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행원수행으로서의 마하반야 염송 수행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은 불교적인 기본 보현행원수행으로 매우 적합하다. 그것은 마하반야가 비로자나불의 무량광명과 맞닿아 있기 때문으로 보광명지를 현현하게 한다. 마하반야는 굉장히 밝은 경계다. 그 밝은 마하반야가 우리 앞에 밀려오는 것을 관(觀)하는 것이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의 핵심이다. 그런데 ‘관한다’는 것은 전문 수행 용어이고 초보자 또는 일반인은 ‘상상(想像)한다’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하반야를 염송하며 눈부신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상상한다. 마치 암막커튼을 치웠을 때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초여름 햇살처럼, 마하반야를 염하며 온 누리가 마하반야 진리 광명으로 꽉 차오는 걸 보는 것을 본다(또는 상상). 그와 함께 부처님 무량 은혜 무량 자비 무량 축복이 무한으로 쏟아져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을 또한 관한다(또는 상상). 무한한 감사 무한한 기쁨 무한한 찬탄이 내 안에서 울려 나오는 것도 상상한다. 축복 광명 은혜 앞에 내 안에 있던 감사 기쁨이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상상하며 마하반야를 힘차게 외친다. 반야의 물결, 대지혜 대자비의 물결이 밀려오며, 진리가 온 대지를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다. 마하반야가 쏟아지고 마하반야가 밀려온다.
거기에는 안 되는 것은 없다. 불가능이 없다. 일체가 이루어지며 일체가 성취된다. 병이 있는 분은 병이 낫고, 사업이 안 되는 분은 사업이 번성한다. 나를 가로막고 나를 어둡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없다. 오로지 만사형통, 무한 영광뿐이다. 무명은 타파되고 반야 지혜만 빛난다. 내 마음 속에 나를 열등하게 하고 나를 한계 짓고 나를 초라하게 빠뜨리는 일체의 것이 없다. 오직 무한 희망 무한 성취뿐이다.
반야는 ‘모든 것이 없다(空)’는 뜻이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 가령 낙담 실망 어둠 미움 원망 성공 질투 실패 잘못 등등... 이런 것들이 모두 반야 속에는 없다. 나의 헛된 망상과 집착(顚倒妄想)이 그걸 붙들고 있었던 것. 그래서 나를 얽메고 옭죄이고 가두고 있는 현실은 실지로는 없는 것이다
. 그리고 반야의 밝은 광명 밝은 물결이 지금 그걸 깨뜨리고 있다. 마하반야바라밀이 울려퍼질 때마다 나의 망상이 깨어져 나간다. 그리고 참된 우리의 모습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은 무한 희망 무한 축복 무한 은혜 무한 창조,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다.
반야 앞엔 아무 것도 없다. 있는 것은 반야뿐이다.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던 것은 일체가 없고, 오직 있는 것은 찬란히 빛나는 반야뿐이다. 반야가 생명으로, 무한희망 무한축복 무한은혜로 빛나고 있다. 그 반야 앞에 그동안 우리를 억누르고 옭죄이던 일체의 어둠은 어디 갔는지 흔적도 없다. 오로지 찬란한 진리의 빛뿐이다. 그 빛 속으로 우리는 희망을 찾고 다시 몸을 일으켜 나간다.
미움 원망 후회 절망 같은 것이 있거든 마하반야에 녹여 버린다. 마하반야 속으로 던져 버리고 우리는 마하반야 속으로 들어간다. 마하반야는 거대한 용광로요 모든 걸 삼키는 블랙홀이다. 나의 희망도 나의 절망도 모두 모두 마하반야의 용광로에 모두 집어 던지고 용광로 속으로 블랙홀로 뛰어 든다. 모든 것이 용광로에서 녹아 새롭게 창조되며, 모든 것이 블랙홀에서 사라지고 화이트홀에서 부활한다.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의 위대한 힘으로, 그래서 마하반야바라밀은 크게 밝은 주문이요 비할 바 없는 주문이요 능히 일체의 고뇌를 제멸하는 주문이다. 마하반야는 세상의 온갖 것들을 빨아들여 다시 무한진리를 뿜어낸다. 무한진리와 무한진리의 힘, 그것이 마하반야의 정체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염송할 때 주의할 것은 ‘일심염불’이다. 염송을 무슨 이유로 시작했던, 간절한 나의 소망을 간절히 발하고 나서 염송에 일단 들어가면 염송만 일심으로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병을 낫게 하겠다, 사업이 안 된다, 걱정이 있다... 이런 것조차 있을 수가 없다. 오직 마하반야바라밀, 그것만 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마하반야바라밀만 외친다.
그리고 부처님의 무한은혜, 무한축복, 무한 위신력이 물밀 듯 현실로 내게 밀려오는 것을 상상하고 느낀다. 모든 고난은 사라지고 내 온 몸 온 마음에 부처님의 위대한 위신력이 물밀 듯이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 바라보며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한다. 나를 붙잡는 일체를 모두 잊어버리고 오직 마하반야바라밀, 부처님 무량공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사방에는 온통 반야뿐이다. 그 반야와 함께 우리는 세상 속 무량 부처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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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필자는 개인적으로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은 누구에게나 쉽고 또 생각지도 못한 공덕을 가져오는 현대인에게 매우 적합한 가르침이라고 본다. 종교를 떠나 신비한 주문으로, 보편성을 갖고 누구에게나 다가갈 수 있는, 나이든 분들뿐 아니라 젊은이들도 거부감이 없는 현대화된 수행법이다, 불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해리포터가 주문으로 마법을 걸어 원하는 것 일체를 나오게 하듯. 우리 삶에 마하반야의 주문을 걸어 일체 성취를 이루어 내는 것이다. 마하반야 염송은 내 삶에 주문을 거는 것이다. 정(定)에 들겠다, 정토에 나겠다, 염불수행한다, 아니면 뭘 얻겠다 등등, 이런 생각은 일체 없다. 그냥 내 삶에 주문을 거는 것이다. 일체를 잊고 일체를 놓아버리고 없는 세계로 주문을 외우며 뛰어드니, 거기엔 무엇이 있을지 모른다. 희망이 있을지 더 큰 절망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뭘 구하고 얻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부처님 무량공덕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부처님 무량공덕, 마하반야의 큰 위신력의 주문을 내 삶에 거는 것이다.
2.이때 현대인들은 ‘마하반야’의 자리에 무한희망, 무한축복, 무한은혜, 무한기쁨, 무한성취, 무한번성, 무한가능, 무한영광, 무한건강 등을 외쳐도 좋을 것이다. 가령 마하반야바라밀 염송하다가 간간히 마하반야 대신 무한희망바라밀 무한축복바라밀 무한은혜바라밀 무한기쁨바라밀 무한성취바라밀 무한번성바라밀 무한가능바라밀 무한용기바라밀 등등 이렇게 염송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이 복잡하다면 당장 내게 필요한 하나만 골라서 해도 된다. 가령 무한성취바라밀을 마하반야 대신 여러 번 단순 반복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에 섞어 이런 말을 넣어 같이 염송한다면 더욱더 마하반야의 뜻이 구구절절히 와 닿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마하반야 염송이 현대인들에겐 더욱 맞는 마하반야 염송이 될지 모른다.
3.반야관에서는 무엇이 없는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이 없다. 심지어 뭐가 없느냐 하면 초기불교가 그렇게 애지중지 하는 사성제 오온 십이처 십팔계는 물론 무명도 무명이 다함도 없고 아무 것도 얻을 바가 없다. 그러면 뭐가 남는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나면 도대체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걸 제거하면 없는 그 자리에 반야가 빛난다.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던 그 자리에 반야가 홀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야는 모든 것을 비추고 있고 모든 것의 창조자다. 그래서 그냥 반야가 아니라 ‘마하(大)’반야다. 진실로 진실한 모든 것은 반야로부터 나온다.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없는, 그것들이 사라진 자리에 진짜로 있는 것들이 나오니, 그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하는 세계인 것이다. 반야가 구르는 곳은 일체가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 태어나는 것은 전부 진실한 것이니 모두가 기쁨, 찬탄, 축복, 성취다.
4.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는 사람은 일심으로 염해서 아무 생각도 없고 맑고 맑아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체와 더불어 화합하고 일체와 더불어 함께 있으며 모두의 공덕을 찬양하고 나 자신에게 가득히 넘쳐 있는 부처님 은혜에 감사하는 그럼 믿음에서 오직 일심으로 염송한다. 그것은 바로 나와같이 있는 나의 부모, 나의 형제, 나의 아내, 나의 남편에게 감사하고 그 모두에게 부처님의 은혜가 감싸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이 국토가 모두 그렇다는 것을 믿고 그렇게 보는 것이다(광덕, 메아리없는 골짜기, 불광출판부 1994 145쪽). 부처님의 무한공덕, 그것이 내 생명 현 존재임을 굳게 믿고 반야바라밀을 끊임없이 염하며 확인하는 것이 바라밀염송이다(만법과 짝하지 않는 자, 불광출판부 1995, 197쪽)
5.이것은 반야의 자리(體)에 우리를 두고 일상에서 보현행을 실천(用)함을 말한다. 금하광덕은 마하반야를 체로 삼고 행원을 용으로 지어나가라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보리좌에 늘 앉아 계시면서 시방법계를 두루 나투시는 화엄의 가르침과 일치한다. 반야화엄, 화엄반야인 것이다. 반야에 체를 둔다 함은 우리 마음 자리를 불생불멸, 불구부정,부증불감의 자리에 둔다는 말이다. 그렇게 마음을 두고 생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반야에 체를 두고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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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보문 작성시간 24.07.24 普賢. 한 번 읽어서는 선뜻 어렵다 싶어서 한글 파일로 만들어 인쇄를 하였어요. 우리 집 양반도 공부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리고는 다시 읽으니 우리는 들은 바가 있어서인지 쉽게 다가왔습니다. -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7.24 학창 시절에 공부 잘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3년 내리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각종 경시대회 수상은 도맡아 하던 아주 스마트하고 똑똑한 친구였어요.
저같이 어중간하게 공부하던 친구들은 그 친구가 참 부러웠습니다. 어떻게 공부하길래, 얼마나 머리가 좋기에 저렇게 공부를 잘 할까?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항상 그 친구한테 물어봤는데 눈으로 쓱 보고는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 친구의 설명은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이미 제 수준을 한참 넘어 있던 친구이니 자기 수준에서 설명하니 이해가 될리가 있었겠어요? 또다른 절망감만 느끼곤 했었지요.
많이 아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에는 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저는 보현선생님께서 늘 노심초사하신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현 선생님 가르침에는 분명히 불교의 정수, 화엄의 정수가 담겨져 있음을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을겁니다.
선생님의 열정과 안타까움, 진리에 의한 법열과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나 상 또는 지식과 선입관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요.
그런데 기성 불교에 젖은 분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저는 의구심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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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7.24 그리고 또 한가지, 가르침대로 실천하지 않는 분들이 과연 그럴 수 있을까...여기서도 의구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두번째에 해당되고 실제로 십수년간 겪어온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격적으로 불교에 젖어들게 된것은 대행 큰스님의 인연덕분인데요.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주인공 관법은 광덕 큰스님의 마하, 보현행원과 닮아있음을 느낍니다.
용광로에 쓸어담듯이 일어나는 모든 경계를 주인공에 맡기고, 놓고, 지켜보라...
주인공이 마하반야요, 체이며, 불이며, 공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대행큰스님 가르침에는 용에 대한 설명이 상대적으로 약합니다.
보현행원이 강조되지 않으니 제자분들과 신도들은 오로지 주인공에만 매달리는 경향이 있지요. 일상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느낌이 커요.
그런 부분에서 광덕 큰스님의 반야,화엄 가르침이 뛰어난 부분이고, 보현 선생님의 안목이 대단한 겁니다.
방점이 보현행원으로 찍혀있고, 보현행원으로 반야로 들어가게 하는 가르침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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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7.24 그런데 이게 가장 뛰어난 장점이자 단점이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 밝은 빛에는 눈을 뜨지 못하듯이 너무 뛰어난 가르침엔 중생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범부들은 무언가 잡고 의지하길 원합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성취를 원하지요. 절, 독경, 참선, 주문...무언가 쌓아가길 원하고 성취감을 원합니다.
삼매도 그렇고 선정도 그렇습니다. 깊은 삼매, 선정에 들어야 아, 내가 뭔가를 하고 있구나, 성취가 있구나 하는 거거든요.
그에 반해 보현행원은 시시하고 허무합니다. 아무런 잡을 것이 없기때문입니다.
원인이 뭘까요?
저는 그 원인이 믿음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경전에 숱하게 나오고 스승님들의 법문에도 많이 나오지만 일체가 공한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다, 내가 곧 부처다,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이다....하면 참 좋은 말씀으로 끝나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겁니다.
내가 부처라는 강력한 믿음을 내지 못하니 또 다른 수행을 찾아 삼만리를 가야하는 겁니다. 일상의 경계에는 경계대로 휘둘리고, 또 뭐 그럴듯한 수행은 없나...기도처는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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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법혜 작성시간 24.07.24 신해행증이란 말이 나오면 보현선생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있지요?
믿음이란게 그냥 증장되는 것이 아니다. 행을 통해서 오는 것이다. 행 없이 믿음아, 생겨라 한다고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흔히 말하는 수행이란 차제적인 성격을 띈다기보다 이 믿음을 확인하는 작업으로서의 의미가 더 크지 않을까 합니다.
알아차리는 것, 화두를 성성하게 드는 것,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주인공을 관하는 것, 마하반야 염송을 하는 것....이 모든 것은 나의 부처자리, 진여불성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현행원은 이 믿음을 증장시키는 공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보현행원 수행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작업은 이 믿음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확인시켜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보현행원을 찬탄하고 실천하기엔 알아들을 수 있는 상근기가 너무 적을걸요.
사실 이 작업은 스스로 해야하는 과정이긴 하지요. 스스로 책도 읽고, 실천도 해보고, 고민도 하고...해야합니다만 주지하다시피 범부중생들은 게으르고 근기가 약해요. 저역시 최근에도 스스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보현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찬탄 올립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