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하면, 보현행원에는 불교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우선 수행면에서 보면 우리가 수행을 할 때 원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데 보현행원은 처음부터 원으로 들어가는 수행이다. 원을 세우고 그 원 속에서 우리의 모든 수행 하나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발보리심의 문제도 보현행원으로 해결이 되니,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발심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수행의 자세 역시 염념상속, 무유간단, 무유피염의 세 가지로 우리가 어떤 자세로 수행을 임해야 할지 분명하게 일러준다.
또 수행은 믿음이 중요하고 해행(解行)이 중요한데 보현행원은 이미 그 가르침에 신해행증이 들어있다(제2장 참고). 따라서 보현행원은 그 어떤 수행보다 믿음이 저절로 샘솟게 한다.
자비 문제도 그렇다. 자비의 실천은 말은 좋은데 참 막연하다. 구체성이 없다. 그런데 공경 칭찬 섬김 수순이 바로 자비다 그것도 구체적 자비행이다. 즉 보현행원이 바로 자비행인 것이다.
다른 수행과의 관계는 어떨까. 보현행원은 그 자체가 염불이요 사마타 위빠사나요 참선이요 명상, 기도이다. 보현행원을 하면 저절로 부처님을 늘 염하게 되고 지관이 오며 명상과 기도가 되는 것이다.
깨달음마저 저절로 오게 한다. 더욱이 행원 하나하나에 이르면 불교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보현행원은 명확하게 알려준다.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고 공경, 찬탄, 섬기고 모시는 삶이 그것이다.
보현행원의 특징 중 하나는 매사를 둘로 나눠 보는 ‘이분법’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보현행원에서는 수행과 일상 삶이 둘이 아니다. 모든 것이 ‘하나’다. 화엄은 이분법을 철저히 경계한다.
화엄은 언제나 ‘다르되(또는 따로 있되) 하나’다(상즉상입은 우리 눈에 다르게 보이는 일체가 원래 하나임을 뜻). 놀기는 따로 놀지만, 존재할 땐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놀 때는 차별이 있지만, 존재할 땐 아무 차별이 없다. 오직 하나의 화엄세계[一眞法界], 하나의 부처님세계[佛華嚴]만 있을 뿐이다.
원효도 본업경소에서 “불지에 이르면 둘을 여의고 오직 하나이므로 그 하나를 일도(一道)라 이른다. 이와 같이 일제(一諦)가 잘 통하여 막힘이 없고, 제불의 도(道)가 동일하기에 일도라 이름한다”라 하여, 궁극의 자리에서는 모두가 하나 됨을 말한다.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Brian Greene)은 이 우주는 분리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대 과학도 우주의 실체를 ‘분리될 수 없는 전체(The Undivided Wholenss)’로 보고 있다.
보현행원에서 수행과 삶이 둘이 아닌 이유 역시 이처럼 애시당초 수행과 삶은 둘이 아니었기[不二] 때문이다. 마치 시간과 공간이 실은 하나인데(시공간) 그동안 과학이 시간과 공간이 다른 것인 줄 알아왔듯, 분리할 수 없는 것을 분리하고 분리한 것조차 몰랐기에 그동안 삶과 수행에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진제·속제도 마찬가지니 이 역시 원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에도 진속을 구분하여 속제는 싫어하고 진제만 찾아 헤맨다.
보현행원은 이런 모든 착각을 깨뜨려 준다. 그리하여 분리될 수 없는 본래의 하나로 되돌려 준다. 원효의 말처럼 하나됨으로 가는 것이다.
화엄경에는 일체의 법문이 포함되어 있어서 일체 가르침은 화엄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며 화엄의 바다에서 하나 된다고 하는데, 보현행원 역시 일체의 수행과 가르침을 섭수하며 하나로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한다(如四大河 奔忙流入海 經於累劫 亦無疲厭 菩薩亦復如是 以普賢行願 盡未來劫 修菩薩行 入如來海 不生疲厭. 십정품).
불교 수행의 문제점 중 하나가 대부분을 ‘따로 짓는 것’이다. 하심, 복덕자량, 삼매, 깨달음 등을 한 번에 하지 못하고 각각 분리해서 짓는 것인데, 이제는 한 번에 이루어야 할 시절인연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가르침이나 수행을 보면 이처럼 모두 각각 ‘따로’ 해야 얻을 수 있으며 삶과 수행이 분리되어 있다(예:복 짓고 참선하고 자비행하고...).
그런데 수행이든 삶이든 하나로 지어 가야 원만하고 완전해진다. 수행과 삶이 분리되지 않고 복 따로 지혜 따로 또 선정 따로가 아니라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이뤄야 하는 것이다. 내 삶이 선정이고 내 삶이 지혜요 내 삶이 복이며 내 숨결이 바로 자비의 숨결이 되어야 하는 것인데, 보현행원은 이 모두를 이렇게 ‘따로’가 아니라 ‘한 번’에 이루게 한다.
어떤 분은 “수행과 보현행원이 ‘함께’ 가야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정확한 것은 못 된다고 하겠다. 이 말 속엔 이미 수행과 보현행원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보현행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이 ‘따로 보는 것(따로 국밥)’이다. 수행이 따로 있고 보현행원이 또 따로 있어서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수행 그 자체가 ‘바로 보현행원’임을 알아야 한다.
참선한 후 보현행원을 다시 따로 다른 곳에서 찾아 하는 게 아니라, 참선하는 그 자리가 바로 보현이 실현되는 자리다(염불보현행원은 공경 찬탄의 마음으로 염불). 좌복에 앉는 것이 부처님 공경 공양과 무관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미세한 차이 같지만 아주 큰 차이다.
우리는 늘 개인적 성취(上求菩提)와 사회적 책임(下化衆生) 사이에서 고민한다. 내 욕심을 따르자니 이웃 보기 민망하고, 내 욕심을 포기하자니 그러기에는 내 성취욕이 너무 크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개인적 성취와 사회적 책임을 함께 이루게 한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을 하는 한 우리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보현행원은 깨침과 보살행이 같이 가는 가르침이요 깨달음의 길과 보살의 길이 다르지 않은(不異) 가르침이다. 보현행 하나만 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이 모두 실현된다.
한국 불교계의 두 가지 큰 문제점이 사회적 책임은 도외시 한 채 나만 깨쳐서 부처 이루려는 ‘도인불교’와 내 복만 비는 ‘기복불교’인데, 보현행원은 개인적 성취(깨달음, 기복)와 사회적 책임(선행, 자비행)을 동시에 이룬다.
상구보리하고 나중에 하화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화중생 자체가 상구보리의 길이니, 보현행원이 바로 상구보리의 깨침의 길이요 또한 동시에 하화중생의 보살행이다. 보현행원 하나에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이 같이(不二) 있다.
보현행원은 세상 그 자체에 있다. 삶을 살면 삶이 보현행원, 수행을 하면 수행이 보현행원이다. 밥 먹는 것이 보현행원이며 잠자는 것이 보현행원이며 이웃을 돕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보현행원이다. 보현의 원과 행 속에서 수행과 내 생명의 불이 타오르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 내 수행 내 삶이 바로 보현의 원과 행이 되지 못하면 보현행원은 영원히 없다.
이러한 보현행원을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간과해 온 듯하다. 깨달음과는 상관없고 화엄경을 다 배우고 난 뒤에야 하는, 마무리용 가르침 또는 깨닫고 나서 따로 해야 하는 자비의 실천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40화엄의 보현행원품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40화엄을 편집한 편찬자들의 말할 수 없는 정성과 깊은 뜻이 담겨있다. 행원품 본문 글자 하나를 봐도 그냥 선택된 것들이 아니다. 화엄경 전반에 걸친 수많은 글자 중 가장 대표적이고 핵심적인 글자들만 들어있다. 그만큼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 깊은 정성,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화엄경 맨 끝에 나오는 간단한 결론 정도로만 알고 화엄경 가르침과 연관 짓지 못하고 그냥 따로 자구 해석만 하고 흘려보내니, 어찌 아쉬움이 없지 않겠는가.
달라이 라마는 21세기 모든 인류가 보편적으로 가져야 할 가르침을 현재 찾고 있다고 한다. 즉, 종교적 전통의 경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가치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선이라든가 자비심 같은 가치들을 사회적으로 고양할 수 있는 가르침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그것이 ‘보현행원’이다. 보현행원을 하면 종교, 인종, 심지어 동식물을 가릴 것 없이 모두가 달라이 라마가 지향하는 사랑과 자비,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고양할 수 있다.
그런데 아마 달라이 라마께서는 보현행원을 모르시나(?) 보다. 보현행원을 아셨(?)으면 틀림없이 보현행원이 그렇게 당신이 찾던 가르침임을 말씀하실 텐데, 지금껏 아무 말씀이 없다.
보현행원은 종교적 경계를 초월하며, 윤리적이며 저절로 선행, 선업으로 인도하며 선한 본성을 기르며 저절로 자비심이 증장되는 가르침임에도 보현행원 언급이 없는 것이다. 유위의 보현행이야말로 달라이 라마가 그토록 찾는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갖춰져 있는 선한 본성인 종교와 무관한 윤리’인데 참 안타깝다. 달라이 라마께서 보현행원을 언급하시면 보현행원이 당장 지금 전 세계적으로 보현행원이 연구될 터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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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0.07 벌써 20년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예전에 동화사에서 화엄에 관한 대토론회(무차대회?)가 열린 적이 있었지요.
여러 스님들이 화엄경에 대해 발표하는 자리였는데, 거기 오신 무비스님이 강의가 끝나자 질문 시간에 이런 질문이 나왔지요. 화엄경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느냐고. 그때 무비스님의 대답이, 화엄경을 삼천번인지 오천번인지 읽으면 된다고 하셨지요. 질문자뿐 아니라 대중들이 망연자실했고요.
또 여기에선가 다른 자리에선가, 스님은 화엄 수행으로 약찬게를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자리에서든 보현행원품 읽으라, 또는 보현행원 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어요. 무비스님 같은 대강백이 그러하셨습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0.08 사실 40화엄의 보현행원품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40화엄을 편집한 편찬자들의 말할 수 없는 정성과 깊은 뜻이 담겨있다. 행원품 본문 글자 하나를 봐도 그냥 선택된 것들이 아니다. 화엄경 전반에 걸친 수많은 글자 중 가장 대표적이고 핵심적인 글자들만 들어있다. 그만큼 정성과 심혈을 기울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 그 깊은 정성,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화엄경 맨 끝에 나오는 간단한 결론 정도로만 알고 화엄경 가르침과 연관 짓지 못하고 그냥 따로 자구 해석만 하고 흘려보내니, 어찌 아쉬움이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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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청정수1 작성시간 24.10.10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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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10.11 우리나라에 보현선생님같이 이론과 실제를 갖추신 분이 또 계실까 싶습니다.
언젠가 실천 보현행원이 시방세계 곳곳에 깊이 스며들고 꽃 피울 날이 올겁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답댓글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10.11 보현행원만 하면 된다!
아무리 이 말씀을 해드려도 다들 믿지를 않습니다
하나만 하면 전부를 이루고 전부를 알게 되는데,
그 하나는 하지 않고 모두 각각 따로 따로를 그렇게 좋아해요
그리고 다들,
그렇게 따로 분야에서 대가가 됩니다
그리고 따로 있으면서 하나로 통합을 못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