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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행원과 깨달음

작성자普賢.|작성시간24.10.10|조회수107 목록 댓글 14

보현행원과 깨달음

 

보현행원을 말하다 보면 반드시 깨달음의 문제에 부딪친다. 보현행원은 참 좋은 것이다, 그런데 과연 보현행원으로 깨달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해 대부분은 보현행원은 좋기는 하지만 깨달음과는 상관없기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수행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해서 깨달음을 얻은 후 그때서야 보현행으로 나아가겠다고 한다. 아니면 깨치면 보현행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니까 굳이 지금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화엄경』에 처음부터 보현행이 펼쳐지는 것을 보지를 못하고 화엄 따로 보현행 따로, 깨달음 따로 보살행 따로… 그렇게 알며 줄창 화엄만 붙잡고 있다가 화엄을 다 배운 뒤에 마지막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보현행인줄로만 알고 왔던 것이다.

 

이것이 먼저 비로법계를 깨닫고 그 후에야 보현행(先悟毘盧法界 後修普賢行願)하는 전통적인 기존의 견해다. 이러한 오해는 40 화엄경이 나온 뒤에도 여전한 것 같다. 오히려 대본화엄경과 달리 40 화엄경에 마지막으로 보현행원품이 따로 삽입되자 이제는 정말로화엄경결론이 보현행이라 생각하고 보현행을 오직 보현행원품강의 때만 언급하는 수준이 되어버린 듯하다. 결론이 보현행원이니까 그 전에는 보현행원을 공부할 필요가 없고 화엄을 먼저 공부하고 결론 낼 때만 보현행원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보현행을 언급하는 화엄경내용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화엄은 그저 중국 화엄종 사람들의 이야기만 정설이 되어 내려온다. 그리고 화엄경의 연구는 없고 화엄종의 화엄학 연구만 있다. 문제는 화엄종의 화엄학 강의에는 보현행 강의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화려한 화엄학만 있을 뿐이다.

 

많은 분들이 행원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데 행원에서의 깨달음은 이미 논란이 끝난 사건이다. 우리는 이미 깨달아 있으며 행원은 이미 깨달음을 뛰어넘은 가르침인 것이다. 행원을 할 때 우리는 이미 ‘깨달음 너머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행원은 깨닫기 위해 쓰는 힘을 ‘부처로 살아가는데 써라’고 가르친다.

 

화엄의 관점은 번뇌가 변해 보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 중생이 수행을 해서 그 공덕으로 부처를 이루는 것도 아니다. 지금 이 자리가 부처 자리 또는 부처 이룰 자리이며 깨달음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 바로 ‘나의 소식’인 것이다. 따라서 부처 이룰 생각하지 말고 부처로 살아가라! 깨달음을 이루려 하지 말고 깨달은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불자들 사이에도 부처님처럼 살자는 운동이 물결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인지, 그 방법의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구체성의 부족인 셈인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로 사는 것인가? 필자는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보현행원의 언급은 아직 없는 듯하다. ‘부처님으로 살자, 그리고 그 길이 보현행원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 정말 얼마나 좋을까? 보현행원은 하는 것만큼 부처가 된다. 한 번을 하면 한 번 부처님, 열 번을 하면 열 번 부처님 되는 것이다.

 

실지로 보현행을 하면 평범하고 무의미하던 일상사가 새롭게 다가온다. 작은 일들이 소중하게 다가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은 깨달음은 곳곳에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하여 마침내 온 산하를 태우는 거대한 불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번뇌가 점점 적어지며 일상생활 그 자체가 선정의 상태로 늘 깨어있는 상태가 되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점차 수많은 부처님이 출현하시게 된다. 부처님의 출현! 그것은 그대로가 깨달음이다.

 

육조혜능은 “반야행을 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면 견성한다.”고 말한다. 반야행은 자비행이며 보현행 역시 자비행이다. 따라서 보현행으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 『화엄경』에도 ‘보현행원은 부처님행이며 보현행원으로 깨닫는다.’는 말이 여러 곳에서 나온다.

 

보현행원은 나날이 내 생명을 성장시키는 가르침이다. 행원으로 우리는 진리의 삶을 살며 행원으로 우리의 진리 생명은 나날이 성장을 더해 간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룬다는 말도 따로 이룩할 보리라는 게 있어서 그것을 보현행원으로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보현행원을 함으로써 순간순간 찰나찰나를 진리생명으로 살고 진리 생명으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게 찰나찰나 진리로 피어나는 꽃, 그런 진리 생명의 꽃들이 만발한 세계를 화엄(佛華嚴)이라 한다.

 

굳이 보현행원이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근거를 경론에서 찾는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으니 하나는 금강경, 둘은 기신론이다. 금강경은 무아 무상의 자리에서 일체 선업을 지을 것을 가르치고, 그렇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한다.

 

기신론 역시 일체의 선업을 짓는 것이 자연히 진여법으로 가는 길이 된다고 이른다. 또한 기신론은 진여의 세계에 오입(悟入)하는 방법으로 주체와 객체, 혹은 주관과 객관의 분별을 떠나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비록 대립과 투쟁의 세계에 살지만 이것을 극복해야 하며 이는 분별을 떠나고 주객이 사라지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주객이 사라지는 가르침이다. 나와 너는 사라지고 부처님만 남는 게 보현행원이다. 온 세상이 부처님만 가득한 것이다.

 

우리가 도업은 중시하지만 선업은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선업은 일반인들이나 짓는 것이고 도업이 더 중요하다는), 영명연수의 만선동귀집을 보면 그렇지 않다. 칠불통게(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에도 강조하듯 선업은 단순히 일반인들이나 복 짓는 차원에서 짓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면 불교의 모든 것이고 깨달음에 가는 길이기도 하다.

 

다만 선업의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있을 뿐이다. 만선동귀집을 보면 선업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치를 모르면 선업은 단순 유위법으로 끝나지만 알고 보면 삶뿐 아니라 수행에서도 선업을 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만선동귀집은 설명한다. 만선동귀집 서(序)는 이렇게 시작한다.

 

“바다는 온갖 흐름이 모이지 않고선 가득해지질 못하듯이 십지의 지존에 오름도 만선(萬善)을 두루 쌓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어찌 한 가지의 수행만으로 쉽사리 이루어지랴, 반드시 많이 듣고 두루 익혀야 하는 것이다… 무릇 계행이나 선정을 의지하면 마땅히 복이 되고 경전이나 존상(尊像) 등을 짓거나 펴낸다면 반드시 뛰어난 공덕을 얻는 법, 자기에게 조그마한 현(賢)이 있는 것으로 짐짓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지 말라. 범부로부터 성위에 오르는 것이니 수행하지 않은 석가는 없었고, 거짓으로부터 진실에 드는 것이라 닦아 증득하지 않은 달마는 없었다.”

 

한 가지 수행만으로 성불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숱한 행, 그 중에서도 만 가지 선을 닦아야만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대저 지금부터 이야기하려 하는 온갖 선법(善法)은 모두가 실상(實相)을 그 바탕(宗旨)으로 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이 같은 이치에만 계합하면 그 나머지 만덕(萬德)은 저절로 갖춰지리니, 왜냐하면(이 마음의 실상이란) 진제(眞際)를 움직이지 않은 채 항상 만행을 일으키고, 인연 생멸법을 어기지 않은 채 항상 법계의 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명연수에 의하면 선법이란 실상에서 나와 실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단순한 착한 일, 복 짓는 것이 선업이 아니라 선업은 진리의 나툼이요 또 진리로 귀결하는 것이다. 따라서 선업의 만행을 닦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도 한 가지가 아니라 두루 익혀야 하고 만선을 행하면 만덕은 저절로 갖춰진다는 것이니, 그것은 진리가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인데 진리를 불교 용어로 말하면 실상이요 깨달음이다. 따라서 만선의 대명사인 보현행원이 깨달음을 이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어서 영명연수는 말한다.

 

“그러므로 수행하는 이들은 마땅히 육도와 만행을 널리 구해 원만히 행할 것이요 부디 어리석음만을 지키며 우두커니 앉아 참된 수행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만선을 행할 생각은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염불 독경 좌선만 수행이라 생각하고 진짜 수행인 육바라밀과 만행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는 것인데, 이에 따르면 만 가지 선의 보고(寶庫)인 보현행원을 ‘깨달음과는 상관없다’며 부정하고, 수행처에 앉아서 수행만 고집하는 것은 참된 수행을 가로막는 일이 된다. 만선동귀집은 끝무렵에 이런 질문과 답을 한다.

 

(문) “만행의 근원이 마음을 근본으로 삼는다면 조도문(助道門)은 어떤 법으로 근본을 삼는가?”

(답) “진실과 정직으로 으뜸 삼고 자비와 섭화(攝化)로 행할 바의 도를 삼는다. 곧고 바르기 때문에 결과도 굽고 휘어짐이 없어서 행(行)이 진여를 수순하며, 자비로 소승의 편고(偏枯)에 떨어지지 않고 공(功)이 대각(大覺)과 가지런한 것이다. 이 두 문이야말로 실로 자타를 겸리(兼利)케 하는 첩경이 된다.”

 

진실 정직 자비 섭화는 또한 보현행원의 속성들 중 하나다. 보현행은 진실하고 정직하며 자비 그 자체다. 그러므로 만선동귀집은 보현행원이야말로 깨달음을 일으키는 만 가지 선업의 시작임과 동시에, 자타를 모두 성불케 하는 지름길이 되는 가르침임을 일러주는 셈이다. 다만 애석하게도 만선동귀집 역시 그것을 ‘보현행원’이라 이름하지 않을 뿐이다.

 

이러한 경론적 근거에도 아직 깨달음에 대한 의문이 있는 분들을 위해 지눌의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을 살펴보자. 지눌은 깨달음에 이르는 불교적 방법을 3 가지로 말한다.

 

첫째 지적해오로, 이 단계에서는 자기가 곧 부처라는 걸 깨닫고 이런 지적 깨달음은 수행자를 일시적으로 불도에 귀의하게 만든다. 둘째는 점수 단계로, 올바른 믿음의 단계를 거쳐 과거 습기를 끊임없이 씻어 건전한 마음 유지한다. 셋째, 점수가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단계다.

 

그런데 지눌이 생각한 이 세 가지 가르침은 바로 보현행원에 적용할 수 있다.

 

보현행원은 내 생명이 바로 부처님과 똑같은 무량공덕 생명이라는 전제 하에 시작되는데 이것이 첫째의 지적해오이며, 다음으로 행원의 실천은 둘째 점수단계이고 행원이 무르익어 나타나는 단계가 셋째 단계다.

 

보현행원을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경험하지 못할 세계가, 보현행원을 실천하면 거짓말처럼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치 여명에 새벽이 서서히 밝아오듯 그렇게 온 세상이 점점 밝아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세계가 얼마나 황홀하고 얼마나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인가 하면, 『화엄경』 「입법계품」만 번역한 40 『화엄경』은 경 이름을 ‘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이라고 굳이 또 지었을 정도다. 지눌의 생각이 사실이라면 보현행원으로 우리는 완벽히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즉 보현행원은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불교적 수행’인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보조지눌이 보현행원의 중요성을 언급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기존의 화엄 이해가 잘못되게 된 것은 먼저 비로법계를 깨치고 나서 그후에 보현행원을 닦겠다는 화엄교가의 흐름이 주류가 되었기 때문으로(따로 국밥’) 생각한다.

 

특히 비로법계의 상() 일으켜 비로법계를 깨달으려 했는데, 이를 지눌은 그것은 망상이고 망상으로 비로법계를 볼 수는 없으며 부동지불을 믿는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걸 보현행원을 해야 한다로 말했으면 보현행원이 지금까지 수행으로서 간과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지로 지눌에 따르면 깨달음은 지적(theoria)인 것이어서 행, 즉 보살의 만행을 통해 증()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했다(契證). 깨달음은 사실 시작일 뿐이어서 깨달음의 체험은 보살의 이상을 실천적으로 성취해 나감으로써 정점에 이르게 되며깨달음은 수행을 위한 전제를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것일 뿐으로이 이해가 지속적인 보살만행의 실천을 통해 적용되지 않으면 그 깨달음은 진정한 것으로 인정될 수 없다는 것이다.

 

깨달음이 행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지눌의 지적은 핵심을 말한 것이지만, 깨달음이 (목우행)에 의해 올 수 있는 것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목우행은 보현행으로서, 깨친 이후에만 할 수 있거나 깨친 이후에야 할 수 있는 행이 아님에도 깨친 이후에야 목우행을 언급하는 것은 목우행의 깨달음에 대한 중요성을 조금 평가절하(?)한 듯하다.

 

지눌이 보현행으로 저 미진권경을 깨뜨릴 수 있고 보현행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한 말씀만 하셨다면, 보현행원이 깨달음과 무관하고 수행도 아니라는 오해가 오늘 날까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화엄학을 그렇게 발전 시켰음에도 화엄의 실천 부분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오늘날 일본 화엄 불교의 모습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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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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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10 금강경에 대한 화엄조사 규봉종밀의 말씀을 들어보면
    종밀은 본각진심을 긍정적으로 드러내는 경전이 최고의 경전이라는 교상판석으로
    화엄경 원각경은 불교의 핵심을 드러낸 최고의 경전이라 합니다
    but 반야부를 대표하는 금강경은 부정의 말투가 많기에 대승경전 이기는 하지만 좀 수준이 떨어지는 가르침이라고 단호히 평가하지요

    남회근선생 역시 금강경은 性空을 말하므로 쉽게 狂禪으로 흐르기 쉽다며
    이해는 쉬울지 모르나 증득에는 아무 도움이 안된다고 말씀 하십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10.10 책에는 원효 이야기도 핵심을 실었습니다

    원효는 화엄승이라는데
    실지로 화엄 관련 저서는 아주 적어요 3권밖에 없어요

    그런데 왜 원효를 화엄승이라 할까요

    심지어 해동 화엄 초조라 할까요
  • 작성자청정수1 | 작성시간 24.10.10 번아웃이 왔음에도 탈고하셨음을 축하드립니다.

    문장이 매끄럽습니다. ^^

    고맙습니다. 기대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 작성자연무심 | 작성시간 24.10.11 탈고를 축하드립니다.

    출간될 책도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법혜 | 작성시간 24.10.11 청정수님 말씀처럼 기존 책에서 보던것과는 문체가 다른 것 같습니다.
    또한 기존 경전에 근거하여 설명을 곁들이니 처음 접하는 불자님들께는 훨씬 설득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큰 일 하셨습니다. 보현 선생님 말고,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 하실 분이 누가 있겠습니까?
    출판 일은 선생님 손을 떠난 일이니 좀 쉬시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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