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과 아이러니로 들여다본 현대사회의 명암
F. 뒤렌마트의 <죽지 못하는 남자>
연극평론가_ 김 문 홍
현대문명에 대한 풍자와 비판
볼프강 슈비터는 노벨상 수상자로 모든 명예와 부를 뒤로 한 채 죽고 싶어 한다. 그런데 그는 죽을 때마다 부활한다. 모든 사람은 영생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는 죽고 싶어하니 이것은 지독한 역설이다. 또한 슈비터가 죽을 때마다 그는 살아나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다시 부활하고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것은 참 어이없는 아이러니다.
부두연극단은 이번 정기 공연에서 모험을 감행하고 있다. 프로젝트 그룹‘배우다’와 극단 ‘고춧가루부대’라는 이질적인 단체를 출연진으로 기용한 점이 그렇고, 주제나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업성과는 거리가 먼 난해하고 심각하고 위험부담이 큰 텍스트를 국내 초연으로 공연하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렇다.
그러나 이 작품은 주제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서사적 전개로서의 플롯 구조는 단순하며 명쾌하다. 2막 마지막 시퀀스에서 놈젠 부인에게 읊조리는 슈비터의 다음과 같은 냉소적인 대사만 톺아본다면 주제 역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슈비터_ ...(전략) 전 정의니, 자유니, 은총이니, 사랑이니 인간이 질서를 유 지하고 타인을 약탈하는데 필요한 모든 구실들을 깨끗이 포기할 겁니다. 인생은 혹독하고, 맹목적이며 헛된 것이고, 모든 건 우연이니까요...(후략)
그래서 그가 죽어 다시 부활할 때마다 은총을 강조하는 목사와 구세군 사령관, 인간에 대한 경외심도 없이 화폭에 생명을 담으려는 화가 니펜슈반더, 창녀는 감정을 나타내기보다 감정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뚜쟁이 놈젠 부인 등이 주인공 슈비터 대신 죽어가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현대사회와 문명의 병폐를 비판하고 풍자한다.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죽으려는 슈비터는 부활하고, 잘못에 대한 도덕과 윤리에 무감각한 인간 군상이 현대문명의 병폐라는 희생양이 된다.
<죽지 못하는 남자>(원제: 혜성, F.뒤렌마트 작, 이경미 번역, 이성규 연출,2018.
12.27〜30, 한결아트홀, 110분)는 2막 구성의 장막극이지만, 그 단일한 의미구조와 형식은 단막극적인 특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선 공간적 배경이 니펜슈반더의 화실이라는 단일 공간이며, 시종일관 극적 긴장감이 서사 전개의 추동력으로 작용하고 있으며, 또한 결말 역시 명쾌한 제시 없이 관객의 극적 상상력에 맡기는 닫힌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인물들 역시 현대 문명사회의 병폐와 명암이라는 나름대로의 절박함을 지니고 있으며, 불필요한 암전을 절제하며 관객의 극적환상을 유지한다.
잔꾀 부리지 않는 정공법의 연기와 미장센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는 주인공 슈비터(김영학 분)를 제외한 모든 배역들이 튀거나 처짐이 없이 평균적인 수준과 앙상블을 유지하고 있다. 쉬라터 박사 역의 박찬영, 슈비터의 김영학, 아우구스테 역의 김하영을 제외한 대부분의 배우들은 연기 경력이 일천함을 역할 몰입의 열정과 앙상블로 극복해내고 있다. 특별출연한 박찬영은 연기 내공과 아우라로 크나큰 무게감을 주었다. 쉬라터 역의 김영학은 엄청난 분량의 대사를 무난하게 소화하며 열연했다. 그러나 상황과 장면에 따른 연기의 다양한 변화와 주제를 함축하여 전달하는 대사와 상황과 내적 감정을 전달하는 대사와의 미묘한 차이를 변별하지 못한 점은 다소 아쉽다. 자유분방한 표정연기와 몸짓으로 올가의 내적 심상을 구체적 이미지로 표현한 권혜원, 그리고 한 치의 빈틈도 보이지 않는 대사와 동작으로 아우구스테 역을 표현한 김하영의 연기도 튀지 않으면서도 역할의 초점심도를 잘 표현해 주었다. 이번 공연에서 단연 돋보인 것은 극단 고춧가루부대의 문지완이었다. 그는 니펜슈반더, 슈비터의 아들, 샤프로트 역을 다양하게 연기하면서 무한한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연기 경력이 일천한 아마튜너 연기자이지만 잔꾀를 부리지 않고 오직 역할의 진실에만 몰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번 공연에서 무대장치와 조명 또한 돋보였다. 모딜리아니 풍의 왜곡된 그림을 통해 주제와 인물의 성격을 암시한 점이나 침대와 탁자와 의자, 그리고 낡은 가방이나 의상 등은 주제나 극적 상황, 인물의 내면을 암시하는 오브제의 역할을 톡톡하게 수행하고 있다. 극단 창단부터 35년간 고전과 현대의 문제작 등을 고집해 온 연출가 이성규의 연극철학이나 레퍼토리에 대한 한결같은 신념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공연의 큰 수확이었다. 늘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며 성찰을 요구하는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고집하는 뚝심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덤이었다. 관객의 극적 취향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오로지 연극예술의 본질에 집착하는 그의 고집이 안쓰럽게 보일 지경이었다.
연극은 부박하고 천박한 사회와 인간에 던지는 가열 찬 죽비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죽지 못하는 남자> 공연은 큰 의미를 지인다. 쉽고 재미있는 작품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들을 심오한 연극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오늘의 연극이 져야 할 책임이고 의무이다. 연극과 연극인이 깨어 있지 않으면 관객을 결코 깨울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쉽게 해도 어렵게 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다면 한번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니겠는가.
(『부산예술』, 201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