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오스만은 프레베자해전 승리후 몰타에서 패하다!

작성자바이칼3|작성시간26.06.12|조회수41 목록 댓글 2

 

오스만 8 - 쉴레이만 1세 프레베자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몰타에서는 패하다!

 

 

1520년에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으로 즉위한 쉴레이만 1세는 동쪽 시리아와 북쪽 헝가리

를 굴복시켰고 1522년에 10만 대군을  동원해 6개월 간의 처절한 전투 끝에 성

요한 기사단이 진을 친 지중해의 요새인 로도스섬을 함락해서 동부 지중해를 손에 넣습니다.

 

다시 헝가리로 진격해 헝가리군을 모하치 전투에서 쳐부수고 속국으로 만든후 1529년 5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심장인 빈을 향해 12만 대군을 이끌고 출병하니....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

도 스페인 등지에서 2만 3천의 군사를 징발해 빈을 사수했는데,  장마와 질병으로 부득이 물러납니다.

 

 

다음으로 쉴레이만 1세가 노린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으니 신성로마제국의 원수인 프랑스와

연합해 이탈리아 반도의 합스부르크 세력을 남북으로 협공하는 것이 오스만 제국의 최종

목적이었는데 지중해는 베네치아가 에게해의 섬들을 차지해 해상 제국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밀라노 공국이나 트리에스테 등을 기반으로 지중해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데.... 카를

5는 유럽과 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외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에도  발을 뻗치고

있었으니 이는 이집트를 넘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는 도전이자 응전이었습니다.

 

 

그러나 1535년 튀니지에서 술탄의 군대는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원정군과 맞붙었다가 패전했는데.....

이 패배로 튀니지 일부가 합스부르크 관할로 넘어가 버렸지만 쉴레이만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카푸단 파샤 (해군 제독하이르 앗 딘 바르바로사를 중용해 대함대를 건조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은 진리니 옛날부터 해전으로 국가의 운명이

판가름난 경우는 부지기수인데 살라미스 해전등 고대 해전은 원거리 전투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은 "근접하여 갑판전벌이는 형태가 주류였으니, 

충각 전술인데 함선들은 많은 노를 가진 흘수가 얕고 길이가 긴갤리선” 이 대부분입니다.

 

 

중세” 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 나침반과 화약” 이 유럽에 전해지고 함포”  탑재가 가능해지면서 해전

은 변화하니 고대 해전의 주축인 갤리선 대신에  범선” 이 늘어나고 전투에서는

함포” 사용이 느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연합함대가 맞붙은 프레배자 해전

과 레판토해전” 이니.....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대량의 함포가 사용되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여전히  갤리선으로 대표되는 충각과 백병전” 위주의 함선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당시 갤리어스 로 대표되는 포함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배는 갤리선에 일부 함포”  를 올린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문 수나

명중률 및 화력은 형편없는 수준 이었지만 그래도 함포를 이용한 포격의 이익은 있었습니다.

 

 

중세에 동방무역에 종사한 항구도시가 다섯 있었으니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라 불리는

 라구사 와 이탈리아의 서쪽 아말피피사제노바” 에 이탈리아 동쪽에

 베네치아” ...  다섯 나라는 전쟁을 통해 제노바와 베네치아 만  남았는데, 상권

쟁탈을 위해 십자군 전쟁때 레반트에서 그리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수히 전쟁을 치릅니다.

 

 

제노바 해군은 달마티아를 거쳐 베네치아 인근 까지 침략했으며, 이때 베네치아 수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제노바로 끌려간 마르코폴로 는 옥중에서 중국을 다녀온

자신의 경험을 구술한 것이 "동방견문록인데..... 베네치아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해 서쪽으로 향하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방어하나 역부족 입니다.

 

 

145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그리스를

정복한후 그리스의 베네치아 영토와 크레타섬 점령후 서쪽 기독교 세계로 진격해오자

1538년 6월 베네치아 요청으로 1차 기독교함대 가 결성되니... 교황청 27척에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스페인 49척에  베네치아 55척과 몰타등 162척이 집결 합니다.

 

 

1538년 6월 로마 교황령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주축으로 결성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함대는 지중해

의 패권을 다투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인 것이니.... 1차 기독교함대는 교황청 27척에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스페인 49척등 도합 76척은 시칠리아 동부 메시나에 집결합니다.

 

 

프레베자 해전” 은 알제리등을 근거지로 지중해 유럽의 해안을 약탈하는 이슬람 함대를 먼저 격파

해야 한다며 면피용으로 함대를 출진시킨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의 비밀 지시를 받은

제노바의 안드레아가 전투를 회피함으로써 기독교 함대는13척 손실36척 나포,

포로 3천으로 패배하니... 오스만 투르크” 가  지중해 제해권” 을 장악해 이슬람의 바다로 만듭니다.

 

 

비록 튀니지는 쉴레이만이 죽을 때까지도 스페인 땅이었지만아무튼 여세를 몰아 오스만의

군대는 북아프리카로 계속 진출해 알제리까지 영역을 확대했으니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은 빈 포위의 실패로 체념한 서유럽을 제외하면 예전 로마 제국과 거의 일치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럼 기독교도들을 대경실색케 한 사건이 벌어졌으니 유럽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로 부터 3면에서 포위된 프랑스는 기독교 세계의 적인 이교도 오스만 제국과 손을

국제사회는 잡았으니 영원한 적도 없고영졍원한 우방도 없으며 "적의 적은 내편" 이라는 진리가 떠오릅니다.

 

 프랑스는 북이탈이를 차지하기 위해 수백년 동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와 10번이 넘는 전쟁을 치루웠는데

1542년 부터 5년간 벙러진 이탈리아전쟁에서 푸랑수아 1세의 프랑스와쉴레이만대제의  오스만 동맹군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와 사보이공국, 제노바공국등의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니 이때사보이공작령인 니스

빼앗기 위해 바르바로스의 오스만 해군은 1543년에 프랑스 해군과 함께 사보이공국의 니차를 포위합니다.

 

 

지중해의 무법자가 된 해적 하이르 앗 딘은 1540년대에 서지중해를 마음껏 누비며 기독교 해안을 약탈했고,

이탈리아 도시들은 감시탑을 세우거나 그에게 바칠 배상금을 준비하기에 바빴으며 마요르카사르데냐,

이스키아섬은 단골 약탈 대상이었고 합스부르크측 제독 안드레아 도리아도 감히  맞서지 못하여 피했습니다.

 

 

하이르 앗 딘이 은퇴한 후에도 제자인 투르굿 (드라구트과 시난 레이스가 여전히 서지중해를 공포에

몰아 넣았고1555년 트리폴리에 이어 1560년에는 제르바 섬을 수복하며 합스부르크 세력을

바르바리 해안에서 몰아냈으며.... 마지막 남은 주요 거점인 튀니스도 1574년에 오스만령으로 됩니다.

 

 

1530년대 중반부터 쉴레이만 1세는 눈을 동쪽으로 돌렸으니 오스만의 대군은 동방의

앙숙인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를 공격하여..... 오랜 시간 교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술탄의 군대는 당시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에 놓여 있었던 페르시아로 부터  이라크와 아르메니아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고.... 특히 유서깊은 도시 바그다드를 획득하는 영예를 얻었으며또한 남쪽으로 원정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아덴까지도 영역을 넓혔으니 아랍 세계가 오스만 제국의 깃발 아래 통합된 것입니다.

 

 

그러나 1555년까지 이어진 3차례의 원정에서도 끝내 옛 페르시아 땅의 사파비 왕조를 복속시키는 것에는 실패

했으며.... 결국 1555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졌고 동쪽의 국경은 안정됩니다.

 

그리고 1530년대에 인도 구자라트 지역의 이슬람 왕국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기 위한 구원 병력을 요청하자

쉴레이만은 수십문의 중포를 동반한 1만의 군대를 포르투갈이 당시 점유하고 있던 디우로 원정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필 군대가 아직 인도양에 있을 때 이슬람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친 포르투갈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보급을 받지 못한 오스만 군은 디우를 함락시키기 일보 직전에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왕국 점령1차 빈 공방전프레베자 해전 등을 통해 정복 군주로서의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내치에 있어서도 대단한 군주였으니 괜히 입법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후대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러했듯이 법을 정비하는 것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니군하총회이집트 법전쉴레이만 법전 등이 그의 손에서 편찬되었으며

특히 군하총회는 법률로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분란을 진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게다가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법인 샤리아가 미치지 못하는 규율까지도 '카눈으로 정비했고 사유재산도

적극 보장했으며..... 노예라 하더라도 쓸만한 인재는 관료로 올렸고 예술과 건축에도 관심을

보이니 수많은 모스크가 그의 치세에 건립되었으며 회화와 공예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이 발전합니다.

 

 

미마르 시난 같은 예술인들은 술탄의 후원 하에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국가 엘리트의 지위를

누렸는.... 심지어 그 소문을 듣고 멀리 유럽에서 까지 찾아올 정도였으며 쉴레이만 1세의

치세에서야 오스만의 문화는 비로소 페르시아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틀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쉴레이만 본인도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으니 그는 무히비 (Muhibbi) 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양한

작품을 썼으며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를 구사하며 많은 시를 지었으며 그리고 재임 내내,

심지어 원정 와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써서 당시의 정황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이런 뛰어난 내치 덕분에잦은 원정에도 불구하고 신민들은 그를 성군으로 추앙했으며 그리고 역사는

이 시기를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하는데..... 하지만 내정과 외정 모두 훌륭해 보이는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에도 두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이들 모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합니다.

 

먼저 쉴레이만 시대에 오스만제국은 튀르크계 개국공신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는데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이전까지는 튀르크계 개국 공신들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해 왔습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을 주도한 메흐메트 2세는 술탄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데브시르메 출

인 자아노스 파샤를 임명했는데다만 개국공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고데브시르메

출신을 여당으로 개국공신 세력을 야당으로 삼아 서로를 견제하고 술탄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쉴레이만 시대에 이르러 데브시르메 출신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이 균형은

무너지니 재상을 비롯한 고위직을 이들이 독점하다 보니 개국공신

세력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졌고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메흐메트 2세가 확립하여 쉴레이만 시대까지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전제군주제는 두 정치 세력을

교묘하게 경쟁시킬 때만 성립할수 있었던 것이어서쉴레이만 이후 오스만 술탄들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해지니 즉 황권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으로이후 예니체리들이 술탄을 갈아치우는 사태로 이어집니다.

 

다음으로 후궁 가운데 하나인 휘렘 술탄을 지나치게 총애하여제국의 불문율을 깨고 그녀를 정식

황후로 책봉했으니쉴레이만의 정책(?) 으로 인해 하렘 세력이 정치에 관여하는

선례가 생겨나고 말았으며 그리고 쉴레이만 사후에도술탄의 모후나 애첩이 정치에 관여하게 됩니다.

 

 

요컨대 쉴레이만 시대에데브시르메 세력의 정권 장악하렘 세력의 정치 간섭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났는

그나마도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술탄이 유능한 인물이어서 황권을 강화할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마련하고 휘렘 술탄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노라고 했다면 쉴레이만의 실책은 만회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술탄'   이 막장 주정뱅이  셀림 2세라!  셀림 2세는 국정에 는 관심이

없고 술과 여자에만 빠져 사는 동안 그의 누나와 재상이 정권을 농단했으니.....

이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성장세를 멈추고 정체하기 시작했으며 이어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쉴레이만 1세는 젊었을 때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고 늙어서도 풍채 후덕하고 은염이 성성한

미노년으로 키도 크고 인상도 또렷하며 패션 센스마저 특출한 옥골선풍형의 인물이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인 바르톨로메오 콘타라니는 막 즉위했을 당시의 쉴레이만을 직접 만나본 후

그의 모습에 대하여 "키가 크고 날씬하면서도 강인했는데얼굴은

특히 마르고 살이 없었다.  수염이 나있었지만 풍성하지는 않았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터키(튀르키예) 역사상 가장 유명한 러브 스토리 주인공이기도 하니 그는 오스만의 술탄 중에서

매우 보기 드문  애처가였는데 문제는 오스만 술탄 중에 그가 유일하게 결혼을

했다는 점이라공식 황후를 두지 않았던 선대의 술탄들과 달리그는 일평생

휘렘 술탄 (록셀라나이라는 여인을 애지중지 사랑하여 오스만 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합니다.

 

휘렘 술탄은 신하가 헌상한 노예 출신이었으니.... 쉴레이만은 25년이나 휘렘과의 일부 일처를 유지하는 순애보를

보였는데..... 휘렘은 상당히 야심만만한 여자였기에 자기 자식 셀림이 술탄의 자리를 잇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쉴레이만은 그녀의 충동질로  다른 후궁의 아들 무스타파와 바예지트를 처형하는등 실책도 저질렀습니다.

 

 

이후 휘렘의 뜻대로 그녀의 아들이 술탄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 아들인 셀림 2세는 술독에 빠져 살았던 한심한

인간이라.... 후대 역사학자들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한 것을 쉴레이만 1세의 큰 실책 중 하나로 꼽습니다.

 

이브라힘 파샤라는 신하와의 우정이 유명하니 데브시르메 징집자 출신으로 황태자 시절부터 쉴레이만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술탄 제위후 초고속 승진을 거쳐 총신이

되었으며 술탄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쉴레이만은 자신이 형제를 고를 수 있었다면 이브라힘을 골랐을 것이라는 말을 했으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브라힘을 처형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이브라힘은

오스만 역사 최단기간에 재상의 위치까지 올랐으며 1차 빈 공방전시 오스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심지어 쉴레이만은 자신의 여동생인 하티제 공주와 결혼까지 시켜주었는데...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브라힘의 권세에 쉴레이만은 점차 불편해했고 결국 궁중의 암투에

휘말려 이브라힘 파샤는 처형당하니 살아있는 동안 사형은 절대 없을거라는 다짐도 소용없다는....

 

 

쉴레이만 1세는 내치와 외치 모두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

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자부하며 교황의 삼중관을 능가하는 사중관을 만들어

착용하기도 했다는데..... 사중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11만 5천 두카트에 달했다고 합니다.

 

가정적으로 보면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으니 특히 아들을 2명이나 살해했는데쉴레이만의

아들 중에서  후계자로 유력했지만 가장 먼저 탈락한 황자는 마히데브란 소생인

무스타파로 재능은 있었으나 어머니가 휘렘에게 총애가 밀리자 찬밥 신세가 됐습니다.

 

 

이후 형제들과 함께 자질을 시험받으러 총독으로 부임받을 때도 부황의 영지인 마니사가

아닌  아마시아로 임지가 정해졌고 마니사는 셀림이 부임했는데그나마 이브라힘

파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이브라힘이 처형당하자 위기에 몰린

무스타파는 1553년에 휘렘의 사위인 뤼스템 파샤의 고변에 따라 역모 혐의로 처형됩니다.

 

살아남은 쉴레이만의 아들은 셀림바예지트지한기르였는데..... 지한기르는 병약해 일찌감치

탈락했고 바예지드는 루멜리아에서 무스타파 추종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한뒤

쉴레이만은 아들들을 시험하려고 1559년에 셀림과 바예지드의 임지를

콘야와 아마시아로 바꾸니 이때 바예지트가 미적거리자 쉴레이만은 셀림을 후계자로 확정짓습니다.

 

 

이에 바예지트는 어차피 셀림이 아버지만 없으면 그를 죽일 것은 분명했기에발악으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러나 셀림을 지지하던 소콜루의 토벌군에 밀려

페르시아로 망명한 뒤오스만과의 관계 개선을 노린 타흐마스프 1세에게 처형당합니다.

 

쉴레이만의 정복 사업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으니... 사파비조 페르시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그의 시선은

서쪽 유럽으로 쏠렸는데이미 그의 경쟁자였던 카를 5세도 세상을 떠나 유럽 세계는 강한 구심점을 잃었습니다.

 

 

1565년에 황제가 파견한 오스만 함대는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로도스 섬을 잃고 이주한 몰타로 출격

했으니  5월 18일 부터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는데... 그러나 로도스와 달리 몰타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4개월만인 9월 11일에 퇴각하여 종료되었으며 몰타 기사단은 방어에 성공합니다.

 

볼테르가  "몰타 공방전 다음으로 널리 알려진 사건은 없다."  라고 평가했으니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이니.... 1560년 제르바 섬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패한 유럽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오스만 제국 군대의 불패 신화를 깨뜨렸고

이후 한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도 승리하면서 지중해내 제해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합니다.

 

 

1522년 로도스섬을 오스만군에 잃은 로도스 기사단은 8년이 지난 1530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로 부터 몰타섬과 고조섬을 받아 이주해 섬을 요새화하며  근거지로

삼았는데.....  댓가로 매년 한마리의 매를 시칠리아의 부왕에게 바치리고 하는데 이 섬은

사도 바울이 로마라 가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섬에 오른후 기독교를 전도한 성지이기도 합니다.

 

 

또 카를 5세는 수호성인의 축일에 장엄한 미사를 개최할 것,  북아프리카 연안에 위치한 스페인령

트리폴리를 방어할 것을 몰타 기사단 측에게 요구했으니 몰타 기사단의 주요 임무중 하나

는 북아프리카 연안을 근거지로 하여 활동하는 이슬람 바르바리 해적 소탕과 활동 저지였습니다.

 

 

지중해 동서간 항해는 유럽과 북아프리카를 연결하는 남북간 항해 만큼 빈번하지는 않았지만 몰타섬은 지중해

동서 구분의 경계해역인 시칠리아와 튀니지 사이에 위치해 교통과 전략상 요충지로 오스만의 지원을

받던 북아프리카 바리바르 해적들이 지중해 서부 지역에 해적 행위를 함에 있어  몰타섬이 멀지 않았습니다.

 

몰타 기사단은 이슬람 선박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며 해적 소탕 작전까지 펼치니

바리바르 해적들은 활동이 크게 위축 되었고 또한 동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던 오스만에게

지중해의 서부 진출을 가로막는 존재였으니 지중해 서진을 꾀하던 오스만은 몰타섬을 정복해야 했습니다.

 

1559년 이후 바르바리 해적이 스페인 연안을 습격하면서 기독교 세력이 결집하게 되니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트리폴리에서 해적을 축출시키기 위해 해군 원정을 결의했고 몰타 기사단도 참전해 스페인을 지원하였지만

원정은 1560년 5월에 튀니지 제르바 섬에서 일어난 제르바섬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 해군 함대에게 패배합니다.

 

 

스페인 해군이 제르바에서 대패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몰타 침공 가능성이 높아졌으니 1560

8월 몰타 기사단장인 장 파리조 드 라 발레트는 몰타 기사단원들의  몰타

귀환과 전투 준비를 명령했고 전력을 강화한 몰타 기사단은 이슬람 선박 약탈을 재개합니다.

 

 

1564년에는 몰타 기사단에서 가장 악명높은 마튀랭 로메가스(Mathurin Romegas) 가 오스만

제국의 대규모 상선을 나포하는 일이 벌어졌으니로메가스가 약탈했던 상선 중에는

후궁의 환관이 소유했던 선박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카이로 총독알렉산드리아

총독쉴레이만 1세 술탄의 딸의 유모와 같은 오스만 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을 생포합니다.

 

1565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이스탄불에 잠입한 장 드 발레트의 간첩들이 오스만 제국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알리자 장 드 발레트는 이탈리아에서 병력을 소집하고 물자를 비축했으며 또한

산탕글루 요새 (Sant'Anġlu), 산미키엘 요새 (San Mikiel), 산티에르무 요새 (Sant'Iermu) 를 정비합니다.

 

 

1565년 3월 하순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이스탄불에서 출격했으며 몰타 기사단 소속 역사가인 자코모

보시오 (Giacomo Bosio) 는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갤리선 131소형 갤리선

7척에다가 대형 갤리선 4척과 기타 수송선을 포함해서 총 193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스페인 용병 프란시스코 발비 디 코레조 가 집필한 일기를 통해 오스만 제국몰타 기사단의 군대 구성이

알려졌으니... 몰타 기사단은 기사 500스페인 출신 병사 400이탈리아 출신 병사 800,

갤리선에 탑승한 병사 500, 산티에르무 요새 수비대 100,기사의 하인 100갤리선

의 노잡이로 나섰던 무슬림 노예 500몰타섬 주민 중에서 동원된 지원병 3,000명 합계 6,100명 입니다.

 

 

오스만은 기병대(스파히) 8,000예니체리 6,000발칸반도아프리카아나톨리아 출신 병사 20,000,

시리아이라크 출신 병사 4,000그리스시칠리아 출신 병사 200영주 지원병

3,000농민 병사 5,000루마니아 근위병 1,200트리폴리알제 출신

증원 부대에카라마니아(Caramania) 기사단미틸리니 출신 병사에비아 기사단 등 합계 48,000명입니다.

 

1565년 5월 18일 새벽 오스만 함대가 몰타 근해에 상륙했으니몰타 기사단은 노예나 도주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투옥시키고 전투에 쓸데없는 사람은 궁전 밖으로 몰아냈으며,전투에 견딜수 있다고 판단된

사람은 재산과 가축을 데리고 내륙 지대에 있는 요새로 대피시켰으며 미처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을 파기합니다.

 

 

오스만 군대는 성 엘모 요새 공략에 나섰는데기사단은 시칠리아 지원군이 오기 전까지 공격을 지체하려고 기사

100병사 500명을 배치했으며 한달후 트리폴리 총독 드라구트(Dragut) 가 성 엘모 공격에 가세하였고

6월 23일 오스만 군대는 요새함락에 성공하였지만 오스만 군은 6,000명이 희생되었고 드라구트도 사망합니다.

 

 

7월 15일 오스만의 무스타파 파샤는 셍글레아 공격을 지시하니 그랜드하버(Grand Harbour) 를 가로지르는

100척 선박들이 산미키엘 요새를 공격했고 파샤가 이끄는 군대는 산미키엘 곶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는데한편 오스만 군대의 탈주자가 셍글레아 공격 계획을 폭로하면서 몰타 기사단은 성곽을 복구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65대 공성용 대포를 동원해 수도였던 므디나에 포격을 가했으며 8월 7일에는 산미키엘 요새와

비르구에 대한 공격을 명령했고 8월 19일부터 21일 사이에는 므디나에 대한 총공격을 준비했는데,

몰타 기사단은 원로회의를 통해 산탕글루 요새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지만.... 기사단 소속 장군은 거부합니다.

 

 

9월 초반 오스만의 쉴레이만 1세 술탄은 증원을 명령하고  시간이 부족하면 겨울을 넘긴다는

계획을 세웠으며쉴레이만 1세의 군대는 시가전에 돌입하게 되었으며 9월 7일 스페인

의 수하인 시칠리아의 가르시아 부왕은 마침내 8,000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몰타에 상륙합니다.

 

새로운 원군 때문에 9월 8일에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대포를 선박에 싣고 몰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으니.....

9월 11일에는 몰타 기사단이 오스만 제국 군대의 야전 병원을 습격하면서 오스만 제국 군인들을 학살합니다.

 

 

페르디난트 1세의 후계자인 막시밀리안 2세가 헝가리 국왕으로서 지위를 인정받는 대신 공물을 납

부하기를 거부하자 1566년에는 72세의 노구를 직접 이끌고 12만의 대군으로 또 다시

헝가리 원정에 나섰지만 이때 쉴레이만 1세는 통풍과 관절염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으며다른 질병에도 시달렸기에 실질적인 지휘권은 재상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행사합니다.

 

원정에 나선지 50일쯤에 헝가리의 크로아티아인 백작 니콜라 즈린스키가 3천명의 병력으로

지키는 시게트바르 요새에서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으니.... 시게트바르

요새를 공격한지 한 달이 넘었을때 마침내 오스만군은 성벽을 돌파하고 외성을 함락합니다.

 

 

그래서 즈린스키 백작과 헝가리 수비군은 내성으로 후퇴했고 여기서저항을 계속했는데..... 의자에 앉아있던

노쇠한 황제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젊은 시절 말에 올라 몸소 성을 공격하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릅니다.

 

요새를 함락시키기 직전인 9월 7그는 병이 악화되어 시게트바르 요새의 진영에서 눈을 감았는데

사망 당일까지 일기를 썼다는 점이나 죽음을 극비에 부칠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급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마지막 일기에는 "요새는 저리도

타오르고 있건만승리의 북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도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결국 그가 죽고 난지 불과 하루 뒤에야 해당 요새는 함락되었으며.... 시신은 코스탄티니예로

운반되어  장례식이 치러졌으니이때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황제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했으며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는 다시는 그를 뛰어넘는 명군이 등장하지 못합니다.

 

쉴레이만 1세가 사망했을 때 그를 보좌했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며칠간 쉴레이만 1세의 승하 사실을

함구했다고 하는데이사가 진시황 마차에서 한 것 처럼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쉴레이만 1세의 마차에

들어가 마치 황제에게 보고를 하는 것처럼 연극을 해서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는 줄 알았답니다.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72세로 장수한데다가 재위 기간이 46년이나 되다 보니쉴레이만 한 사람이 옥좌에 앉아

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왕이 많이 바뀌었으니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죽고 펠리페 2세가  등극했고,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의 잉글랜드 또한 그의 치세와 겹치며 프랑스에서는 발루아  왕조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한 프랑수아 1세부터 앙리 2프랑수아 2샤를 9앙리 3세의 치세에 해당합니다.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군은 악마의 가호를 받는 무적의 군대로 취급받았으니 아닌게 아니라

 15,16, 17세기 오스만 제국은 불가리아 제2제국(1389), 세르비아 공국(1459), 

보스니아  왕국(1462), 왈라키아 공국(1462), 몰다비아 공국(1484) 등을

점령해 땅을 넓혀나갔으니, 미친 듯이 영토 확장에 골몰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유목민 국가로 시작하여 군주의 군사적 능력과 업적이 곧 군주의 정치 생명과 통치력으로

직결되었던 오스만 제국의 특성 때문이었으니 시조 에르투으룰 이래로 오스만의 군주들은 어떻게든 군공을

쌓아 자신의 치적으로 삼고 유목 귀족과 전사들에게 전리품과 토지를 하사해 지지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동로마 제국과 유럽 방면으로의 영토 확장은 스스로를 이교도와 불신자들을 무찌르고 이슬람의 깃발을

유럽에 꽂는 성전사이자신앙심 깊은 군주로 선전할 수 있었고 이슬람 성전사(Ghazi 가지들과

성직자의 지지를 확보하는 좋은 수단이었으니 오스만의 군주들은 즉위하는대로 군공을 쌓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지방 총독은 군사를 지휘하는 지휘관까지 겸했으니  행정 단위와 군대 편제가 일치되어 있었고,

그런만큼 총독이 근무 평가와 승진 여부를 따질 때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 가운데 하나가

군공이었으니 이런 탓에 오스만 제국 궁정이나 지방관들 가운데는 호전파가 있을

수 밖에 없었고, 16세기 후반부터 중앙 정부의 뜻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군사 원정을 단행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유는 오스만 1세는 가지(Gazi)들을 끌어들여 나라를 세웠으니 자신도 가지를 자칭한지라

 '이교도를 복속시켜, 이슬람의 땅을 넓힌다는 것은 오스만 제국의 국시처럼 되었으며

 3대 군주 무라트 1세 부터는 나라의 기틀이 어느정도 잡힌 관계로 가지를

칭하지 않았지만 공신 세력으로 자리 잡은 성직자들도 가지들과 의견을 같이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 오스만 제국의 종교적 팽창주의는 이전이나 근현대 보이는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성격이 전혀

다르니 오스만조와 아나톨리아 가지들에게 있어 '성전은 정치적으로 비무슬림들이 다스리고 있는

이교도의 땅을 정벌하여 무슬림들이 다스리는 땅을 넒히자는 것이지 비무슬림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제국의 황제들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후 자신을 '로마 황제

(카이세리-)', '카이사르의 후계자라 칭하였으니 서로마와 동로마를 별개의 국가로 생각하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동로마는 로마에서 떨어져 나온 별개의 제국이 아닌 로마제국 그 자체였습니다.

 

 

처음으로 로마 황제를 자처한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의 주장을 두가지 근거로 뒷받침했는데먼저 로마 제국

 수도로 삼았던 도시를 수도로 하는 제국의 군주라는 것, 그리고 선대 술탄인  오르한이

동로마 황녀와 정략 결혼한 적이 있으므로..... 동로마 황실과 오스만 황실은 남남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의 입장에서는 거슬렸던 모양이지만이후 쉴레이만 1세 시대에

합스부르크 황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체결한 조약에서쉴레이만은 '황제로 표기된 반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이었던 카를 5세는 황제 칭호는 없이 '스페인 왕으로만 표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대 유럽용이고 술탄 내지 파디샤는 이슬람 세계 전용 명칭이며대내적

으로는 튀르크인의 전통적인 군주 칭호인 칸이라 통칭했는데....

20세기에 아타튀르크에 의해 오스만 제국이 망하자 칸이란 칭호도 역시 사라집니다.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에 비견되는 오스만 제국 최대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 (Mimar Sinan),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푸즐리 (Fuzûlî), '시인들의 술탄'

이라는 별명을 가진 바키 (Bâkî) 등이 모두 쉴레이만 1세의 후원을 받으면서 활약을 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카페 지기 | 작성시간 26.06.12 new 커피향기속에서도좋고 낯선도시의 좁다란 골목길에서도 좋고
    아무도 찾지 않는 벤치하나면 족하다

    하늘을 바라보며
    이름없는 바람과 함께 잠시 쉬어갈수 있는 작은 간이역하나에
    그 어떠한 직함도 의무도 잠시 벗어나
    오직 나라는 사람으로 앉아 내마음이 어디쯤 와 있는지 살펴볼수 있는 시간이면 충분하다

    오늘 인생이 어느 작은 간이역에 머물러 있다면
    창밖의 바람과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다음을 위한 힘을 채워 보심 어떨런지요

    간이역은 막연히 멈춤이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한 쉼표 아닐까요
    그럼으로 나에 간이역은 어쩌면
    지금 이곳일수도.....
    따뜻한글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바이칼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2 new
    만약에 1565년에 쉴레이만 1세의
    오스만제국이 저 몰타섬을 함락했으면.....
    그전에 프레배자 해전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지중해 바다는 이슬람의 것이 되었을
    것인데 패하면서 기독교의 바다가 됩니다..

    송양지인이라고 했던가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술레이만 1세는
    1522년 12월 27일, 로도스 섬을 함락하고는
    요한 기사단의 항복을 받은후
    저들을 죽이지 않고 석방하는데....

    이슬람 오스만은 배까지 내서 저 요한 기사단의
    짐까지 실어다 주는 친절을 베풀었으니
    요한 기사단은 그후 몰타섬에 똬리를 틀고
    오스만의 서진을 막나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