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님이 오늘 좋은 글 보내주셨네요.
오늘의 주제는 ‘노인들은 왜 사냐?’ 인데, 화엄경 가르침을 참조하면 어떨까 해서 말씀을 드려봅니다.
화엄경은 불교의 다른 경전과 달리 독특한 내용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불교 용어로는 불이(不二, 둘이 아님) 또는 불이(不異, 문자 그대로 다르지 않음)라 부릅니다.
다르지 않다는 증거(?)를 화엄경이 대표적으로 든 것은 먼저 공간입니다. 하나가 여럿과 다르지 않고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사실은 하나다(一中多, 多中一), 하나에 여럿이 있고 여럿은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또 시간도 그러해서 찰나가 사실은 영원이고 영원이 바로 찰나다(一念卽是無量劫 無量遠劫卽一念), 이렇게 말합니다.
이때까지 하나와 여럿은 다르고, 찰나와 영원은 다르다고 알고 살아온 그 당시 사람들에게 화엄경의 이 문구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하지요.
우리는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살아가죠. 이건 어리석을수록 더 그러한데, 사람이 모자랄수록 모든 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사람이 점점 현명해질수록 다른 줄 알았던 것이 모두 ‘같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릴 때는 백인 흑인이 다른 줄 알죠. 그런데 커가면서 백인 흑인도 같은 인간인 줄 알게 됩니다. 어리석으면 종교가 다르면 다른 사람인 줄 알죠. 그렇지만 사람이 성숙해질수록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이 다른 건 아닌 걸 알게 됩니다. 정의로운 사람은 밥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고 평범한 사람만 밥 안 먹으면 배고픈 게 아닌 것도 알게 되고요.
과학도 그러해서 과거에는 전기력 자기력이 다른 줄 알았죠. 그런데 알고보니 같은 거였죠(그래서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힘 역시 같은 것일거라 생각해서 만물의 이론, 또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했지만 아직까진 무리).
생물도 마찬가지라 과거에는 식물도 동물도 다른 존재인 줄 알았으나 이제보니 모두 세균에서 유래한 겉모습과 기능만 다른 같은 생명임을 알게 되었죠. 강아지 돼지 소 호랑이랑 인간이 다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생명에서 가지치기로 나온 존재임도 이제는 알게 되었죠.
그래서 화엄경은 노인과 청년이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여자 남자도 다르지 않고요. 그래서 어떤 아주 큰 방이 있는데 그 속에 노인이 들어가면 나올 때는 청년으로 나오고 남자가 들어가서 여자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화엄 관점은 청년과 노인이 다르지 않다, 이겁니다.
엄상익변호사는 글에서 통풍도 오고 손목도 아프고 녹내장도 생겼다고 하는데, 화엄 관점으로 보면 통풍이 와도 안 온 것과 같고 손목이 지금 아프지만 안 아픈 것과 같고 녹내장이 와도 안 온 것과 같다, 는 말이 됩니다. 말도 안되는 괘변 같지만 화엄적으로는 그렇다(?)는 겁니다.
그니까 화엄 세계에서는 늙어도 늙은 게 아니고 병이 들어도 병이 든 게 아니고 인생을 실패했다 해서 실패한 게 아니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심지어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죽는 거나 사는 거나 다른 게 아니다... 이렇게까지 비약(?)되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병이 와도 병이 없는 곳을 알게 되어 병이 아니라 병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됩니다. 또 늙어도 늙지 않는 세계를 보고 늙었는데 늙지 않는 곳에 살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아니, 분명히 병이 와서 눈도 안 보이고 몸도 안 움직이는데 그런 말이 어딨느냐? 지금 당장 숨 넘어가는데 안 죽는다고? 이렇게 항의하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화엄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거죠.
그래서 화엄적으로 살게 되면 병이 와도 마음은 늘 건강합니다. 몸이 뭉글어져 죽어가는데도 죽지 않는 세계를 알게 돼요. 분명이 임종이라 목숨이 딸깍 넘어가는데도 안 죽는다(?), 이겁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도 그런 세계를 노래하고 있지요.
광화문연가에서는 그렇게 노래하죠. 이제 모두 세월 따라 사라졌지만 덕수궁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은 아직도 볼 수 있고, 언젠가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겠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세계,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세계에 대해 광화문연가는 그렇게 말해줍니다. 그래서 가슴을 울리고 명곡이 됐는지 모르지만 (윙크)
♤노인들은 왜 사나?
낡은 기계가 된 몸의 나사들이 헐거워지고 붉은 녹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오십대 대학교수와 삼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녀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다시 젊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요?” 교수가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여자가 얼른 대답했다.
“저는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어요. 비트코인에 투자해서 돈도 벌고...”
“에이 그건 타임머신을 타고 가는 거지. 돌아가려면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다 없애고 아무것도 모른 채 그 시절로 가야 하는 거죠. 만약 그렇게 돌아간다면 불안할 걸요.”
“그러면 노인들은 어떨까요?” 듣고 있던 삼십대 남자가 교수에게 물었다.
“제가 칠십대 노인들을 많이 만나봤어요. 대부분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들 그래요.”
“그분들이 왜 행복한 거죠?” 삼십대 남녀는 이해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보기에 그분들의 행복은 크기보다 빈도인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백점짜리 행복보다 십점짜리 여러 개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더라구요.”
나는 그들의 연구대상인 칠십대의 노인나라에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노인 나라에 들어선 나 같은 사람의 삶이 궁금한 모양이다.
나는 그들같이 젊어 보았다. 그때는 '노인' 하면 그냥 무기력하고 행복과는 무관한 정물같이 보였다. 한편으로는 '노인들이 왜 사나?' 하고 궁금하기도 했었다.
지금의 내가 바로 그 노인이다.
지금 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경험을 남겨두는 것도 괜찮은 게 아닐까. 젊은 날로 돌아간다면 어떨까.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에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퇴직한 칠십대의 여교수가 있다. 그 분야에서는 최고로 간 분이다. 같이 밥을 먹을 때 그 교수가 이런 말을 했었다.
“과거로 돌아가라면 저는 절대 안 갈 거예요.
유학생활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되도 프로젝트의 연구비를 따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죠.
남들은 나를 성공의 상징으로 보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피가 마르는 것 같았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늙어있는 지금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해요.”
삶에서 성공과 실패를 불문하고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노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인생의 필름을 과거로 돌려놓으면 겨울저녁의 하얀 눈밭에 서서 어디로 갈지 몰라 망연해 있는 내가 보일 것만 같다.
젊은 교수는 노인들이 백점짜리 행복보다 십점짜리 자잘한 행복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럴 것 같다. 그 교수에게는 총장이 되는 게 백점짜리 행복일지 모른다. 노인의 나라에 이제 그런 건 없다. 늙으니까 이제야 보이는 작은 행복들이 엄청 많다.
통풍이 왔었다. 하룻밤 사이에 사소한 일들이 굉장한 일로 바뀌었다. 한 걸음이 내게는 더 이상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가 아프니까 몸 속 여기저기서 삐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 왔다.
손목도 아프고 눈도 쓰리고 맥이 빠졌다. 낡은 기계가 된 몸의 나사들이 헐거워지고 붉은 녹물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내 마음대로 될 줄 알았던 몸이었다. 걷는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큰 행복인 줄을 이제야 깨달았다.
한쪽 눈에 녹내장이 왔다. 세상이 좁아지고 흐려 보인다. 다른 눈도 시력이 약해졌다. 이제야 아름다운 꽃들, 봄날 산에 물감같이 번지는 부드러운 연두색의 나뭇잎들, 바람이 강 위에 만들어 내는 미세한 물결들을 볼 수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깨닫는다.
내가 있는 실버타운에서 파킨슨병으로 고생하는 내 또래의 남자를 보았다. 혼자 사는 그는 부자라는 소문이었다. 그런 그가 실버타운의 정원을 걸어가는 모습은 마치 산악인이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할까.
그가 원하는게 뭘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 혼자서 걷고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 얘기하는 아주 사소한 것이 아닐까. 그런 소소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걸 이제야 알았다.
어떤 노인의 죽기 전 마지막 소망은 평소 산책길에 자주 들리던 커피점에서 재즈를 들으며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시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나는 주위에 널려있는 그런 작은 행복들을 알았던가.
백점짜리 행복만 찾느라고 그런 것들을 놓친게 아닐까.
작은 행복을 아는 노인의 지혜를 그때 가지고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 엄상익 변호사
좋은 하루 !! (방긋)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보문 작성시간 24.02.16 화엄으로 본 일상의 삶이 참으로 긍정입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15 중복이 되겠지만 요약 겸해서 따로 다시 말해보면, 화엄경은 불교의 다른 경전과 달리 독특한 내용이 많다. 그 중 하나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불교 용어로는 불이(不二, 둘이 아님) 또는 불이(不異, 문자 그대로 다르지 않음)라 부른다. 다르지 않다는 증거(?)를 화엄경이 대표적으로 든 것은 먼저 공간이다. 하나가 여럿과 다르지 않고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사실은 하나다(一中多, 多中一), 하나에 여럿이 있고 여럿은 하나로 귀결될 수 있다(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또 시간도 그러해서 찰나가 사실은 영원이고 영원이 바로 찰나다(一念卽是無量劫 無量遠劫卽一念), 이렇게 말한다. 이때까지 하나와 여럿은 다르고, 찰나와 영원은 다르다고 알고 살아온 그 당시 사람들에게 화엄경의 이 문구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다르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 이는 어리석을수록 더 그러한데, 사람이 모자랄수록 모든 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반면 사람이 점점 현명해질수록 다른 줄 알았던 것이 모두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릴 때는 백인 흑인이 다른 줄 알죠. 그런데 커가면서 백인 흑인도 같은 인간인 줄 알게 된다. 어리석으면 종교가 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15 어리석으면 종교가 다르면 다른 사람인 줄 안다. 그렇지만 사람이 성숙해질수록 종교가 다르다고 사람이 다른 건 아닌 걸 알게 된다. 정의로운 사람은 밥 안 먹어도 배가 안 고프고 평범한 사람만 밥 안 먹으면 배고픈 게 아닌 것도 알게 된다. 과학도 그러해서 과거에는 전기력 자기력이 다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같은 것이었다(그래서 우주에 존재하는 4가지 힘 역시 같은 것일거라 생각해서 만물의 이론, 또는 통일장 이론을 만들려고 했지만 아직까진 무리). 생물도 마찬가지라 과거에는 식물도 동물도 다른 존재인 줄 알았으나 이제보니 모두 세균에서 유래한 겉모습과 기능만 다른 같은 생명임을 알게 되었다. 강아지 돼지 소 호랑이랑 인간이 다른 줄 알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생명에서 가지치기로 나온 존재임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화엄경은 노인과 청년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여자 남자도 다르지 않고. 그래서 어떤 아주 큰 방이 있는데 그 속에 노인이 들어가면 나올 때는 청년으로 나오고 남자가 들어가서 여자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까 화엄 관점은 청년과 노인이 다르지 않다, 이것이다. 우리는 늙으면 여러 병에 걸리는데, 예를 들어 통풍도 오고 손목도 아프고 녹내장도 생기고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15 통풍도 오고 손목도 아프고 녹내장도 생기고 하는데, 화엄 관점으로 보면 통풍이 와도 안 온 것과 같고 손목이 지금 아프지만 안 아픈 것과 같고 녹내장이 와도 안 온 것과 같다, 는 말이다. 말도 안되는 궤변 같지만 화엄적으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화엄 세계에서는 늙어도 늙은 게 아니고 병이 들어도 병이 든 게 아니고 인생을 실패했다 해서 실패한 게 아니고... 이렇게 된다. 심지어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죽는 거나 사는 거나 다른 게 아니다... 이렇게까지 비약(?)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병이 와도 병이 없는 곳을 알게 되어 병이 아니라 병이 없는 곳에서 살게 된다. 또 늙어도 늙지 않는 세계를 보고 늙었는데 늙지 않는 곳에 살게 되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아니, 분명히 병이 와서 눈도 안 보이고 몸도 안 움직이는데 그런 말이 어딨느냐? 지금 당장 숨 넘어가는데 안 죽는다고? 이렇게 항의할 수 있겠지만 화엄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적으로 살게 되면 병이 와도 마음은 늘 건강하다. 몸이 뭉글어져 죽어가는데도 죽지 않는 세계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임종이라 목숨이 딸깍 넘어가는데도 안 죽는다(?)
-
작성자普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4.04.15 분명히 임종이라 목숨이 딸깍 넘어가는데도 안 죽는다(?), 이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도 그런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광화문연가에서는 그렇게 노래한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사라졌지만 덕수궁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은 아직도 볼 수 있고, 언젠가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겠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눈덮힌 조그만 교회당은 아직도 남아있다고.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세계,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는 세계에 대해 광화문연가는 그렇게 말해준다. 그래서 가슴을 울리고 명곡이 됐는지 모르겠다.
-요렇게 오늘 바꿔서 장차 나올 보현행원품 책에 각주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