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 선생의 고체(古體) 창조의 의미
일중 선생이 한글 ‘고체’를 창조한 것은 정인보선생께서『우리 글씨 쓰는 법』에 써준 서문과 관련이 있다.
이때가 1942년이었다. 이 시기에 정인보 선생을 만난 것은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작용한 것 같다.
일중선생이 정인보 선생을 만나기에 앞서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해례본>은 1940년 안동의 이한걸의 집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은 몇 개월간의 검증과정을 거쳐
그해 7월 30일에 조선일보에 보도된다. <훈민정음해례본>은 특히 정인보 선생같이 국학(國學)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톱 뉴스였다. 그 이야기는 2년 후 청년 일중에게 서예사적인 의미로 전달되어
『우리 글씨 쓰는 법』에 실리게 된다.
<관동별곡>부분 1960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기 전까지 한글은 이론적 배경이 없어서 모양에만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훈민정음해례본>의 발견은 이러한 문제들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훈민정음해례본>은 청년 일중에게
한글에 대한 원론적인 이론의 틀을 제공해주었을 뿐아니라, ‘고체’를 개발하게 하여 그동안 궁체에 한정되었던
한글서예의 문을 넓혀주었다. 일중선생의 특출한 점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판본체에 전서와 예서의
필의를 불어넣어 한글고체를 탄생시켰다는 점이다.
<바위> 1976
일중선생이 ‘고체’를 성공적으로 창조하는 데는 많은 세월이 흘렀다.
선생께서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한글서예에 적용시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것은
60년대로부터 본격화되었으니, 40년에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되고 42년 정인보 선생을 만난 것을
기점으로 삼는다면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한글을 전용하거나 한글·한자를 함께 쓰는 현대의 우리로서는 새 각오로 한글은 물론, 국·한문 서예에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 글자로 현판(懸板)도 써야 하고 비문(碑文)도 새겨야 하며 작품도 해야 한다.
연약해 보이는 작은 글씨 위주의 ‘궁체’로만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체’는 글자의 크기를 막론하고 필력을 구사할 수 있으니
이 ‘체(體)의 개발과 무궁한 발전이 기대되는 바이다.” -일중 김충현 지은 "예(藝)에 살다-
위의 글은 일중선생이 한글 ‘고체’를 창조하고 난 후 ‘득의(得意)’와 ‘희망(希望)을 전달하고자 한 것 같다.
‘고체’의 창조는 한글서예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만일 한글 ‘고체’가 개발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한국 서예는 지금같이 폭넓은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시엽산방 8영>일부 1978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김정현(09) 작성시간 15.06.16 2조 도예과 김정현 입니다
고체를 보여 마음을 다잡게 되는 계기가 된것같습니다. -
작성자이하늘 작성시간 15.06.17 3조 순수미술학부 이하늘 입니다
고체를 통해서 한글의 글씨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편하게 펜으로만 쓰는 한글에서 붓으로 쓰는 한글의 색다른 문자체를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고체를 통해 한글의 묵직한 멋을 알게되었습니다 -
작성자신현우 작성시간 15.06.18 2조 기계자동차공학부 신현우 입니다.
고체의 창조는 한글서예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만약 한글 고체가 개발되지않았다면 오늘날의 한국 서예는 지금같이 폭넓은 방향으로 나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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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10조 경영학부 정상원 작성시간 15.06.19 경영학부 정상원입니다. 딱딱함 속에 유연함이 있고 한국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글씨체락도 생각합니다. 가지런한 글씨와 일정함 속에 창의력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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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지훈 작성시간 15.06.21 1조 식품영양학과 신지훈입니다.
한글 서예가 저러한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좋은 글씨가 만들어 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항상 한글의 소중함을 느껴야 한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