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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보리심과 원 -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발심

작성자普賢.|작성시간24.04.03|조회수30 목록 댓글 2

발보리심과 원 - 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발심

 

불교는 발심(發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처음 발심을 낼 때 바로 정각을 이룬다(初發心時 變成正覺)이란 말도 있듯 화엄경 또한 발심을 굉장히 중요시 하는 가르침입니다. 지눌은 깨달음은 초발심에 존재한다십신의 초심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자연스레 구경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발심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미륵은 먼 길을 찾아온 선재에게 보리심이 어떤 것인가를 장황히 설명한 후 보리심의 공덕을 이렇게 말합니다.

 

선남자야 보리심은 이렇게 무량공덕을 성취한다. 욧점만 말하면 모든 불법의 공덕과 평등하다. 왜냐하면 보리심은 보살의 행을 낸다. 삼세 여래가 보리심으로부터 나신다. 선남자야 그러므로 만약 아뇩다랴삼먁삼보리심을 내는 이는 이미 무량한 공덕을 내었으며 온갖 지혜의 길을 널리 거뒀다.....”

 

그런데 문제는 발심이 굉장히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발심만 하면 되는데, 그 간단한(?) 발심이 안 되는 것입니다. 미륵보살은 선재에게 보리심을 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렇게 말합니다.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다면 그건 희유한 일이다. 만일 마음을 내고 또 능히 정진하는 방편으로 부처님 법문을 모은다면 갑절이나 희유한 일이다...”

 

발심은 발보리심(發菩提心)의 준말로, 한문 그대로 해석하면 보리에 대한 마음을 발하는 것’, 풀이하면 깨달음을 얻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보리에 대한 마음을 발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냥 깨달음을 얻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 있을까요? 발심이 잘 안되는 것은 어찌보면 범어가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발생한 번역 상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발심은 범어로 boddhicittotpada, 깨달음에 대한 강한 갈망을 일으키는 것이라 합니다(to have a mind raised to supreme enlightment, 또는 cherishing an intense desire for supreme enlightment). 원문을 보면 깨달음에 대한 마음을 갖는 것, 또는 그런 강렬한 욕망을 간직하는 것인데 한문으로 발보리심이라 하면 보리심을 발하는 것이며 이때는 발할 보리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결과, 없는(?) 보리심을 하기 위해 없는 을 자꾸 붙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리심()’으로 바꾸면 발심의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됩니다. 발보리심을 깨달음을 이루겠는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서원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발심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발하는 것, 일체중생을 섬기겠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誓願)으로 바꾸면 발심은 아주 간단해집니다. 이렇게 되면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바로 보리심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용수보살 역시 󰡐올바른 원이란 무상의 보리를 구하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며 모든 중생이 완전한 열반과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도록 하겠다는 마음󰡑이라고 설함으로써, 보리심이 바로 서원이며 서원을 세우는 것이 발심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화엄은 발보리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는 가르침인데, 그러한 발심은 믿음이 충만할 때 온다는 것이 기존 화엄학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발심은 우리가 원을 세울 때 바로 이루어집니다. 즉 서원을 발하는 것이 바로 보리심을 발하는 것입니다. 발심은 강력한 염원을 내는 것으로 가령 꼭 깨닫겠다 혹은 꼭 중생들에게 도움을 주겠다...’ 등등 이런 마음()을 발()하는게 발심인데 이는 보현행원의 관점에서는 서원입니다.

 

즉 원을 세우는 게 발심으로 보현행원은 원을 세움으로써 그토록 어려운 발보리심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발보리심을 문자 그대로 꼭 깨달음에 대한 마음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보리심이 무언지 깨달음이 무언지에 대한 정의부터 알아야하고 어려워지겠지만, 발보리심을 깨달음 대신 중생제도 하겠다 부처님 잘 모시겠다 이렇게 갖다 놓으면 굉장히 쉬워집니다. 그런 서원을 세우는 게 바로 그토록 귀하고 소중하고도 어려운 발보리심이 되는 것입니다. 보리심은 발하기 어려울지 모르나, 서원은 이렇게 아주 쉽게 됩니다.

 

발심은 여러 형태로 옵니다. 지금처럼 서원을 세우는 형태로도 오고, 비극, 우환의 형태로도 옵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내가 지금서원을 세우지 못하면 발심은 장차 우환의 모습으로 온다는 것입니다. 우환이 와서 발심하는 것도 좋지만, 그래서 병을 앓고 재산도 탕진하고 자식도 속을 썩인 후에야 발심하는 것도 분명히 인연의 한 모습이지만, 그런 비극이 오기 전에 발심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현행원을 하는 분들의 삶이 대체로 우환이 없고 원만한 것은 보현행원이 늘 서원 속에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서원이 있으니 우환이 올 필요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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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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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법혜 | 작성시간 24.04.04 발심...무슨 마음을 발하는 것인가?
    깨달으려는 마음이 아니라 화엄에선 깨달음이란 이미 이루어진 기정사실이니 깨달아져 있는 마음을 나는 기필코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맞는 견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에겐 이런 생각이 쉽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보현선생님의 서원이 깊이 느껴지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저희들도 서원을 자꾸 되새기겠습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 작성자보문 | 작성시간 24.04.09 우환이 오고 난 뒤에야 발심하기 전에
    늘 서원 속에서 살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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