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장. 그 누구라도 임종할 때
凡人 臨命終時 但觀 五蘊皆空이요 四大無我니라.
眞心은 無相이어 不去不來이니 生時 性亦不生이요 死時 性亦不去니라.
湛然圓寂이어 心境一如니라.
但能如是 直下頓了하여 不爲三世所拘繫해야 便是出世自由人也라.
若見諸佛이나 無心隨去하고 若見地獄이나 無心怖畏니라.
但自無心하여 同於法界이니 此卽是要節也라.
然則 平常是因이고 臨終是果이니 道人은 須着眼看이어다.
그 누구라도 임종할 때 오직 오온이 모두 공(空)이요 四大에 ‘내가 없음’을 보아야 한다.
참마음은 어떠한 형상이 없으므로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니, 이 몸이 생길 때 그 성품도 생겨나는 것이 아니요 이 몸이 죽을 때 그 성품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맑고 고요하여 오롯해서 마음과 경계가 하나이다.
오직 이와 같이 단숨에 깨쳐 삼세의 인과에 얽매이지 않아야 바로 세간을 초월하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를 만나도 따라가려는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아도 두렵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없다.
오직 스스로 무심하여 법계와 하나가 되어 같아질 뿐이니 이것이야말로 공부의 뼈대라고 할 수 있다.
살면서 지은 업이 씨앗이 되고 죽음에 이르러 그 열매를 맺게 되니 도를 닦는 사람들은 이 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註解》
怕死老年에 親釋迦로다.
죽음이 두려운 늘그막에 부처님을 가까이 하도다.
頌
好向此時明自己
百年光影轉頭非.
이때 자신의 마음을 애써 밝혀야 하니
백 년 세월도 순식간에 그르치리라.
출처: 선가귀감, 서산대사 지음, 원순 역해, 도서출판 법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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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普賢. 작성시간 24.02.28 凡人 臨命終時 但觀 五蘊皆空 四大無我 - 여기서 觀을 원순스님은 '보는 것'으로 번역했는데, 원순스님은 이런 점이 늘 아쉬워요.
여기서 觀은 보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觀하는 겁니다.
보는 건 이미 의식이 작용하는 작위지요.
관은 일종의 무심의 경지에서 지긋이 바라보는 겁니다.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는 걸 아무 생각없이, 무념 상태에서 바라보는 건데, 이 차이는 매우 크지요.
한문 번역할 땐 정말 글자 하나하나를 신중히 해야 합니다.
근대 일본 학자들이 유럽 학자들처럼 산스크릿어를 배우면서 한문 경전을 보며,
한문의 그 은유적이고 여러 갈래로 해석되는 특유의 특성 땜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산스크릿어는 오히려 직설적이라 해요.
그래서 해석에 별 오해나 망설임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문은 그게 아니거든요?
똑같은 한자라도 문맥에 따라 의미가 은근히 달라져요.
그래서 옛날에도 그랬고 우리 큰스님도 번역할 때 오해 빚을 수 있는 문맥은 한문 그대로 갖다 쓰시곤 했지요.
오늘 이 부분도 저는 그냥 관하라, 고 하는게 더 낫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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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시간 24.02.28 한자로 일반적으로 본다(look),할 때는 볼 見자, 또는 볼 睹자를 씁니다
觀도 본다라고는 하지만 개념이 좀 달라요 -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2.28 그런 의미에서 임종하시는 분 앞에서 반야심경을 읽어드리는 건 참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물론 다른 경전도 읽어드리면 더 좋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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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리는 하나 작성시간 24.02.28 윗글이 서산대사께서 직접 하신말씀인지아니면 다른 곳에서 따온 내용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내용만 본다면 선종의 글귀같기는 합니다.
어쨌던 그런 서산대사도 극락발원을 하셨다고 하네요.
조선시대의 최고의 고승인 서산대사조차,우리는 흔히 서산대는 참선만 열심히 하셨던 분으로 알고 계신데,아니랍니다.
서산대사문집을 보면 서산대사께서도 당신의 문집에 발원문이 남겨져 있는 데 발원문에 “제가 목숨이 다한뒤 반드시 극락세계에 태어나 아미타 부처님
을 만나 뵐수있게 해주십시요”라고 하는 발원문이 서산대사문집에 남아있다고 합니다.
전투중에 죽은 스님들에게도 극락발원을 하셨을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산대사께서 윗글처럼 말씀을 하셨다면 좀 의외네요
잘못 전달됐다고 봅니다. -
작성자누리달 작성시간 24.02.28 이 뭐꼬!
행행본처 지지발처 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