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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모게시판법당

선스승의 편지- 3-2. 빙그레 웃는 마음 又

작성자보문|작성시간24.07.09|조회수41 목록 댓글 7

3-2. 빙그레 웃는 마음 又

  

 

不見昔日灌谿和尚初參臨濟濟見來便下繩床하여 驀胸擒住하니 灌谿k 便云 領領이라. 知其已徹하여 即便推出하고 更無言句與之商量하니라. 當恁麼時灌谿如何思量計較祗對得이리오. 古來幸有如此牓樣인데 如今人總不將為事하고 只為麁心이로다. 灌谿當初若有一點이라도 待悟待證待休歇底心在前이면 莫道 被擒住便悟니라.

 

그대는 보지 못했습니까. 예전에 관계(灌谿) 화상이 처음 임제 스님을 찾아옴에, 임제 스님은 이를 보고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바로 내려와 갑자기 그 분의 멱살을 움켜잡았습니다. 그러자 관계 화상이 문득 알았습니다,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임제스님은 그가 이미 크게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고는 곧 놓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말을 가지고 그와 옳거니 그르거니 시비를 따진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 관계 화상이 어떻게 헤아려서 견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임제 스님을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옛날부터 이처럼 본받을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람들은 조금도 이것을 공부하는 일로 삼지 않고, 다만 거친 마음으로 보기만 합니다. 관계 화상이 처음부터 깨달음을 기다린다거나 모든 경계가 사라져서 쉬어질 자리를 찾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앞에 있었다면 멱살을 잡히자 문득 깨달았다고 말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便是縛却手脚하여 遶四天下 拕一遭라도 也不能得悟이며 也不能得休歇이니라. 尋常計較安排底是識情이고 隨生死하여 遷流底亦是識情이며 怕怖慞惶底亦是識情이라. 而今參學之人不知是病하고서 只管在裏許頭出頭沒하니라. 教中所謂 隨識而行不隨智니라. 以故昧却本地 風光本來面目이니라.

 

바로 손과 다리를 꽁꽁 묶어서 동서남북 천하를 돌며 한 바퀴 빙 돌아다닌다 할지라도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경계가 사라져서 마음이 쉴 자리를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소 헤아려서 견주려는 마음이 중생의 알음알이이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따라서 흘러 다니는 것도 중생의 알음알이이며, 두려워하거나 당황하는 것도 중생의 알음알이입니다. 지금 참선하는 사람들은 이 병을 알지 못하고서, 다만 중생의 알음알이 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할 뿐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중생의 분별을 따라서 행하고 부처님의 지혜를 따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때문에 본지풍광과 본래면목에 어두운 것입니다.

 

若或一時放得下하여 百不思量計較이면 忽然 失脚하여 蹋著鼻孔하니 即此識情便是真空妙智로서 更無別智可得이니라. 若別有所得 別有所證則 又却不是也如人迷時에는 喚東作西이다가 及至 悟時即西 便是東이기에 無別有東이니라. 此真空妙智與太虛空齊壽니라. 只這太虛空中還有一物이라도 礙得他否. 雖不受一物礙而不妨諸物於空中往來니라.

 

만약 한꺼번에 모든 것을 놓아서 헤아려 견주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면 문득 라는 생각이 사라져서 본분사 언저리에 닿을 것입니다. 곧 중생의 알음알이가 바로 진공묘지로서 다시 달리 얻을 수 있는 슬기로움이 없습니다. 만약 달리 얻거나 증득할 것이 있다면 이는 도리어 옳지 못합니다. 마치 사람이 미혹할 때는 동쪽을 서쪽이라 부르고 있다가, 진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서쪽 자체가 바로 동쪽이기에 달리 동쪽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진공묘지는 커다란 허공과 똑같은 수명을 갖고 있습니다. 이 커다란 허공 가운데 한 물건이라도 허공을 장애 할 만한 것이 있겠습니까. 비록 방해받을 한 물건이 없더라도, 허공 가운데에 모든 사물이 오고 가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此眞空妙智亦然하여 生 死凡聖垢染著一點不得이라. 雖著不得이나 而不礙生死凡聖於中往來. 如此信得及見得徹해야 方是箇出生入死得大自在底漢이라 始與趙州放下着 雲門須彌山有少分相應이니라. 若信不 及放不下이면 却請컨대 擔取一座須彌山하고 到處行脚하여 遇明眼人이거든 分明舉似하라. 一笑하노라.

 

이 진공묘지도 또한 그러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와 범부와 성인이란 잘못된 개념이 한 점도 붙을 수 없습니다. 진공묘지에 번뇌가 한 점 붙을 수 없더라도 이 가운데 삶과 죽음의 문제와 범부와 성인의 차별이 오고 가는 것을 방해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믿어서 확실히 보아야 생사에 큰 자유로움을 얻는 사람입니다. 비로소 조주 스님의 방하착과 운문 스님의 수미산화두와 조금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믿지 못하여 중생의 알음알이를 놓아 버리지 못한다면, 청하건대 수미산 하나를 짊어지고 곳곳마다 다니면서 눈 밝은 선지식을 만나거든 견처를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시기 바랍니다. 빙그레 웃는 저의 마음을 아시는지요.

 

사람들은 대개 분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시비를 잘 분별해서 득실을 잘 따져야 똑똑한 사람이라고 한다. 보통 세상에서는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복잡해져 사람들의 마음이 편치가 않다. 시비가 시비를 낳고 득실이 득실을 낳으니 한없이 욕망이 커져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행복해지려면 헛된 욕망을 키우지 말아야 한다. 시비분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출처: 스승의 편지 , 대혜 종고 서장, 원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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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普賢. | 작성시간 24.07.10 오늘 이 글은 분별심에 대한 법문입니다
    공부가 익을수록 분별이 사라지지요
    차별 속에 그대로 평등을 봅니다
  • 작성자普賢. | 작성시간 24.07.10 그리고 일념이 일어나지를 않아요
    늘 잔잔한 물결 그대로입니다
    그 속에 실상이 그대로 보이지요
  • 작성자普賢. | 작성시간 24.07.10 참선만 하면 망상이 인다고 사람들은 아우성입니다.
    초보 때는 그래요.
    그러나 공부가 익기 시작하면 망상이 일지를 않습니다
    신기하죠?
  • 작성자법혜 | 작성시간 24.07.12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청정수1 | 작성시간 24.07.16 고맙습니다.
    분별이 없는 자리, 아득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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