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경 무분별로 분별을 안다 - 이게 반야의 지혜요 이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말씀은 화엄경에서만 볼수 있을겁니다!
작성자普賢. 작성시간23.08.13 조회수0 댓글 13댓글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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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8.15 분별 없는 곳은 空이요 분별이 있는 곳은 有지요 그래서 세상에 일체 분별이 없으면 空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空에 떨어져요 空에만 머무는 겁니다
그런데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곧바로 有로 나갑니다 空이 아니라 有가 되지요 그런데 이때 有는 홀로 있는 有가 아니라 空과 함께 있는 有에요 즉 眞空妙有 입니다
진공묘유! 그게 곧 반야 에요!
그래서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그건 바로 반야바라밀을 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비행! 입니다 왜냐? 없는 줄 알지만 중생을 위해 있는 걸 일으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단순한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만 아니라 반야에만 머무는게 아니라 반야행!을 그것도 깊게! 함으로써 마침내 모든것이 공함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함께 참으로 到피안 하게 되지요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에 의해
그래서 행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현.행! 입니다
행이 진실한 피안에 이르게 해요
이걸 禪에서는 보임 이라 하고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8.15 禪은 마음을 먼저 見證한 것이고 화엄은 마음을 見證하기보다 說 즉 說心한 것이지요
견증은 말이 필요없어요 아주 단순하니 본걸로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說은 달라요 본 걸 말로 글로 나타내야 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됩니다
비유하면 금강산을 본 사람은 그냥 그걸로 끝납니다 왜냐 가슴에 깊이 바로 와 닿거든요 그래서 말이 필요없어요
그러나 금강산을 보고 집에 온 화가나 글쟁이가 그때 자기가 본 금강산을 표현하고자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눈만 껌뻑여서는 다른 사람이 금강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장황설이 벌어지는 겁니다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8.15 반야와 반야행의 차이
반야는 그냥 이 세상이 空함 또는 묘유를 아는 겁니다 그냥 그 공함의 세계 묘유의 세계를 觀하고 그 속에 그냥 고요히 머무는 것이지요
반야행 또는 반야바라밀다는 공한 세계 분별 집착 없는 세계에서 괜스리 분별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냐? 중생들에게 반야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원래 공허해서 어디든 분별 집착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는 걸 중생들이 모르기에 그래서 자꾸 욕심내고 분별 집착하기에 그럴 필요가 업는걸 알려주려고 똑같이 망상 집착을 일으키는게 반야바라밀다 즉 반야행! 인 겁니다
그래서 단순 반야와 반야바라밀을 구분하는 것이고 반야라는 말에 굳이 바라밀다 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입니다
또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단순한 깨침이 아니라 자비행! 인 겁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안거 기간 동안 긴긴 삼매에 들어 반야를 알아 도피안 한게 아니라 반야를 안고 세상 속에 들어가 자비행을 깊고 넓게 하심으로 비로소 조견오온개공을 정말 아시게 되고 도피안 하게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와 보현은 만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다 행이 바로 보현행!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수와 보현이 만나게 돼요 -
작성자 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23.08.15 화엄경은 이상할 정도로 문수와 보현을 혼동(?) 합니다 멀쩡히 가다가 때로 문수 자리에 보현을, 보현 자리에 문수를 갖다 놓죠 이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 광덕스님께서도 반야를 보시고 바로 보현행원으로 가셨지요 금정산이 당당한게 반야의 자리였다면 겁후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반야의 종소리는 보현행원 이었던거죠
그래서 제가 우리 큰스님을 잋을래야 잊을수 없는 겁니다
근래 경허스님 이후 얼마나 큰 스승님들이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이토록 반야를 그리고 보현행원을 일목요연하게 보신 스승님이 우리 큰스님 외에 누가 있으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