며
以無相智로 知一切相하며
상이 없는 지혜로 일체 상을 알고
以無分別智로 知一切分別하며
무분별 지혜로 일체를 분별하며
以無異智로 知一切異하며
다르지 않음을 아는 지혜로 일체의 다름을 알며
以無差別智로 知一切差別하며
무차별 지혜로 일체의 차별을 알며
以無世間智로 知一切世間하며
세간의 지혜 없음으로 일체 세간을 알며
以無世智로 知一切世하며
세상의 지혜 없음으로 일체 세상을 알며
以無衆生智로 知一切衆生하며
중생지 없음으로 일체 중생을 알며
以無執着智로 知一切執着하며
집착이 없는 지혜로 일체 집착을 알며
以無住處智로 知一切住處하며
머무는 곳 없는 지혜로 일체에 머무르며
以無雜染智로 知一切雜染하며
오염되지 않는 지혜로 일체 오염을 알며
以無盡智로 知一切盡하며
다함없는 지혜로 일체의 다함을 알며
以究竟法界智로 於一切世界에 示現身하며
구경법계 지혜로 일체세계에 몸을 나투며
以離言音智로 示不可說言音하며
말과 음성을 떠난 지혜로 불가설한 말과 음성을 보이며
以一自性智로 入於無自性하며
하나의 자성지혜로 무자성에 들어가며
以一境界智로 現種種境界하며
하나의 경계로 종종 경계를 나타내며
知一切法不可說하야 而現大自在言說하며
일체법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알지만 그로써 대자재한 언설을 보이며
證一切智地하야 爲敎化調伏一切衆生故로 於一切世間에 示現大神通變化가 是爲第十無下劣心
일체지의 자리를 증득하여 교화조복 일체중생을 하는 고로,
세간에서 대신통 변화를 보이는 이것이 제10번째 열등감 없는 마음이다.
*보현 주
화엄경은 이렇게 이미 行 深! 반야바라밀다 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했다는 행심 반야바라밀다 반야행이 이미 화엄경엔 실천으로 나와 있어요
위와 같은 내용은 화엄경엔 여러 곳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 설해집니다! 반야가 따로 있어 반야행이 아니라 위 내용이 바로 반야행 에요!
분별 없는 곳은 空이요 분별이 있는 곳은 有지요 그래서 세상에 일체 분별이 없으면 空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空에 떨어져요 空에만 머무는 겁니다
그런데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곧바로 有로 나갑니다 空이 아니라 有가 되지요 그런데 이때 有는 홀로 있는 有가 아니라 空과 함께 있는 有에요 즉 眞空妙有 입니다
진공묘유! 그게 곧 반야 에요!
그래서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그건 바로 반야바라밀을 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비행! 입니다 왜냐? 없는 줄 알지만 중생을 위해 있는 걸 일으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단순한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만 아니라 반야에만 머무는게 아니라 반야행!을 그것도 깊게! 함으로써 마침내 모든것이 공함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함께 참으로 到피안 하게 되지요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에 의해
그래서 행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현.행! 입니다
행이 진실한 피안에 이르게 해요
이걸 禪에서는 보임 이라 하고요
禪은 마음을 먼저 見證한 것이고 화엄은 마음을 見證하기보다 說 즉 說心한 것이지요
견증은 말이 필요없어요 아주 단순하니 본걸로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說은 달라요 본 걸 말로 글로 나타내야 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됩니다
비유하면 금강산을 본 사람은 그냥 그걸로 끝납니다 왜냐 가슴에 깊이 바로 와 닿거든요 그래서 말이 필요없어요
그러나 금강산을 보고 집에 온 화가나 글쟁이가 그때 자기가 본 금강산을 표현하고자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눈만 껌뻑여서는 다른 사람이 금강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장황설이 벌어지는 겁니다
禪은 마음에서 시작됐고 화엄은 글에서 시작 됐지만 둘이 본건 똑같아요 진짜 똑! 같습니다 그래서 禪과 화엄은 분리 할수가 없어요 선 수행이 깊어지면 화엄경을 멀리 할수없고 화엄 공부가 깊어지면 禪을 소홀히 할수가 없어요
화엄의 대가 이셨던 탄허스님께서 방산굴에세 매일 새벽 일어나자 마자 참선을 하신 후에야 일과를 시작하셨다는 일화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반야와 반야행의 차이
반야는 그냥 이 세상이 空함 또는 묘유를 아는 겁니다 그냥 그 공함의 세계 묘유의 세계를 觀하고 그 속에 그냥 고요히 머무는 것이지요
반야행 또는 반야바라밀다는 공한 세계 분별 집착 없는 세계에서 괜스리 분별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냐? 중생들에게 반야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원래 공허해서 어디든 분별 집착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는 걸 중생들이 모르기에 그래서 자꾸 욕심내고 분별 집착하기에 그럴 필요가 업는걸 알려주려고 똑같이 망상 집착을 일으키는게 반야바라밀다 즉 반야행! 인 겁니다
그래서 단순 반야와 반야바라밀을 구분하는 것이고 반야라는 말에 굳이 바라밀다 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입니다
또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단순한 깨침이 아니라 자비행! 인 겁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안거 기간 동안 긴긴 삼매에 들어 반야를 알아 도피안 한게 아니라 반야를 안고 세상 속에 들어가 자비행을 깊고 넓게 하심으로 비로소 조견오온개공을 정말 아시게 되고 도피안 하게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와 보현은 만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다 행이 바로 보현행!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수와 보현이 만나게 돼요
화엄경은 이상할 정도로 문수와 보현을 혼동(?) 합니다 멀쩡히 가다가 때로 문수 자리에 보현을, 보현 자리에 문수를 갖다 놓죠 이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 광덕스님께서도 반야를 보시고 바로 보현행원으로 가셨지요 금정산이 당당한게 반야의 자리였다면 겁후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반야의 종소리는 보현행원 이었던거죠
그래서 제가 우리 큰스님을 잋을래야 잊을수 없는 겁니다
근래 경허스님 이후 얼마나 큰 스승님들이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이토록 반야를 그리고 보현행원을 일목요연하게 보신 스승님이 우리 큰스님 외에 누가 있으리요
큰스님의 반야활구 두 마디 즉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게 반야 및 일상삼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 이건 반야바라밀다 및 일행삼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8.15 禪은 마음에서 시작됐고 화엄은 글에서 시작 됐지만 둘이 본건 똑같아요 진짜 똑! 같습니다 그래서 禪과 화엄은 분리 할수가 없어요 선 수행이 깊어지면 화엄경을 멀리 할수없고 화엄 공부가 깊어지면 禪을 소홀히 할수가 없어요
화엄의 대가 이셨던 탄허스님께서 방산굴에세 매일 새벽 일어나자 마자 참선을 하신 후에야 일과를 시작하셨다는 일화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8.15 반야와 반야행의 차이
반야는 그냥 이 세상이 空함 또는 묘유를 아는 겁니다 그냥 그 공함의 세계 묘유의 세계를 觀하고 그 속에 그냥 고요히 머무는 것이지요
반야행 또는 반야바라밀다는 공한 세계 분별 집착 없는 세계에서 괜스리 분별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냐? 중생들에게 반야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원래 공허해서 어디든 분별 집착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는 걸 중생들이 모르기에 그래서 자꾸 욕심내고 분별 집착하기에 그럴 필요가 업는걸 알려주려고 똑같이 망상 집착을 일으키는게 반야바라밀다 즉 반야행! 인 겁니다
그래서 단순 반야와 반야바라밀을 구분하는 것이고 반야라는 말에 굳이 바라밀다 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입니다
또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단순한 깨침이 아니라 자비행! 인 겁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안거 기간 동안 긴긴 삼매에 들어 반야를 알아 도피안 한게 아니라 반야를 안고 세상 속에 들어가 자비행을 깊고 넓게 하심으로 비로소 조견오온개공을 정말 아시게 되고 도피안 하게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와 보현은 만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다 행이 바로 보현행!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수와 보현이 만나게 돼요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8.15 화엄경은 이상할 정도로 문수와 보현을 혼동(?) 합니다 멀쩡히 가다가 때로 문수 자리에 보현을, 보현 자리에 문수를 갖다 놓죠 이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 광덕스님께서도 반야를 보시고 바로 보현행원으로 가셨지요 금정산이 당당한게 반야의 자리였다면 겁후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반야의 종소리는 보현행원 이었던거죠
그래서 제가 우리 큰스님을 잋을래야 잊을수 없는 겁니다
근래 경허스님 이후 얼마나 큰 스승님들이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이토록 반야를 그리고 보현행원을 일목요연하게 보신 스승님이 우리 큰스님 외에 누가 있으리요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8.15 큰스님의 반야활구 두 마디 즉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게 반야 및 일상삼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 이건 반야바라밀다 및 일행삼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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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하호호 작성시간 23.08.15 귀중한 법문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