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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와 반야행의 차이

작성자普賢.|작성시간23.08.15|조회수41 목록 댓글 6

반야와 반야행의 차이

 

반야는 그냥 이 세상이 空함 또는 묘유를 아는 겁니다 그냥 그 공함의 세계 묘유의 세계를 觀하고 그 속에 그냥 고요히 머무는 것이지요

 

반야행 또는 반야바라밀다는 공한 세계 분별 집착 없는 세계에서 괜스리 분별 집착을 일으키는 겁니다 왜냐? 중생들에게 반야를 알려주기 위해!

 

이 세상은 원래 공허해서 어디든 분별 집착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는 걸 중생들이 모르기에 그래서 자꾸 욕심내고 분별 집착하기에 그럴 필요가 업는걸 알려주려고 똑같이 망상 집착을 일으키는게 반야바라밀다 즉 반야행! 인 겁니다

 

그래서 단순 반야와 반야바라밀을 구분하는 것이고 반야라는 말에 굳이 바라밀다 라는 말을 붙이는 이유입니다

 

또 그래서 반야바라밀다는 단순한 깨침이 아니라 자비행! 인 겁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안거 기간 동안 긴긴 삼매에 들어 반야를 알아 도피안 한게 아니라 반야를 안고 세상 속에 들어가 자비행을 깊고 넓게 하심으로 비로소 조견오온개공을 정말 아시게 되고 도피안 하게 되신 것이지요

 

그래서 반야와 보현은 만나게 됩니다 반야바라밀다 행이 바로 보현행!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문수와 보현이 만나게 돼요

 

화엄경은 이상할 정도로 문수와 보현을 혼동(?) 합니다 멀쩡히 가다가 때로 문수 자리에 보현을, 보현 자리에 문수를 갖다 놓죠 이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우리 광덕스님께서도 반야를 보시고 바로 보현행원으로 가셨지요 금정산이 당당한게 반야의 자리였다면 겁후 찬란하게 울려퍼지는 반야의 종소리는 보현행원 이었던거죠

 

그래서 제가 우리 큰스님을 잋을래야 잊을수 없는 겁니다

 

근래 경허스님 이후 얼마나 큰 스승님들이 많으셨습니까

 

그러나 이토록 반야를 그리고 보현행원을 일목요연하게 보신 스승님이 우리 큰스님 외에 누가 있으리요

 

큰스님의 반야활구 두 마디 즉

 

내생명부처님 무량공덕 생명!

->이게 반야 및 일상삼매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 이건 반야바라밀다 및 일행삼매

---

화엄경은 이렇게 이미 行 深! 반야바라밀다 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이 했다는 행심 반야바라밀다 반야행이 이미 화엄경엔 실천으로 나와 있어요

위와 같은 내용은 화엄경엔 여러 곳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어 설해집니다! 반야가 따로 있어 반야행이 아니라 위 내용이 바로 반야행 에요!

 

 

분별 없는 곳은 空이요 분별이 있는 곳은 有지요 그래서 세상에 일체 분별이 없으면 空 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空에 떨어져요 空에만 머무는 겁니다

그런데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곧바로 有로 나갑니다 空이 아니라 有가 되지요 그런데 이때 有는 홀로 있는 有가 아니라 空과 함께 있는 有에요 즉 眞空妙有 입니다

진공묘유! 그게 곧 반야 에요!

그래서 분별 없음으로 분별을 내면 그건 바로 반야바라밀을 行!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비행! 입니다 왜냐? 없는 줄 알지만 중생을 위해 있는 걸 일으키는 거거든요? 그래서 단순한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입니다

 

 그래서 관자재보살은 반야만 아니라 반야에만 머무는게 아니라 반야행!을 그것도 깊게! 함으로써 마침내 모든것이 공함을 진실로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함께 참으로 到피안 하게 되지요 반야!가 아니라 반야행!에 의해


그래서 행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현.행! 입니다

행이 진실한 피안에 이르게 해요
이걸 禪에서는 보임 이라 하고요

 

禪은 마음을 먼저 見證한 것이고 화엄은 마음을 見證하기보다 說 즉 說心한 것이지요
견증은 말이 필요없어요 아주 단순하니 본걸로 그냥 끝나는 겁니다
그런데 說은 달라요 본 걸 말로 글로 나타내야 하니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됩니다
비유하면 금강산을 본 사람은 그냥 그걸로 끝납니다 왜냐 가슴에 깊이 바로 와 닿거든요 그래서 말이 필요없어요

 

그러나 금강산을 보고 집에 온 화가나 글쟁이가 그때 자기가 본 금강산을 표현하고자 하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눈만 껌뻑여서는 다른 사람이 금강을 알지 못해요 그래서 장황설이 벌어지는 겁니다

 

禪은 마음에서 시작됐고 화엄은 글에서 시작 됐지만 둘이 본건 똑같아요 진짜 똑! 같습니다 그래서 禪과 화엄은 분리 할수가 없어요 선 수행이 깊어지면 화엄경을 멀리 할수없고 화엄 공부가 깊어지면 禪을 소홀히 할수가 없어요

 

화엄의 대가 이셨던 탄허스님께서 방산굴에세 매일 새벽 일어나자 마자 참선을 하신 후에야 일과를 시작하셨다는 일화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화엄경 이세간품 제10 무하열심에 단 댓글을 따로 올려봅니다 _()_

 

화엄경 무분별로 분별을 안다 - 이게 반야의 지혜요 이게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겁니다 아마 이런 말씀은 화엄경에서만 볼수 있을겁니다! - 부사모게시판법당 - 화엄경보현행원(부사모) -

https://m.cafe.daum.net/bohhyun/HzNP/1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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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5 그런데 왜 중생은 자꾸 분별 想을 내고 차별의 세계를 만드느냐? 차별하지 않으면 내我가 나타날수 없어요 차별을 해야 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중생은 자꾸 분별상 차별상을 냅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이런게 차별상 이지요 차별을 해야 해병이 육해공군과 달라지는ㅈ겁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5 중생의 무명 근본 번뇌 중에는 나를 드러내고픈 근본 어리석음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랑이 많은 겁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은거죠

    그리고 중생의 이런 어리석음이 종국에는 우주를 창조하게 돼요 분별 없는 세계에서 분별상을 내게 되어 빅뱅이 일어나는 겁니다

    현대 과학은 여기까지는 모르고 있죠 왜냐 이건 세간 소식이 아니거든요? 보이는 세계를 너머 있기에, 생각이 끊어진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생각으로 지어가는 과학 또는 철학으로는 볼수가 없는 겁니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5 분별없는 자리에서 분별을 내어 생멸거래가 없는 세계에서 생멸 세계로 떨어져나간 중생을 그러면 어떡하느냐?

    그래서 보살은 大悲의 마음 큰 슬픔이 일어 誓願을 세우고 중생이 떨어져 나간 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분별을 일으키는 거죠 왜냐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도저히 분별을 일으킨 그들에게 다가 갈수 없거든요?

    그래서 보살은 일부러 분별을 일으켜 사바세계로 내려 옵니다
    그리고 본래 생사가 없는 줄 알지만 생사를 일으켜요

    이것이 화엄경에서 말하는 무분별로 분별을 일으킨다, 는 가르침의 내용 입니다 😎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5 보살은 사바세계에 살며 한번도 大悲의 마음을 잊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분별을 당장 끊을 수 있어도 끊지 않습니다 空함을 알지만 有의 세계를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일부러 끝없는 생사의 물결 속을 휩쓸려 가요

    그렇게 수없이 떠내려가면서도 한번도 중생을 잊은 적이 없고 한번도 후회 하거나 피곤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습니다 오직 저 어린 중생 생각 뿐입니다

    이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보살의 모습에요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8.15 https://youtu.be/4TaYcphfA-w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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